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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②의식주] 15. 패션 변천 40년

1960년대 윤복희가 몰고 온 미니의 열풍 <중앙포토>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요새 젊은이들에게 외국의 패션 관련 사이트는 단골가게다. 유행하는 외국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의 패션을 보고 내키면 즉시 사이트를 통해 사버린다. 미국 영화배우 패리스 힐튼 자매의 란제리룩, ‘노숙자 패션’으로 불리는 올슨 자매의 스타일까지 외국과의 시간차 없이 한국에서 바로 유행하고 있다.

어제의 멋쟁이…오늘도 멋쟁이
60년대 초미니 열광 유행은 돌고 돌더라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 한국에서 유행하려면 적어도 2~3년 정도가 걸린다고들 했지만 지금은 하루 이틀이면 서울의 동대문 상가에 바로 진열된다. 한국은 이제 세계적인 유행의 패션쇼장이다.



무릎 위 15cm 단속까지



67년 1월 가수 윤복희가 몰고 왔다는 미니의 열풍-.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릎 아래 15cm 길이의 ‘샤넬라인’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곧 전세계를 강타한 미니스커트 열풍이 이 땅에 본격 상륙하게 된다. 사실 60년대 하면 미니스커트만 떠올리지만 미니가 유행하기 전엔 일종의 작업복 형태인 재건복, 항아리 모양 치마의 투피스, 개량 한복, 맘보 바지 등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미니스커트 열풍은 가위 폭발적이었다. 정장의 경우에도 재킷의 길이는 엉덩이까지 오는 스타일이 유행이었지만 스커트 길이만큼은 날이 갈수록 짧아져 마침내 ‘마이크로 미니’라는 아주 짧은 스커트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결국 ‘무릎 위 15cm’ 이상은 풍기문란으로 단속의 대상이 된다. 경찰들은 대나무 자를 들고 처녀들 다리를 훑어댔고, “경찰이나 해볼까” 하는 농담이 남성들 사이에 유행했다. 결국 디자이너들은 미니스커트 밑단에 살색 옷감을 덧댄 기형 패션을 창조하기도 했다.



66년에는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이 있었다. 당시 군인들이 월남에서 선물용으로 많이 사와서 ‘월남치마’라고 불리게 된, 길이가 긴 스커트가 일반 여성들에게 크게 유행했다.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무조건 입던‘월남치마’는 그 후 시골에서 농사일을 할 때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치마로 애용되었고, 몸뻬바지와 함께 유행했다. 당시 남성들이 즐겨 입던 옷은 ‘재건복’. 5·16 군사정부가 권장하던 옷차림으로 일종의 간편한 작업복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을 넘어서 비틀스 같은 외국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남성들도 그들의 말쑥한 옷차림을 따라하기도 했다.



장발·청바지는 저항의 상징



70년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유행이 거쳐간 시기다. 중간 길이 스커트인 미디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맥시, 바지 아랫부분의 폭이 넓은 판탈롱과 나팔바지, 히피 스타일까지 끊임없이 젊은이들을 멋내게 했다.



음악적으로 70년대는 서구 문화의 유행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포크’의 시대였다. 포크송은 단순한 음악이 아닌,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신세대 청년 문화의 분출구였다. 한국에도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포크 음악이 수입돼 윤형주·한대수·김민기·송창식·양희은 등 통기타 가수를 배출했고, 장발에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 등으로 대표되던 이른바 히피 스타일의 ‘청년문화’를 유행시켰다. 이 같은 스타일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기성세대의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장발은 군사문화 아래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70년대 한국 패션의 대표적 아이템은 역시 ‘진’이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들고 노래한 포크 가수들이나 영화 속 멋진 배우들이 이런 바람을 부추겼다. 또 바지와 니트도 각광을 받았다. 성 역할에 대한 여성의 의식이 바뀌면서 정장도 스커트보다는 팬츠 수트가 유행했고, 바지 중에서도 통이 넓은 판탈롱의 유행은 다리가 길어 보이게 하기 위해 바닥이 목침만한 통굽 구두의 유행을 동반했다. 활동적이며 편안한 니트는 레이어드룩(겹쳐입기)이 유행하면서 필수 소품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남녀의 구별이 모호해진 유니섹스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경향이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나팔바지에 와이셔츠나 티셔츠 차림을 선호했고 머리 모양도 굵은 웨이브의 장발이었다.‘뒷모습만으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런 유니섹스룩 또한 청바지가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여성과 남성의 청바지 모양이 똑 같은 나팔바지였으니까.



핀컬파마는 ‘문제학생’스타일



80년대는 캐주얼의 시대였다. 교복자율화에 따라 10대 청소년들이 패션의 새로운 수요자로 떠올랐고 70년대부터 지속되던 유니섹스룩 또한 계속됐다. 캐주얼 웨어는 박스형의 빅 스타일이 주가 됐고 정장의 경우엔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많았다. 새로운 패션의 담당자들인 청소년들은 전반적으로 Y자형을 강조하는 패션 경향을 반영하듯 어깨에 패드가 들어간 잠바나 재킷에 청바지는‘스노진’이라는 색이 불균등한 것을 입었는데 특히 바지의 아랫단 폭을 줄여 발목에 딱 붙여 입은 일명 ‘디스코’스타일이 유행하게 된다. ‘핀컬파마’에 ‘디스코 청바지’는 교복 자율화 이후 기성세대에 비친 ‘문제학생’의 대표적인 스타일이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는 스포츠웨어의 유행을 불러왔다. 나이키나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 스포츠 웨어 전문 브랜드들도 이 시기에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 청소년들에게 유행을 부추겼다.



50년대 복고풍 다시 유행



9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 스타 아이콘들의 유행 선도가 본격화됐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패션을 들 수 있다. 헐렁한 복장과 벙거지 모자에 마스크까지, 당시로선 생소했던 미국의 힙합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세대를 기존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분류로 규정해 버린 ‘X세대’라는 말도 이때 등장했다.‘오렌지족’이라는 말과 동시에 등장하는데 개성을 중시한 소비지향적인 젊은이들을 지칭했다. 의류에서 화장품, 각종 음료에 이르기까지 이 신세대를 타깃으로 한 수많은 제품과 광고가 쏟아져 나왔다. 90년대 중반부터 ‘파리의 연인’ 커플 김정은, 박신양의 옷차림을 비롯해 여성성을 강조한 헵번 스타일이나 재키 스타일, 비틀스룩 등 복고풍이 유행했다.



‘지구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50년대를 비롯해 60,70년대에 이르는 수많은 스타일이 대중 스타를 등에 업은 채 현대적인 재해석을 거치며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메트로 섹슈얼’. 남성성을 유지하면서도 패션, 머리 모양 등 외모 가꾸는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자신에게 내재돼 있는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즐기는 현대 남성을 뜻하는 신조어다. 이들은 남성미와 함께 여성적 취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며 ‘예쁜’ 얼굴에, 탄탄한 몸, 장신구 및 메이크업 등이 특징이다.‘메트로 섹슈얼’은 이제 남성 패션 시장을 정의하는 하나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최신 흐름은 ‘메트로 섹슈얼’



모든 사회적 트렌드가 패션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 과거처럼 시대를 특정할 수 있는 유행은 사라졌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입맛’이 유행을 이끄는 중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가 합쳐져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패션의 교류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조도연 기자

도움말 =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소장



미니스커트의 진실 윤복희 (가수)

“미니스커트 입고 귀국한 적 없어요”




“당시 미국에서 오려면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고, 1월 엄동설한이었는데 무슨 미니스커트를 입었겠어요. 그냥 바지에 코트 입고 왔어요.”



‘미니스커트의 원조’로 알려진 가수 윤복희는 자신의‘미니스커트 귀국설’을 극구 부인한다.



-기억이 정확한가.

“그때 비행기가 도착한 시간이 새벽 2시였죠.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까지는 공항이 잠겨 있어서 한참을 기다리는데 4시가 지나니 시발택시가 들어오더군요. 그 택시를 타고 조선호텔에 도착한 게 새벽 5시였죠. 그리고 그 새벽엔 기자들도 없었어요.”



-그럼 왜 미니스커트의 원조처럼 됐나.

“남자친구 때문이에요. 왜냐 하면 입국 다음날부터 남자친구랑 데이트를 했는데 그때 제가 만든 미니스커트를 입었어요. 어려서부터 옷을 곧잘 만들어서 입었는데 그때는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미국에서 만든 미니스커트를 입은 거예요. 그 모습을 사람들이 봤겠죠. 그렇지만 가장 큰 계기는 중앙일보가 찍은 사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미니스커트를 입고 중앙일보 앞에서 제일 먼저 사진을 찍었는데 제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나온 앨범에 그 사진이 표지사진으로 실린 거예요. 물론 그 앨범이 히트를 했고 사람들도 그 사진을 많이 기억하게 된 거죠. 그리고 비행기 트랩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 광고를 찍은 적도 있는데, 그게 아마 실제처럼 보여졌나 봐요.”



-사실 요즘엔 대중스타들이 자신을 패션 아이콘으로 포장하려 애쓰는데.

“그렇게 살기가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저야 뭐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요새는 디자이너와 기획사까지 동원해서 의도적으로 띄우려면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해야겠어요?”

조도연기자



기차표·왕자표… 고무신의 추억



진양…. 신발이라고는 고무신 아니면 천으로 만든 학생화, 그리고 수제 구두가 전부였던 1960년대의 신발 톱 브랜드들이다. 당시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엔 소위 ‘5대 고무’가 있었다. 동양고무(기차표)·국제화학(왕자표)·태화고무(말표)·삼화고무(범표)·진양(진양)이 그 주인공. 당시 신발회사의 이름이 대부분 ‘○○고무’였던 것은 고무신이 신발업체의 주력 상품이었기 때문. 이제 이들 상표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겨버린 세대들엔 아련한 추억의 단어로만 남아 있다. 그 기차표는‘르까프’(화승)란 브랜드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생산은 이 땅을 떠난 지 오래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전량 생산해 국내로 들여오거나 제3국으로 수출한다.



그 시절 왕자표만이 ‘프로스펙스’라는 이름으로 이 땅(경남 김해)에 남아 있지만 그나마도 법정관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말표와·범표·진양은 한국 신발산업의 쇠락과 함께 기억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고무신 아니면 학생화를 생산하던 이들 업체는 60년대 후반 국내에 화학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케미화’라는 신발을 내놓기 시작한다. 케미화란 가죽이 아닌 비닐 계통의 화학재료로 만드는 슬리퍼와 비닐 장화, 구두 등을 지칭했던 단어다. 70년대 중반‘레오파드(삼화)’등 천으로 만든 테니스화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골프가 유행하는 요즘처럼 당시에는 테니스가 막 유행한 덕분이다.



83년을 전후로 국내 신발산업은 또 한 차례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중·고교에 교복자율화가 실시되면서 여름이면 흰 색, 겨울이면 검은 색이던 학생화가 사라졌던 때다. 나이키가 처음으로 국내에 시판되고 프로스펙스도 이에 도전장을 던진 시기이기도 하다. 사복을 입게 된 학생들은 구색에 맞게 다양한 운동화를 신었다. 신발산업은 이렇게 성장세를 누리며 90년에 절정기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신발이 밀려오면서 국내 신발산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80년대 부산에는 최대 300여 개의 신발 제조업체가 있었지만 이제는 130개 정도뿐이다.



최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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