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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로비스트라고? 對韓 원조 끊길까봐 스스로 뛰었을 뿐

김춘식 기자
1970년대 미국 워싱턴과 한국 정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게이트의 주역 박동선(79)씨. 팔순을 앞둔 그는 지금도 2선에서 미국·일본 등 각국의 주요 인사들과 교통하며 ‘민간외교’를 왕성하게 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 주인공 박동선

 그는 조지타운대를 졸업하고 1966년 워싱턴에 사교클럽을 열어 30대 때부터 현지 정계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그는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미국의 대한(對韓) 쌀 수출과 한국의 미 의회 로비를 중개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로비스트’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다. 코리아게이트가 용두사미로 끝난 뒤 그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국제무대에서 비즈니스를 했다. 90년대에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유엔의 ‘석유·식량 교환(Oil for Food)’ 프로그램이 채택되도록 로비를 벌인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온 그는 현재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 당시 한국 전통 차(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한국차인(茶人)연합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오는 1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통 차 문화의 의미와 전망’이라는 토론회에서 ‘현대 차문화운동’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5일 그를 만나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평가와 근황을 들었다.

1977년 8월 24일 서울에서 기자회견 중인 박동선씨.
 -코리아게이트 때 로비스트로 활동했나.
 “남들은 박 아무개 하면 무지막지한 로비스트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나 정부가 어떤 임무를 부여하고 대가를 주어야 로비스트가 되는데 당시 한국 정부가 나보고 돈을 주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지 않았다. 한국은 돈도 없고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 원조를 못 받으면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국의 원조를 계속 얻기 위해 내가 자발적으로 활동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미국 프레이저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하수인이었다고 몰아붙였는데.
 “코리아게이트는 과거 얘기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다시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미국, 특히 언론에서 떠드는 것은 내가 한국 정부의 하수인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로비활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대통령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한국을 위해 한 활동이다.”

 -그럼 코리아게이트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나.
 “미 의회 조사위원회가 나를 희생양으로 몰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이 처음으로 미국에 대들었다. 미 의회가 청문회에서 나를 완전히 길들이려고 했는데, 내가 덤벼드니까 언론도 놀랐다. 워터게이터사건 때 특별검사를 지냈던 재워스키 수석조사관은 나에게 집중적으로 질문공세를 폈다. 내가 ‘당신이 지금 영어하는 게 분명한데 난 잘 못 알아듣겠다. 텍사스 악센트 때문인 것 같다’고 하자 당황하더라. 미국은 내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공격 목표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라 뇌물을 받은 미국 의원들을 강력히 처벌하려 했다. 당시 재미교포들이 코리아게이트로 한국 이미지가 나빠져 큰 피해를 보았다고 전해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나.
 “아직도 그 문제로 미국 출판사들이 책을 내자는 제의를 한다.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면 나 때문에 한국이 골치 아프게 되고 미국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이 이 일로 절대 한국에 대한 원조를 끊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하여튼 내가 워싱턴에 많이 알려져 있어 나를 앞장세워 코리아게이트를 가지고 한국을 공격해 왔지만, 박 대통령은 끝까지 나를 보호해줬다. 앞으로 책을 쓰게 된다면 정확한 걸 밝히고 싶다.”

 -미국 쌀을 한국에 팔아주고 거액의 커미션을 챙긴 쌀 장사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정작 나에게 쌀을 팔아 달라고 먼저 부탁한 것은 미국 의원들이다. 내가 먼저 로비한 적이 없다. 캘리포니아 등 5개 주는 쌀이 항상 200만t이나 남아돌았다. 의원들은 재선을 위해서는 쌀 수출에 힘을 쏟아야 했다. 5개 주 의원들이 뭉쳐 로비단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코리안 코커스’였다. 이 단체 관련 하원의원이 전체의 약 20%인 86명이나 됐다. 상원의원 10명도 있었다. 이들은 나에게 쌀 10만t만 사주면 코커스 전체가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했다. 당시 한국 원조라고 해봐야 120억 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이 실제로 한국을 도와줄 수 있었다.”

 -미국으로 가게 된 경위는.
 “서울에서 꽤 큰 사업을 하시던 부친(박미수·작고)의 권유로 16세 때인 52년 유학을 갔다. 시애틀의 에디슨하이스쿨을 다녔다. 그때만 해도 평범했다.”

 -조지타운대서 학생회장을 지냈는데.
 “나중에 동창생들한테 물어봤다. 내가 동양 출신은 틀림없는데 의외로 자신만만하게 보여 회장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30대부터 워싱턴 사교계를 움직였다.
 “조지타운대 졸업 후 31세 때인 66년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린든 존슨 대통령의 딸이 피로연을 열어 유명해졌다. 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선보인 곳도 조지타운클럽이었다. 의원들 후원회도 자주 열렸다. 젊을 때부터 기 죽지 않고 미국의 정치인들과 사귈 수 있게 된 것은 사업을 하셨던 부친 덕분이었다. 부친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어줬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깊다.
 “처음 만난 것은 61년 방미 때였다. 알고 지내던 코코런 상원의원이 박 대통령을 만나러 워싱턴 블레어하우스 영빈관을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따라 갔다. 그때는 인사만 드렸다. 65년 방미 때는 정일권 총리 소개로 대통령을 만나 원조를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는지를 조언했던 걸로 기억한다.”

 -박 대통령과 친척 사이라고 하고 다녔다는데.
 “내가 아는 미국인들은 박 대통령과 성이 같아 친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건방진 말일지 모르지만 워싱턴 사교계에선 박 대통령보다 내가 좀 더 유명했다. 굳이 그렇게 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박 대통령도 날 잘 아니까 남들이 와서 이러쿵저러쿵 해도 들은 척 만 척한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자꾸 이야기하면 ‘알지 못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하더라.”

 -국가 간 외교이건 민간외교이건 인맥이 중요하다.
 “그렇다. 살아 있는 정보가 중요하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을 받은 외환위기 때나 최근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반환과 연기 협상 등 국가적 중대사에 공식 채널 못지않게 민간 차원의 스킨십 있는 외교라인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나.
 “우리같이 민간외교하는 사람은 인맥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원래 비즈니스를 했기 때문에 네트워크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제는 복잡한 일 아니면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다. 내가 만든 네트워크는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우리나라에 와 있는 대사 100여 명은 거의 다 최고 클래스의 외교관이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주요 대사들과 많이 접촉한다. 지한파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의 찰스 랭글 의원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전화한다. 우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다. 누가 알아주든 모르든 상관없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알아서 하는 편이다.”

 -한국 외교에 조언한다면.
 “한국에는 우수한 관리가 많다. 그들이 외교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민간외교가 필요할 때가 많다. 협상의 특성상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성사시키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줘야 할 때도 있다. 이럴 때 민간외교가 필요하다.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부랴부랴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고 기획을 한다든지 하는 면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전통 차에 조예가 깊다고 하는데.
 “어릴 때부터 우리 그림이나 도자기를 좋아했다. 코리아게이트가 한창일 때인 77년께 도범 스님의 권유로 차에 입문하게 됐다. 지금도 차를 즐겨 마신다. 외국 손님들을 불러 차를 대접하면 좋아한다. 차를 마시면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다. 한국에는 이런 문화도 있구나 하며 인식이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워싱턴에 있을 때 남미의 정치지도자 자제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자국에서 많이 생산되는 커피 대신 차를 많이 마셨던 걸로 기억한다. 청와대나 정부·정치권에서도 한국적인 것을 많이 활용해줬으면 좋겠다.”



1976년 10월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 정부가 박동선씨를 내세워 70년대에 연간 50만~100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진 사건. 코리아게이트(Koreagate)라고도 한다. WP가 “미 중앙정보국(CIA)이 청와대를 도청해 코리아게이트의 단서를 잡았다”고 추가 보도하자,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77년 2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박씨가 주한미군 철수와 대한(對韓) 원조 중단 등 한·미 현안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돈을 뿌린 것으로 보고 관련자들을 청문회에 불러 집중 추궁했다. 잠적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미국에 망명한 워싱턴 중앙정보부 직원 김상근씨도 청문회에 출석했다. 이들은 박정희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재미사업가 김한조씨의 로비의혹을 추가로 폭로해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 의회의 송환 요구에 불응하던 박씨는 면책특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하기로 했다. 박씨는 78년 2월 상·하원 윤리위원회 비공개 청문회와 4월 의회 공개청문회에서 미 의원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인정했다. 박씨는 기소는 됐지만 처벌은 받지 않았다. 요란했던 코리아게이트는 3명의 미 민주당 의원만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한국관계 종합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조사활동을 마감했다.



한경환 기자 helmu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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