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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선악 공존은 인간의 선택 자유 위한 ‘신의 장치’인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인간의 추한 진실을 목격한 독일의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밤’, 1918~1919년께 작품.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아니면 무더운 여름 밤? 좁지만 아늑한 방에서 아빠·엄마·딸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급 받으면 새 옷 사준다고. 일요일엔 다 함께 동물원에 가자고. 딸은 커서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갑자기 세 남자가 방에 들이닥친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넘어 말이다. 냉담하게, 아무 말 없이 남자들은 아빠를 고문하고 엄마를 강간한다. 은행원 옷차림의 남자는 목매달려 발버둥치는 아빠의 손을 비틀고 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빨리 죽기나 하라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모자를 내려쓴 남자. 아무리 버둥거려봐야 소용없다! 남자 왼팔에 잡혀 모든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딸. 아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34> 인간 세상의 선과 악

4개월 새 100만 명 사망한 ‘솜 전투’
독일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 화가 막스 베크만의 ‘밤’이란 작품이다. 왜 가족은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할까? 남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이런 악마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들의 사악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사악함. 베크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00년 전 여름 수백만 명의 프랑스·러시아·영국·독일 청년들은 환호와 웃음 아래 전쟁터로 향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 굳게 믿었다. 길어야 두 달이면 전쟁은 끝날 거라고. 자신은 선하고 남은 악하기에, 정의는 당연히 자신들의 편이라고. 말끔한 은행원 모습의 중산층 서민이던 막스 베크만 역시 군대에 지원해 위생병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베크만이 경험한 전쟁은 모두가 꿈꾸던 ‘선하거나 화려한’ 전쟁이 아니었다. 긴 총검을 앞세운 군인들은 서로 팔짱 낀 상태의 팔랑스(phalanx) 형태를 유지하며 전진한다. 그들은 잊었던 건가? 이미 19세기 말에 분당 500발씩 쏠 수 있는 ‘맥심(Maxim)’ 기관총이 발명됐다는 사실을? 헬멧도 위장도 없이 기관총과 대포를 향해 진격하던 보병들. 1916년 7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된 ‘솜 전투(Battle of Somme)’에서만 무려 10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는다. 맥심 기관총에 맞아 죽어가는 병사들은 위생병 베크만에게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터진 배에서 튀어나온 내장은 병사의 목을 졸랐다. 뒤틀어지는 팔다리를 잡아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위생병 베크만은 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란 피우지 말고 차라리 빨리 죽으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소용없다고….”

식민지! 기관차! 만물박람회! 문명의 절정에 서 있다고 믿었던 유럽의 모든 베크만들은 ‘문명’이란 종이보다 얇은 껍질 아래 감춰졌던 인간의 역겨운 진실을 보게 된다. 튀어나온 내장, 살육, 무의미한 좌절.

참혹한 장면 볼 수 없어 눈 멀게 한 화가
어디 제1차 세계대전뿐이겠는가? 1258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 Khan)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를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이슬람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압바스 왕조(Abbasid)의 수도 바그다드. 100만 명 넘는 시민에 셀 수 없는 모스크, 상점, 궁전들. 그리고 왕실에 있던 ‘지혜의 집(Bayt al-Hikma)’.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가 설립한 ‘지혜의 집’은 당시 지구 최고의 대학이자 연구소였다. 여기엔 이슬람·페르시아·산스크리트 원서들뿐 아니라 서유럽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학·의학서적들이 보관돼 있었다. 종교·민족·나이 차별 없이 모든 학자에게 열려 있던 ‘지혜의 집’. 항복하라는 훌라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바그다드의 운명은 처참했다. 100만 명 가까운 시민이 학살당하고 수백 년 넘은 궁전·모스크들과 함께 ‘지혜의 집’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시체들의 피로 이미 붉어진 티그리스(Tigris) 강물은 강에 던져진 고서 수십만 권의 잉크로 인해 다시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의 책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바그다드의 화가. 모스크 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화가는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벌어지는 지옥 같은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의 친구·스승·제자의 죽음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화가는 신에게 울부짖는다. 제발 저 짐승 같은 훌라구의 병사들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내가 믿는 당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제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이 아니게 해 달라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내 눈으로 내 아내와 아이들의 목이 잘리는 모습만은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화가는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보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장면을 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기도를 한다. 내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지만 멀기는커녕 더 멀리, 더 섬세히, 더 참혹한 장면들을 보고야 마는 화가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텐냐(Andrea Mantegna)의 1490년 작품.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죽은 그리스도’.
우리 우주가 최고의 우주인가
군인들의 채찍, 이마를 찌르는 가시관, 손·발을 뚫는 무시무시한 대못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가 구원됐다고 믿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수난을 통해 얻는 건 무엇인가? 물론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215∼276년)가 주장했듯이 “선과 악은 그냥 빛과 어둠같이 우주의 두 가지 본질적 원소들”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Ctesi phon)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마니는 선과 악의 독립성을 깨닫고 인도에서 힌두교를 공부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로아스터교·힌두교·기독교·유대교를 혼합한 ‘마니교(Manicheanism)’를 만들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선이 악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고, 악이 선을 소멸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이 독립적인 둘 간의 영원한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SF(사이언스 픽션)영화 ‘스타워즈(Star Wars)’에서 자주 들어본 말이기도 하다.

마니의 신은 악을 이길 수 없는 존재지만 신은 당연히 전능하고 전지하고 자비로우셔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원하지 않지만 허락해야 한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거꾸로 악을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 악을 막지도 못하고 악을 원하기까지 한다면 우리가 믿는 신이 아닐 것이다. 악을 원하지도 않고 막을 수도 있기에 우리가 굳게 믿는 신이시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국 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 문제는 17세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를 통해 ‘신정론’이라 불리게 된다. 신정론의 답은 무엇일까? 우선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장난’ 방식을 사용해볼 수 있겠다.

‘악’이란 사실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고. ‘보지 못한다’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의 ‘부족함’이듯 악이란 단순히 ‘선의 부족함’이기에 세상에 독립적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악’이라 불리든, ‘선의 부족함’이라 불리든, ‘하하 호호’라 불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정도 말장난으로 만족할 라이프니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독일의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텔레스’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악을 원하지만 결국 선을 달성하는 힘의 한 부분”이라고. 그렇다면 ‘선’과 ‘악’의 싸움은 어차피 ‘선’의 승리로 끝나게 돼 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인가? 역시 뭔가 찝찝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상상할 수 있는 우주의 개수는 무한이다. 하지만 실질적 우주는 단 하나뿐이다. 신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다. 그렇다면 이 단 하나의 우주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 중 가장 뛰어난 우주일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고로 결론 내린다. 악을 포함한 우리의 우주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 중 가장 최고라고.

우주 급팽창 이론이 가설하는 무한의 다중우주들.
다중우주가 존재의 정체성이라면…
굶주림과 학살, 전쟁과 재난, 끝없는 노동과 죽음. 이런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세상 중 최고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팡글로스 박사’(Pangloss·pan=모든, glotta=혀, 고로 ‘우주 최고의 혀놀림쟁이’)란 철학자로부터 “우리는 이미 상상 가능한 세상 중 최고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놀랄 만한 사실을 들은 주인공의 삶을 그린 『캉디드(Candide)』란 소설을 통해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 십자군 전쟁, 훌라구의 바그다드 학살, 두 번의 세계대전, 난징 대학살,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우리는 라이프니츠에게 물어볼 권리가 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최고’일 이유는 없다. 아니 ‘최고의 우주’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라이프니츠가 상상하던 ‘무한으로 가능한 우주들’이야말로 현대 우주론이 가설하는 ‘다중우주들(Multiverse)’과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139억 년 전 빅뱅 이후 급팽창한 우주는 다중우주들을 만들어냈으며, 양자역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결과는 결국 독립적인 다른 세상이나 우주에서 현실화된다는 가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우주의 왕인 나, 지구 최고의 거지인 나,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나, 죽어가는 누군가의 손을 비틀고 있는 나, 이미 오래전에 죽은 나. 모든 게 가능하기에 그 어느 것도 의미 없는 다중우주가 우리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이라면? 과연 선과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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