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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의 왕’ 후쭝난, 키 작아 황푸군관학교 쫓겨날 뻔

후쭝난이 20년간 따라다닌 예샤디(葉霞翟·왼쪽 첫째). 오른쪽 첫째는 전 주소련 대사 푸빙창(傅秉常). 1937년 칭다오(靑島). [사진 김명호]
수천 년간, 중국은 황제 밑에 왕들이 많았다. 인간 세상은 연극 무대와 다르다. 막이 바뀐다고 해서 순식간에 새로운 정경이 펼쳐지지 않는다. 혁명으로 공화제가 실시된 후에도 사람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왕이라는 직제는 없어졌지만, 지방에 할거하는 군벌들을 여전히 왕(?)이라고 불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1>

국민정부 시대에도 여전했다. 윈난(雲南)성 주석 룽윈(龍雲·용운)은 윈난왕, 동북(東北) 보안사령관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동북왕, 마부팡(馬步芳·마부방)은 칭하이(靑海)왕,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특무 조직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을 이끌었던 특공왕(特工)왕 다이리(戴笠·대립) 외에도 산시왕(山西)왕 옌시산(閻錫山·염석산)등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의 권한과 권력은 봉건시대의 왕과 다를 게 없었다. 통치지역 주민과 관원들의 생사여탈권을 남과 나누지 않았다. 중공 정권 수립 후에도 마오쩌둥은 동북군구사령관 가오강(高崗·고강)을 대놓고 동북왕이라고 불렀다.

왕 소리를 들으려면 황제의 신임이 두텁거나 황제도 어쩌지 못할 힘을 보유해야 했다. 대륙시절, 황푸군관학교도 자타가 인정하는 왕을 몇 명 배출했다. 남들이 시베이왕(西北王)이라 부르던 후쭝난(胡宗南·호종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후쭝난은 저장(浙江)의 작은 약방주인 아들로 태어났다. 하루 두 끼가 고작이었지만 공부 하나만은 잘했다. 중학교 졸업 후 간판만 학교지 학교 축에도 못 드는 소학교에서 국어와 역사·지리를 가르쳤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을 애들에게 가르치다 보니, 세상에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일기 남긴 것을 보면 양심적인 교사였다. “나는 행운아였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회초리 맞으며 고문(古文)을 익혔다. 학생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덜기 위해 고전을 끼고 살았다. 천하대사가 이해되기 시작하자 어떤 부잣집 아들도 부럽지 않았다”는 일기도 남겼다.

1921년 여름 휴가 때 후쭝난은 친구들과 함께 베이징과 톈진 지역을 여행했다.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때 10년 후 일본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친구들에게 단언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침략하자 친구들은 10년 전 후쭝난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황푸군관학교 시절에도 ‘예언자’가 후쭝난의 별명이었다.

군관학교 학생모집 공고를 본 후쭝난은 교사 생활을 청산했다. 친구에게 “도둑놈들 소굴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편지를 남겼다. 예비고사 격인 초시(初試)를 치르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몇 년 후, 숙적(宿敵)이 될 시험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대범했다. 몇 마디 물어보고 2차 시험 응시자격증과 광저우까지 갈 여비를 찔러줬다.

후쭝난은 황푸 출신 중에서 진급이 제일 빨랐고, 가장 많은 병력을 지휘했다. 연도 미상.
광저우의 2차시험은 응시자격 심사였다. 18세 이상 25세 미만, 키는 165㎝ 이상이라야 응시가 가능했다. 규정대로라면, 키가 160㎝도 안 되는 29세의 시골 노총각 후쭝난은 응시자격조차 없었다. 그래도 체력 테스트는 받았다. 달리기를 하던 후쭝난은 키가 워낙 작다 보니 금세 눈에 들어왔다. 감독관은 후쭝난을 대열에서 끌어냈다. “너는 근본적으로 군인의 재목이 아니다. 응시자격을 취소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후쭝난은 자존심이 상했다. 감독관의 얼굴을 째려봤다. 융통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신체조건 때문에 모욕을 당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땅에 주저앉아 방성대곡했다. 울기를 마치자 대들었다. “나를 국민혁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를 대라. 혁명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키가 혁명과 무슨 상관이냐. 나폴레옹은 나보다 키가 작았다. 쑨원선생도 1m68㎝밖에 안 된다. 당 대표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 선생도 나만큼 작다. 쑨원 선생의 주장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너 같은 것들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열혈청년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듣고만 있던 랴오중카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후쭝난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대표 자격으로 너의 응시자격을 비준한다.” 이어서 글씨 한 폭을 써서 후쭝난에게 줬다. “국민혁명은 인재를 요구한다. 성적이 좋고 신체가 건강하면 키가 좀 작아도 응시자격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1개월 후 후쭝난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랴오중카이는 훗날 왜소한 후쭝난의 어깨에 국민당 최고의 계급인 상장 계급장이 부착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후쭝난은 여자 문제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다이리의 정부로 알려진 여인에게 반해 20년을 한결같이 따라다녔다. 52세 때 겨우 결혼에 성공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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