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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별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말년에 서울 통의동 옛 사옥으로 출근해 주로 그림을 그렸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는 “붓놀림이 크고 색채 구사가 대담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중앙포토]

“기업의 핵심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중시하지 않고는 기업의 어떤 첨단 지식도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노사가 한마음으로 뭉칠 때 무한한 도약을 이룰 수 있습니다.”

 8일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故) 우정(牛汀)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을 때 한 말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게 자신의 소명이며,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담겨 있다. 그는 기업인 최초로 국내 최고 권위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고인은 1922년 4월 경북 영일(포항)에서 고 이원만 창업주(전 국회의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마쳤으나 가난 때문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부친이 일본에 설립한 아사히공예사를 거쳐 광복 후 직물회사인 경북기업을 세운 우리 경제의 1세대다. 코오롱의 모태인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설립(57년)하고 국내 최초로 나일론실을 생산하면서 섬유산업을 개척했다. 나중에 화섬·자동차부품·유통 분야로 회사를 키웠다.

 기업 경영은 마라톤식이었다. 고인은 평소 이상은 높되, 눈은 현실을 바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43년간 코오롱에 근무했던 배영호 전 코오롱인더스트리 대표는 “임원 인사에서 누락됐을 때 ‘믿음만 있으면 승진은 문제될 게 없다. 오히려 절대로 적(敵)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고 회고했다.

 재계에선 노사관계 안정에 주춧돌을 놓은 인물로 꼽힌다. 고인은 70년 설립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서 회장 14년, 부회장 8년을 지냈다. 김영배 경총 상임부회장은 “고인은 80년대 후반 민주화와 파업 격랑을 거치면서 노사불이(勞使不二) 원칙으로 산업평화 선언(94년)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고인 역시 “유럽에선 30~40년, 일본은 15년 걸렸던 격심한 파업이 우리는 6~7년 만에 잦아들었다. 또 걸음마 아이 같던 경총을 돌봐 대학을 졸업시켰다”며 보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치인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기업인이었다. 93년 초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경제단체장 면담 당시 “한국은 중소기업 육성법이 가장 잘된 나라다. 법이 문제가 아니고 공무원이 기업에 출입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소신을 펼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재계 30위권의 대기업을 일궜지만 생활은 소박했다. 코오롱 여자농구단을 갈빗집으로 초청해선 “나는 갈비탕”이라고 주문하거나, 워낙 낡아서 비서가 쓰레기통에 버린 슬리퍼를 찾아오게 하면서 “구구익선(舊舊益善·오래될수록 좋은 것이 있다)”이라고 야단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대한농구협회장 시절 신인 선발제도를 바꾸자 오랫동안 지원해왔던 기대주 박찬숙 선수를 경쟁사에 빼앗길 처지가 됐다. 얼마든지 박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기업도 마찬가지다. 좋은 인재는 독립시켜도 좋겠다 싶을 만큼 성장하면 놓아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고인은 96년 외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고인은 입영 1주일을 남기고 결혼한 고 신덕진 여사(2010년 작고)를 평생 “둥근 꽃”이라고 부르면서 아꼈다. 두 사람은 2004년 결혼 60주년 때 회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서병식 동남갈포 회장 등과 ‘웃으면 젊어진다’는 뜻의 소소회(笑少會)를 만들어 두세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지난 4월엔 자신의 아호를 딴 제8회 우정선행상을 직접 시상했다. 지난달 열린 코오롱한국오픈 골프대회에 앞서 A4용지 5장짜리 행사 보고서를 올리자 꼼꼼하게 읽어보고 특유의 ‘동그라미(○)’ 서명을 한 게 그의 마지막 업무였다.

 한편 9일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엔 김기춘 대통령실 비서실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한승수 전 국무총리,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성기학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허광수 대한골프협회 회장(삼양인터내셔날 회장),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등 정치·경제·언론·체육계 인사들이 찾아와 유족을 위로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전두환·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냈다. 김무성 대표는 “우리 산업 발전에 초석을 놓은 큰 어른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유족으로 이웅열 회장과 딸 경숙·상희·혜숙·은주·경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1호실. 발인은 12일 오전 5시이며 이날 오전 8시 경기도 용인 코오롱인재개발원에서 영결식을 한다. 장지는 경북 김천시 금릉공원묘원. 02-2227-7550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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