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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내부의 적 잡는 외부의 적 … 권력자에겐 ‘신의 한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운데)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한 ‘브뤼메르 18일’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 ‘생클루 오백인회(五百人會)의 보나파르트’. 파리 교외 지역인 생클루에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는 장면이다.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쇼의 1840년 작품.
지금부터 215년 전인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 전면에 등장한 날이고, 1918년 11월 9일은 프랑스의 맞수 독일 빌헬름 2세가 강제로 퇴위돼 유럽 전제황권이 종식된 날이다. 동아시아 일본에서는 1867년 11월 9일 메이지(明治)가 에도(江戶)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받아 거의 700년 만에 왕정으로 복고했다.

④ 양날의 칼 ‘외부 위협’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이 세 군주의 등장과 쇠퇴에는 공통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그들을 만들었다. 당시 그들의 권력 장악 혹은 퇴진이 요즘 말로 ‘대세’였다는 의미다. 무릇 권력은 세(勢) 규합에서 시작하는데, 세 규합이 걸림돌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권력 장악 이후에는 외부에서 자원을 더 많이 가져와서 배분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세 권력자 모두 집권 후에는 세계 혹은 지역 패권을 추구했다. 장기집권의 기반인 외부와의 지속적인 경쟁, 특히 전쟁은 당시 기본적인 국가 전략이었다. 그들의 팽창정책이 세상을 많이 바꾸었다.

왼쪽부터 메이지, 빌헬름 2세, 나폴레옹 1세.
전쟁 승리하는 동안 브레이크 없는 권력
먼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권력 장악을 살펴보자. 혁명 이후 성립된 프랑스 제1공화정은 반란과 쿠데타로 계속 불안했다. 특히 프랑스혁명과 공화정에 대한 외부의 위협이 드세었다. 1799년 들어선 5인 총재 정부를 이끌던 사람은 에마뉘엘 시에예스(Emmanuel Sieyès)였다.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시에예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바꾸고 싶었다. 그 일에 적합한 군인이 나폴레옹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야심가 나폴레옹을 경계하긴 했지만 황제로 즉위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시에예스와 나폴레옹은 11월 1일 만나 쿠데타를 모의했다.

1799년 11월 9~10일, 당시 혁명력(曆)으론 2월에 해당하는 안개(브뤼메르)달 18~19일, 나폴레옹의 장병들이 원로원과 500인 의회를 포위해 쿠데타가 감행됐다. 나폴레옹은 쿠데타 과정에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나폴레옹이 거사에 성공한 날이라기보다 시에예스의 브뤼메르파가 자코뱅파에 승리한 사건으로 당시엔 여겨졌다. 부르주아 공화국 수립을 원한 브뤼메르파는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을 다시 전장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실권 없는 국가원수직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정치무대에서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대신에 원로원 의원직에다 많은 돈과 영지를 받았다. 결국 브뤼메르파는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나폴레옹 독재를 수용하게 된 셈이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에 즉위한다. 자코뱅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세력이 정부 요직에 중용됐다. 전쟁이 낳은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전쟁이야말로 민심을 잡고 권력을 유지하는 좋은 수단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재위기간 내내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이기는 동안은 프랑스 내의 그 누구도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나폴레옹 정권의 붕괴는 국내 반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뤄졌다.

메이지 시대엔 외부위협으로 내부결속
무쓰히토(睦仁), 즉 메이지의 경우를 살펴보자. 무쓰히토는 부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1867년 1월 15세의 나이로 즉위식도 없이 일왕에 즉위했다. 그 당시의 일본 사회 역시 혼란과 암살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권력자 에도 막부는 전국을 통제하지 못했고, 서남지역 번(藩·지방 제후의 영지)들이 막부에 대항하던 정국이었다. 대외 개방 압력에 존왕양이(尊王攘夷) 구호가 자주 등장했다.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국가 통치권을 일왕에게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일부 번으로부터 제의받고 11월 9일 이를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다음해 막부는 번들의 군사적 위협에 항복하고 스스로 해체했다.

왕정복고의 일등공신인 여러 번도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1869년 영지(領地)와 영민(領民)에 관한 판적을 일왕에게 반환했고, 1871년에는 번을 폐지하고 대신 현을 설치해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도록 했다.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은 번의 주군들을 도쿄에 강제 이주시키고 대신 현령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1867년 대정봉환에 이은 제2의 왕정 쿠데타로 불리기도 한다. 또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사무라이 대신 국민개병제를 도입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메이지 이름으로 시행됐지만 메이지가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번 출신의 메이지 유신 주체들이 따로 있었다. 막부의 권한을 모두 일왕에게 주는 것만으로 국내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뭔가를 줘야 하는데, 일본 내에서는 줄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외 팽창이 조만간 필요했다.

메이지유신 3걸 가운데 1인으로 불렸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지방 무사계급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을 정벌하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내치를 우선시하는 반대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이고는 참의직을 사퇴했다. 1877년 사이고는 세이난(西南) 전쟁을 일으켰고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자결했다. 조선의 대일 태도를 문제 삼아 제기된 정한론에 대해 메이지는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 섰지만 정한론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권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언젠간 외국 진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조선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합 등이 모두 메이지 때의 일이다. 외부와의 전쟁 때마다 메이지는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 준비를 챙겼다. 심각한 전쟁 패배를 겪지 않은 메이지는 죽을 때까지 권좌에 머물렀다.

마키아벨리 “현명한 군주는 적대감 조성”
호전적 대외정책으로 권력을 잃은 사례는 빌헬름 2세다. 그도 부왕이 취임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자 1888년 29세의 나이로 독일제국 황제직에 올랐다. 당시 독일제국의 한 축이었던 재상 비스마르크를 해임시켜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빌헬름 2세는 세를 규합해 새로운 권력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세습받은 것이다. 그래서 빌헬름 2세는 대외관계에서도 세 규합에 목매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와 달리 동맹을 경시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늪에 빠지게 됐다. 패전이 임박해지면서 독일 내부에서 퇴위 권유를 받고 버티다가 결국 1918년 11월 9일 퇴위했다. 네덜란드로 망명해 살다가 1941년에 쓸쓸히 죽었다.

세 가지 사례를 보면 전쟁이 주요 외교 전략이고, 또 외교는 주요 권력 유지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외부와의 경쟁이 권력을 공고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외부 위협이 국내 안정을 가져다주는 측면이다. 그런 의미를 담은 동서고금의 문구는 많다.

『손자병법』 「구지(九地)」편에 나오는 “서로 미워하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서 풍랑을 만나게 되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구한다(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過風 其相救也如左右手)”, 즉 오월동주(吳越同舟)는 그런 옛 문구의 예라 할 수 있다.

현대의 문구로는 ‘국기집결(rally-round-the-flag)’ 현상이 있다. 미국 국민이 대외 위기 시 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다는 뜻이다.

개나 사파리 곰들은 같은 우리에 있는 다른 동물과 서로 앙숙으로 싸우다가도 더 강한 동물을 보게 되면 서로 협력한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여러 실험에서도 어려움 없이 함께 있었던 집단보다 함께 어려움을 겪었던 집단이 서로 잘 협력했다는 것이 입증된 바 있다. 정쟁도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자의든 타의든 완화된다. 시위대 내의 내부 이견으로 지지부진하던 시위 양상이 경찰의 출동이나 진압으로 인해 오히려 일사불란하게 전개됐던 예도 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외부 적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행운(fortuna)은 군주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적을 만들어 주고, 군주는 적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는데 현명한 군주는 일부러 그러한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부 적과의 경쟁에서 이기면 권력 유지가 쉽다.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패전의 책임을 경쟁 정파에 지울 수 있다면 패전 또한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에 지우면서 자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군부는 좌파가 연합국 측의 부추김을 받고 반전주의와 혁명주의로 후방을 교란하면서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바람에 전쟁에서 패했다며 좌파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다.

외부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또 그 책임을 내부 경쟁자에게 돌리지 못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면 외부 위협의 조성은 나쁜 수, 즉 패착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1세와 빌헬름 2세 모두 패전으로 정권을 잃었다. 나폴레옹 1세의 경우 외부 점령자들이 책임을 물었고, 빌헬름 2세는 국내 경쟁자들이 책임을 물었다. 이에 비해 일왕은 1945년 전쟁 패배 후 퇴위되지 않았다. 외부 경쟁자와 내부 경쟁자 모두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긴장관계로 내부를 단속하는 전략은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한국 증시와 선거에서 북한 위협론을 강조하는, 이른바 ‘북풍 효과’가 과거처럼 강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등 서방 강대국과의 대립을 통해 정권을 비교적 오래 유지했던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카다피 모두 권력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죽임을 당했다.

요약건대 외부와의 경쟁 모드는 내부 정서의 측면에서 정권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런 정서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길게 보면 부국강병에 의한 실리가 분배돼야 권력이 유지된다. 결국 외부와의 경쟁에서 얻은 걸로 전 국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배연합만이라도 배부르게 해야 정권이 지속된다는 말이다. 정서든 실리든 외부 경쟁은 내부 정치를 위한 ‘신의 한 수’다. 잘못 쓰면 패착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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