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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인생을 편집할 수 있다면

“이걸 편집이라고 했느냐?” ‘미생’의 박 과장(PD)은 방송사에도 서식한다. 밤새 편집한 화면을 슬렁슬렁 넘겨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AD(조연출)를 편집실로 내몬다. 발효가 덜 된 술 냄새가 얼굴 전체로 기습한다. 그는 그렇게 산다. “이래서 AD를 ‘에이 더러워’의 약자라고 하는구나.”

 찍어온 화면을 다시 들여다본다. 꼼꼼히 보니 몇 군데 허점이 잡히긴 한다. “저런 걸 왜 반복해서 찍었지?” 그래도 아깝다. “저거 찍는 데 시간이 얼마나 들었는데….” “촬영감독 눈치 봐가며 사정사정해서 찍은 건데….”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과감해져야 한다. 편집의 고수가 되려면 차마 버리기 아까운 화면과 이별하는 연습이 필수다.

 사우나에서 돌아온 박 PD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핏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화면을 주시한다. 그의 시력에 일말의 기대를 해본다. 과연 그의 입에선 어떤 말이 터져 나올까. “네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역시 독사의 눈이다. 독이 퍼지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좀 더 다듬어볼게요.” 편집실은 AD에게 금강산(이산가족 상봉 장소)이다.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화면과 다시 만난다. 감격의 차이는 있다. 눈물과 선물이 있는 상봉장과 달리 상념과 푸념이 교차한다.

 잠시 일어나 목운동을 하는데 문자가 온다. “뭐 해?” 참 한가한 질문이다. “일하지.” 광속으로 답글이 온다. “일만 하면 바보 돼.” 내가 그걸 모르나? “바보 된 지 오래야.” 옆방에선 음악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 세상을 뜬 가수 신해철 특집을 준비하는 방이다. 슬쩍 넘겨다보니 마침 그의 데뷔곡인 ‘그대에게’의 한 부분이 정지화면으로 잡혀 있다. 가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과연 그럴까. 그렇게 노래했던 가수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는데.

 화장실 가면서 뉴스룸을 건너다보니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어제 11월 9일) 화면이 떠 있다. 기념조형물에 수천 개의 풍선이 달려 있다. ‘아무 근심 없이 풍선 날리던 시절이 나한테도 있었는데.’ 엄마가 자주 부르시던 원로가수 나애심씨의 노래가 오늘은 구슬프게 다가온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정성수 작사, 전오승 작곡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 나의 금강산엔 언제나 꽃이 피려나. 복도 저쪽에서 독사, 아니 박 PD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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