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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필요한 건 중국·미국·EU 잇는 ‘FTA 허브’ 전략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과 가오후청 중국 상무부장(왼쪽 셋째)이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종료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와 중국 정부 간 합의 의사록에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왼쪽 둘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이들을 지켜보며 박수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에틸렌은 ‘석유화학 산업의 쌀’로 불리는 핵심 제품이다. 비닐·플라스틱·필름 등을 만든다. 대중국 수출의 효자 상품이기도 하다. 지난해 약 13억 달러를 수출했다. 중국에 수출한 전체 석유화학 제품 중 5.4%를 차지했다. 다른 석유화학 제품과는 달리 중국 수요가 꾸준하게 유지되면서 올 초 국내 업계에 증산 경쟁이 붙기도 했다. 당연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주요 관심 품목 중 하나다. 결과는 10년 후 개방이었다. ‘10년 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중 경협 새 시대] 우리 경제가 가야 할 길

글로벌 시장 조사기관인 IHS가 지난달 ‘중국의 석탄화학’을 주제로 보고서를 냈다. ‘석유가 아닌 석탄에서 에틸렌을 뽑아내는 석탄화학 공장이 중국에서 대거 건설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559억 달러를 투자해 29개 석탄화학 공장을 짓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중국 에틸렌 생산의 약 30%가 석탄에서 나오게 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석탄 에틸렌’은 기존 ‘석유 에틸렌’보다 생산 단가가 20~30% 정도 싸다. 그만큼 중국 에틸렌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설비 확충을 통해 에틸렌 자급률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 중국석유화학협회 통계에 따르면 2005년만 하더라도 40.3%에 그쳤던 에틸렌 자급률은 지난해 말 49%로 높아졌다. 2010년 착공에 들어갔던 공장이 본격 생산에 나설 내년에는 70%대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협회 추산이다. 2020년 이전 에틸렌의 완전 자족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석탄화학 기술로 비용을 줄이고 설비 확장으로 자급률을 높인 뒤 관세 철폐가 이뤄진다. FTA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게 ‘10년 후 개방’이 갖는 뜻이다. 오승렬 한국외대 중국학부 교수는 14일 ‘FTA 긴급 대담’에서 “시간을 고려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은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빠르게 산업구조를 바꾸고 있다”며 “우리 협상팀들이 그 산업 발전 속도를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경쟁력이 있다는 생활가전 분야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밥솥·진공청소기 등은 10년 후에야 면세 혜택을 볼 수 있다. 과일 착즙기는 20년 후다. 협상에 나섰던 당국자들은 “그 기간 동안 중국 시장을 공략할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에 따라잡히기 딱 알맞은 시간’이라고 쓴웃음을 짓는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중 경협 패러다임 다시 짜야
전문가들은 관세를 내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을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경협 패러다임을 다시 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중 경협 구조를 FTA시대에 맞게 새로 구축하라는 지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두 차례 중국 붐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수교(1992년)와 함께 시작됐다. 많은 기업이 싼 임금을 찾아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고, 국내에서는 부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연평균 32.2%의 교역 신장률(92~97년)이 그 성적표다. 두 번째 붐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함께 찾아왔다. 중국이 ‘세계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우리나라는 그 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수출단지 역할을 했다. 중국의 수출이 늘면서 우리도 덩달아 제조업 호황을 누렸다. 한국에서 중간재를 생산해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에서 완성품을 조립해 제3국으로 수출하는 형태다.

그 구도가 지금 한계에 달했다. 박상수 충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22년 한·중 양국은 중간재와 완성품을 놓고 분업하는 관계였다”며 “그러나 기술력이 높아진 중국 기업들이 완성품뿐만 아니라 중간재(부품)까지 생산하면서 그 구조가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고조되고 있는 제조업 위기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문제다. 에틸렌은 그 한 사례일 뿐이다.

미·중·EU와 FTA 고속도로 깐 유일 국가
답은 역시 FTA에서 찾아야 한다. 오승렬 교수는 “어찌 됐든 우리는 미국·유럽·중국 등과 ‘FTA 고속도로’를 깐 유일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라는 점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FTA를 산업 업그레이드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FTA 허브’ 전략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유럽, 그리고 중국을 잇는 브리지(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한국을 선택하고 중국이 미국·유럽으로 가는 관문으로 한국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동아시아 경협을 중국-한국으로 국한해 보지 말고 미국·유럽 등으로 펼쳐 봐야 한다”며 “한국을 중국·미국·유럽연합(EU) 등이 모두 와 활동할 수 있는 ‘고부가 중간재 생산 단지’ ‘첨단 R&D단지’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중·일 3국, 여기에 미국·EU 등으로 이어지는 공급망(Supply Chain)을 면밀히 관찰하면 우리가 파고들 여지는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희망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글로벌 화학업체인 바스프는 지난 5월 유기전자 소재의 글로벌 영업본부를 독일 루트빅스하펜 본사에서 서울로 옮겼다. 한국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차세대 액정표시장치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져 내린 결정이었다. 이웃 중국 시장도 감안했다는 평가다. 지멘스는 에너지 솔루션 아태본부를, GE는 글로벌 조선해양본부를 각각 서울로 옮겼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통신장비 업체로 성장한 화웨이(華爲)가 서울에 연구개발(R&D)센터를 두기로 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지 연구위원은 “단순히 무엇을 생산할 것이냐가 아닌 국제 분업체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며 “더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을 찾을 수 있도록 인력·노무·교육·세제 등의 분야에서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기업 환경을 조성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을 끌어들일 수 있는 첨단 산업단지 건설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새만금 건설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지난 14일 새만금의 투자환경을 둘러보기 위해 한국에 들른 중국 최대 컨설팅 회사 허쥔(和君)그룹의 리쑤(李肅) 총재는 “사람과 물자, 돈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하자는 게 FTA 정신”이라며 “이런 조건이 보장된다면 중국 기업들은 서방으로 향하는 창구로 새만금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원~인천을 잇는 전자·IT 단지, 남해안의 ‘조선(造船)벨트’, 오송~대덕의 바이오·IT 단지, 울산~포항~부산을 잇는 철강·기계 공업단지 등도 유력한 국제 클러스터 후보다. FTA 영토가 넓어진 만큼 글로벌 비즈니스 시각도 넓혀야 한다.

한국, 고부가 서비스 산업으로 전환해야
산업 업그레이드에 실패한다면 FTA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우리 기업이 빨려드는 ‘흡수 패러다임’에 직면할 수도 있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조차 시장과 기업 환경을 따라 자원을 재배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삼성은 시안(西安)에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일부 국내 LCD 공장도 광저우(廣州)·쑤저우(蘇州) 등으로 옮긴 지 오래다. 공장이 이동하면서 고급 일자리도 넘어가고 있다.

오승렬 교수는 “결국 한국은 고부가 창출을 위한 서비스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시간을 다시 우리 편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지적이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wood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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