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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은행, ‘돈이 모이는 곳’인가 ‘돈을 바꾸는 곳’인가

1896년 미국 대통령선거 포스터. 은화와 금화의 교환비율을 16대 1로 유지하느냐, 마느냐가 최대 쟁점이었다. 은 구두를 신은 소녀가 등장하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는 그 비율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민주당 지지자의 작품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은화와 금화의 교환비율은 19세기 내내 골칫거리였다. 일본에서는 그 문제가 봉건사회 해체를 촉진했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스마트폰을 이용한 송금과 결제가 화제다. 통신업체와 정보기술(IT)업체들의 결제서비스가 은행들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은행업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 답은 역사에서 나온다.

④ 은행업을 바라보는 시각

중국에서는 일찍이 남송(南宋)시대에 교자(交子)라는 종이돈을 발행하며 금융업을 펼치는 상인들이 있었다. 청나라 때는 ‘첸좡(錢莊)’이라는 금융회사가 조선에서도 영업을 했다. 그 주인을 ‘장구이(掌櫃)’라고 하는데, 이는 손 금고라는 뜻이다. 그들 옆에 항상 작은 금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업이 생소했던 조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짱께’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는 8세기 초 이미 은화(和同開珍)가 발행되었으니 우리나라보다 근 300년이나 빨랐다.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지폐(藩札)를 발행하기도 했다. 봉건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무사정권으로부터 허가받은 금융업자, 즉 ‘료가에(兩替)’들이 등장했다.

료가에는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자금력에 따라 물품화폐·동전·은화·금화 등 취급하는 품목이 철저히 구분되고 동업자 사이에도 등급이 있었다. 전국에 걸쳐 이어진 료가에 조직의 최정점에는 10개 가문으로 구성된 ‘주닌료가에(十人兩替)’가 있었다. 이들은 무사정권(幕府·바쿠후)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축이었으며 정경유착의 뿌리였다. 훗날 미쓰이·노무라·산와·미쓰비시·다이이치 등 재벌 집단으로 진화했다.

교환의 기술이 넘쳐났던 일본에서는 화폐의 종류도 많았다. 바쿠후, 즉 무사정권은 금화와 은화의 교환비율을 1대 4.58로 정하고 료가에들이 이를 따르도록 명령했다. 이 비율은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당시 국제시세인 1대 15와는 너무 달랐다. 결국 저평가된 금화가 개항 이후 급속히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에는 금 함량이 3분의 1에 불과한 저질 금화만 남았다. 이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은본위제도가 뿌리를 내렸다. 구시대의 화폐 질서와 함께 료가에가 떠받들고 있던 봉건사회는 급속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은행장 얼굴이 그려진 일본 제일은행권. 일본은행권과 태환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오늘날의 지폐들은 이처럼 상업은행 업무를 담당했던 발권은행들의 약속어음에서 출발했다.
일본, 화폐와 금융제도 함께 개혁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부 주도의 개혁을 진행했다. 화폐제도도 그중 하나였다. 유신 정부는 1871년 ‘신화조례(新貨條例)’를 통해 금본위제도를 선언했다. 그러나 금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은본위제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유신 정부는 화폐제도와 금융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탄생한 1872년 ‘국립은행조례’는 1863년 링컨 대통령의 주도로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을 베낀 것이었다. 이 조례에서 ‘bank’라고 불리는 서양의 상업 금융기관이 ‘은행(銀行)’이라고 번역되었다. ‘은화를 취급하는 업자 일행(집합체)’이라는 뜻이다.

국립은행조례가 제정된 이후 구시대의 료가에는 서구식 은행으로 급속히 대체되었다. 1880년에는 150개를 넘어섰다. 하지만 은행의 난립은 은행권 남발로 이어졌다.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내란(서남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불태환 지폐를 남발하기도 했다.

내란이 진압된 뒤 유신 정부는 인플레이션 수습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혹독한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그 때문에 정부 안에서 알력이 생기면서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대장상이 축출됐다. 후임자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와세다대 설립자) 대장상은 위조지폐를 적발한 공로로 정계에 입문한 금융 전문가였다. 그는 일본의 모델이 되었던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고 금융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일본보다 더 큰 폐해를 겪고 있었다.

남북전쟁 직후 어음교환소의 모습. 오전 10시에 모든 은행이 한자리에 모여서 고객한테 받은 어음과 수표를 서로에게 제시하고 확인한 뒤 정산했다. 이런 과정을 차액결제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매일 반복되고 있다. 다만 현재는 정산 뒤 중앙은행에 예치된 지급준비금이 이체된다. [사진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한반도 지배는 화폐제도에서 출발
마쓰카타는 미국에 없는 중앙은행 제도를 배우기 위해서 유럽으로 향했다. 그러나 답을 얻기 어려웠다. 일본의 전통에서는 무사정권(바쿠후)이 료가에를 지배했으나, 유럽에서는 정부가 지배하는 중앙은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프랑스의 레옹 세(Léon Say) 재무장관이 힌트를 주었다. 벨기에를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벨기에의 중앙은행은 정부와 민간 주주들이 절반씩 지분을 갖고 있었으나 정부의 입김이 훨씬 컸다. ‘벨기에 국립은행법’을 들고 귀국한 마쓰카타는 1882년 일본은행을 설립했다. 임원 중 상당수가 관료나 정치인들이었다(관료들이 일본은행 임원으로 임명되는 관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화폐와 금융제도의 정비를 완료한 일본은 그들의 경험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했다. 옛 질서의 해체를 화폐제도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동학혁명을 계기로 친청파(親淸派)가 퇴진하고 친일파가 집권하자 일본은 그들처럼 은본위제도를 채택하도록 권했다(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 이후 조선은 불태환 지폐의 남발로 인한 지독한 인플레이션(백동화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내란(서남전쟁) 이후 일본에서 벌어졌던 현상이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똑같이 반복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통제받지 않는 일본의 오만함은 명성왕후 시해로 이어졌다. 그래서 고종은 국정 운영에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알렉세예프는 화폐 문제에서 일본을 따돌리기 위해서 화폐주권 선언을 권고했다(1901년 ‘화폐조례’). 금본위제도 채택이 골자였다. 그러자 일본은 더욱 거칠게 나왔다. 일본 돈(은화)과의 교환을 조건으로, 불법으로 화폐를 유통시킨 것이다.

일본의 제일은행은 원래 조선 정부의 위탁을 받아 항구 주변에서 관세 업무를 취급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나 여신 업무를 빌미로 1902년부터 은행권을 유통시켰다. 조선 백성들은 이에 분노하여 전국에서 제일은행권 배척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인천항에 군함을 정박시키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적반하장 격으로 손해배상까지 요구했다. 몇 년 전 명성왕후 시해를 떠올린 고종은 무력감 속에서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인정했다. 화폐주권 회복을 위해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중앙은행 설립뿐이었다(1903년 ‘중앙은행조례’).

그러나 이것도 물거품이 되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한일의정서가 강압으로 체결되고 경제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고종의 재정고문이 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 대장성 주세국장은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가쓰라 다로(桂太郎) 총리의 부름을 받았다. 가쓰라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가쓰라-태프트 밀약)받기 위해서 미국과 접촉 중이었다. 그래서 메가타에게 “장차 일본과의 완전한 통합을 위해 일본과 똑같은 화폐를 조선에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화폐제도는 대한제국보다 먼저 일본에 흡수되었다.

은행업에 관한 중국과 일본의 다른 관점
중국인들은 금융기관을 첸좡(錢莊), 즉 “돈(錢)이 모인(莊) 곳”이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은 료가에(兩替), 즉 “돈(兩)을 바꾸는(替) 곳”이라고 불렀다. 중국은 국내금융(여수신)에, 일본은 국제금융(환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것이 중국과 일본의 차이였다.

차이는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짱께’들은 회표(會票)를 발행하고, 조선의 개성 상인들은 어음(於音)을 발행하였다. 중국과 조선에선 개체로서 금융기관과 결제수단은 발달했으나 시스템을 보는 눈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의 은행법을 보자마자 ‘bank’를 ‘은행(집합체)’이라고 번역했다. bank를 집합명사로 번역한 것은 동업자들이 서로 얽혀 망(網)을 이룬 채 어음과 수표를 교환하는 지급결제 업무가 은행업의 핵심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료가에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었다.

그렇다. 동업자 간 네트워크야말로 은행산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네트워크가 없었을 때는 직접 돈을 운반하는 수밖에 없었다(송금=배달=결제). 이제 막 시작된 우리나라의 카카오톡 결제와 중국의 알리페이도 은행 네트워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서비스는 은행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 네트워크에 기생하는 것에 가깝다.

오늘날 은행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중앙은행이 있다. 은행을 상대로 지급준비금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지급결제망이 없다면 정부의 세수와 재정지출도 아주 불편해진다. 그런 점에서 중앙은행의 지급결제망은 국가 경제의 중추신경이다.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연방정부가 홀로 국고금을 관리하다가 1914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설립과 더불어 야만 상태를 벗어났다. 처음에 미국을 모방했던 일본은 그 점에서는 32년 빨랐다.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경제 전체를 엮는 지급결제망의 큰 모습을 먼저 완성한 것이다.

한편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조선은 일본의 판박이가 됐다. 정부에 예속된 중앙은행이 그 예였다. 그런 중앙은행으로 똑똑한 인재들이 몰리는 상황도 비슷했다. 그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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