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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너무 일찍 느낀 삶의 무게, 너무 일찍 맛본 성공·추락…

가수에서 프로듀서 양성 사업가로 변신한 현진영이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김미경 원장 집필실에서 롤러코스터 같았던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처음엔 아닌 줄 알았다. 어느 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느닷없이 날아온 메시지 하나. ‘원장님, 안녕하세요? 저 현진영입니다. 저도 원장님 팬이에요’. 당연히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다. 현진영처럼 자기 고집과 똘끼(?) 가득해 보이는 사람이 내 강의를 듣는 장면은 왠지 상상이 안 됐으니까. 그런데 잊을 만하면 자꾸 말을 시킨다. 혹시나 싶어 들어가 봤더니 ‘진짜’ 현진영(42)이었다. 오 마이 갓.

<9> 현진영의 오뚜기 삶

그가 누군가. 1990년대를 들었다 놨다 한 힙합음악의 대부. 힙합과 랩을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정상까지 끌어올린 ‘전설’이다. 우리 또래들 중 한 번쯤 모자 티 뒤집어쓰고 폴짝폴짝 토끼 춤을 안 춰본 사람이 있을까. 반가운 마음에 일단 만나서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그런데 직접 만난 현진영은 생각보다 더 ‘이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런 말을 툭툭 하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 아버지 덕에 힙합 생활화
“결국 인생은 ‘숨쉬기 위해 사는 것’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도,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에요. 당장 이 순간 숨을 쉬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그걸 알고 나니까 나에게 오는 고통이나 슬픔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겼죠. 그 모든 것은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거쳐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거의 말하는 경지가 ‘도인’ 수준이다. 극심한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숨을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당연한 일이다. 그 위에 수많은 욕망과 소유물을 천 층 만 층 쌓아놓는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숨 쉬는 소중함을 알려면, 그 위에 탑처럼 쌓인 모든 것들이 무너져야 가능하다. 그렇게 보면 현진영처럼 쌓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어떤 이들은 마치 그 일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딱 그렇다. 아버지는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국내 최초로 재즈밴드를 만들어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음악을 전파했던, 뼛속까지 뮤지션이었다. 현진영은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고집과 자존심까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유력 정치인이 잔치에 연주가 아닌 ‘반주’를 요구하자 당시 수천만원을 호가했던 재즈 오르간을 망치로 부숴버린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린 현진영이 자랐던 곳은 외국인들만 살았던 한남동의 유엔 빌리지. 당시의 춤꾼들이 어렵게 구한 해외자료를 보면서 춤을 연구할 때 그는 옆집의 흑인 친구랑 ‘놀면서’ 본토의 비보잉을 배웠다. 이미 10대 시절에 그보다 더 힙합을 이해하고 완벽하게 구현하는 댄서는 없었다.

부잣집 아들에서 끼니 걱정 소년가장으로
이런 재능과 열정에 불을 붙인 것은 ‘절박함’이었다. 현진영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소년가장이었다. 어마어마한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오랜 투병으로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마저 몸져누웠다. 순식간에 전기가 끊기고 쌀이 떨어졌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춤추는 것밖에 없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댄스팀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한강 다리에서 두 번이나 몸을 던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았다.

“동호대교에서 하염없이 울다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면서 몸을 날렸어요. 물속으로 막 내려가는데 발이 땅에 닿는 거예요. 그 순간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헤엄쳐서 나왔죠. 젖은 몸으로 다시 그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구나. 그렇다면 그냥 살자.”

그렇게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힘겹게 숨만 쉬던 아이는 몇 년 후 이수만 회장을 만나 SM엔터테인먼트의 1호 가수가 됐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데뷔를 하고 ‘슬픈 마네킹’이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가 됐다. 당시 너무나 생소한 랩과 힙합, 토끼 춤 같은 힙합댄스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제 최정상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랐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돈과 관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도 사계절이 있다면 그는 봄의 문턱에서 느닷없이 가을을 맞이한 것이다. 치열한 여름을 거치지 못한 가을의 열매는 허깨비와 같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그는 또다시 몸을 던졌다. 이번엔 마약에 손을 댄 것이다. 한 번 구치소에 갔다 와 보니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버티며 미친 듯이 곡만 썼다. 그렇게 6개월 동안 만든 곡이 바로 ‘흐린 기억 속의 그대’였다.

“어느 날 클럽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보는데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힘드니까 엄마가 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오래돼 기억이 안 나서 더 슬펐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그런 엄마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었어요.”

당시 ‘11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운 이 곡의 모티브가 ‘엄마’였다니. 그가 엄마를 대면한 곳은 산소 앞도, 영정 사진 앞도 아닌 나이트클럽이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 없이 성공하고 모욕을 대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으면 현란한 불빛 속에서조차 떠나간 엄마가 그리웠을까.

그리고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인생의 무게가 버거워 다리에서 몸을 던졌던 소년은 이제 ‘숨만 쉬어도’ 행복한 어른이 됐다. 그동안 새로운 앨범도 발표했고, 13년 열애 끝에 예쁜 아내와 결혼도 했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서 수많은 곡들을 만들었고, 재능 있는 후배들을 프로듀서로 키워내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뮤지션으로서의 열정, 혹은 ‘똘끼’는 더더욱 충만해졌다.

후배 키우다 파산했지만 음악 안 접어
아내 속을 징글징글 썩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유의 미성을 중저음으로 바꿔보려고 일부러 살을 130㎏까지 찌운 얘기는 유명하다. 최근에는 막장 인생이라는 주제로 곡을 만들겠다며 탄광촌을 찾아다니고 3주 동안 노숙생활을 하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미친 짓’이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음악은 삶, 그 자체를 담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고, 자신의 인생을 추억하게 하고, ‘나도 저랬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하려면 그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단다. 당연한 일인데 왜 이해를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되레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최근에는 대형 사고까지 쳤다. 후배들을 프로듀서로 키우는 회사를 운영하다 10억원 넘는 돈을 날리고 파산한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뼛속까지 뮤지션인 사람이 사장 역할을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도 그런 자신을 너무 잘 안다. 그럼에도 음악이 좋아 멈출 수가 없었단다.

사람이 자신만의 마이웨이를 가기 위해서 갖는 모든 장점들은 또 다른 면에서는 엄청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 꺾이지 않는 고집은 지금의 현진영을 만들었지만, 그 때문에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독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그를 숨 쉬게 하는 것도 오직 음악 하나밖에 없으므로. 다만 그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다른 길까지 막혀 너무 외로워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천진하게 웃는다.

“지나간 인생의 굴곡들이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다시 제 음악의 영감과 소재로 돌아와 줬어요. 정말 행운이죠. 지금의 어려움도 언젠가 또 다른 제 음악의 재료가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면 정말 숨 쉴 만해진다니까요.(웃음)”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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