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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처절히 깨진 명인의 꿈 … 인세키 “바둑은 운의 기예” 탄식

19세기의 나가사키 데지마 항구. 가운데 보이는 반원(半圓) 부분이 데지마로 크기는 축구장 2개 정도에 불과했다. 서양의 문물은 저 섬을 통해서만 일본으로 들어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흔들리는 운명에 능력은 없지 않고 자부심도 강한 인물. 그런 인간은 격정의 시간을 보낸 다음엔 무엇을 할까.

<14> 이노우에 가문의 승부사

1835년 제자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1810~35)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토혈국(吐血局)이 지나갔다. 그 4년 후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1798~1859)는 다시 한번 명인에 도전했다. 1838년 혼인보(本因坊) 조와(丈和·1787~1847)가 명인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공석이 된 명인 자리를 두고 관(官)과 바둑계가 논의를 거듭했다. 당국은 장로 격인 인세키를 명인으로 올리고자 했으나 혼인보 가문에서 반대했다. 혼인보 가문엔 후계자 슈와(秀和·1820~73)가 있었다. 슈와는 근대 바둑의 선구자로 당시 20세. 분 바른 듯한 얼굴에 여린 몸매였다. 하지만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1840년 인세키와 슈와의 쟁기(爭碁) 허가가 떨어졌다.

11월 29일~12월 13일 열닷새에 걸쳐 대국이 이뤄졌다. 12월 2일 인세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위 사람들은 토혈국의 악몽이 생각나 몸을 떨었다. 휴양을 취한 다음 9일에 다시 두었지만 10일에 이르러 또 피를 토했다. 12일은 밤을 새웠고 13일 오전 10시 마침내 끝을 봤다. 슈와의 4집 승리였다. 죽자 살자 내용이 험했다. 본래 스무 판(20番棋)을 두기로 했으나 지친 인세키는 한 판으로 의욕을 잃고 명인 출원(出願)을 취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산을 유람하던 인세키에게 다시금 투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쟁기는 신청할 수 없었기에 계속해 기회를 엿봤다. 1842년 5월 16일 어느 애호가의 저택에서 기회(碁會)가 개최되고 인세키와 슈와의 대국이 주선됐다. 사교적인 자리지만 승부의 결과는 다시 한번 바둑계를 뒤흔들 수 있었다. 16~18일 사흘에 걸친 대국에서 인세키는 슈와를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은 8단. 슈와는 7단. 백을 잡고 7단을 이길 수 없다면 명인이 되겠다고 청원하기란 어렵다.

물론 속담은 삼세번이다. 1842년 연례행사인 어성기(御城碁·장군 앞에서 두는 최고의 공식 대국) 계절이 왔다. 인세키는 관을 움직여 특별대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11월 17~19일 또다시 슈와가 승리하면서 꿈은 깨지고 야망도 끝났다.

“바둑은 운(運)의 기예(技藝)로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일찍이 재주를 인정받아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삶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10여 년 절치부심도 허사 … 전국 유랑길에
“… 무릇 비상한 인물이 있어야 비상한 일을 이루고 그런 뒤에야 비상한 공을 세우는 것이니 비상하다는 것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모방할 바가 아니다.”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가 백마(白馬)전투를 벌이기 전 원소의 기실(記室·문서담당관) 진림(陳琳)이 쓴 격문의 일부다. ‘삼국지’의 주제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면 그것은 곧 ‘정의란 무엇인가’와 통용되고, ‘인간의 자유 의지’ 질문과도 교차된다. 온갖 인물들이 삼국지에 출몰하는 이유다.

인세키는 용모부터 특이했다. “곰보. 그 딱지 하나하나가 유난히도 검다. 눈썹은 짙고 굵으며 양미간이 잇댈 정도로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정열이 넘치는 태도.”

10여 년의 절치부심이 실패하자 인세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났다. 전국 각지에는 제자들이 많아 심심치 않게 다닐 수 있었다. 1846년 여름 그는 오사카(大阪)에 들어섰다.

그에게 애기가들이 찾아왔다. 혼인보 가문의 슈사쿠(秀策·1829~62)가 마침 함께 있으니 지도를 요청했다. 혼인보라면 치를 떨 인세키도 흔쾌히 승락했고, 슈사쿠는 조심스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당시 기사들은 전국으로 유력(遊歷)을 떠나곤 했다.

7월 20일~8월 29일 인세키는 슈사쿠와 모두 다섯 판을 두었다. 슈사쿠는 4단이기에 치수는 두 점이었다. 하지만 첫날 인세키는 실력을 인정해 곧 대국을 멈추고, 다음날 슈사쿠가 흑으로 두게 했다. 7월 21~25일 두 사람은 대국장을 세 번 옮기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바둑을 완성했다. ‘이적(耳赤)의 바둑’이었다.

기보 흑2가 이적(耳赤)의 묘수.
첫날엔 슈사쿠가 초반 정석에서 실수를 해 인세키가 크게 우세했다. 이튿날 대국장에 의사가 있었다. 그는 바둑을 몰랐지만 방을 빠져나와선 말했다. “인세키 선생이 질 거 같다.” 까닭은 이랬다. “귀가 빨개지는 것은 당황했을 때다. 흑2<기보>가 반상에 놓인 순간 선생의 귀가 붉어졌다.”

흑2가 ‘이적(耳赤)의 수(手)’라고 불린 묘착. 상변을 넓히고 우변 백 세력을 삭감하며 하변 흑 넉 점을 지원했다. 백1은 흑2 근처에 두어야 했다.

고운 품성에 깊은 효자였던 슈사쿠는 어성기 19연승의 주인공으로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다. 일찍 떠난 천재는 이름이 남는다. 그는 뒷날 기성(棋聖)으로 불렸고 바둑은 영원히 남았다. 때는 200여 년의 평화가 가져온 태평천하로 풍류가 넘쳐 몰락을 내다보는 절정기였다.

반상은 알려준다. 슈사쿠와 둘 때는 인세키도 마음이 편했다. 슈와와 대적할 때의 투지와 기백, 의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반상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앞길은 여전히 멀었다. 은원과 가문의 중흥이 인세키를 마주했다. 제자 인테쓰가 세상을 떠난 후 이노우에 가문은 인재가 귀했다. 고민을 거듭한 그는 1845년 숙적 조와의 장남 도야 우메타로(戶谷梅太郞·1820~56)를 이노우에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조와도 찬성했다.

혼인보 가문은 실력자가 가주(家主)를 계승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조와의 맏아들은 재주는 슈와 못잖았지만 6단을 앞두고 안질(眼疾)에 걸려 그만 슈와에게 뒤처졌었다. 조와는 아들에게 길이 열리는 것을 반겼다. 도야 우메타로는 이노우에 가문으로 들어가 이름을 이노우에 슈테쓰(井上秀徹)로 바꾸었다. 절묘했다. 인세키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벌어진 갖가지 파란을 한꺼번에 다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첩과 도망친 제자 찾아가 대국
그러나 1850년 슈테쓰가 정신이상으로 사건을 일으켜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제자가 인세키의 첩을 데리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네 가문 중에서 야스이(安井)와 하야시(林) 가문은 혈통에 따른 계승을 원칙으로 했지만 혼인보와 이노우에 가문은 사문(沙門) 출신이었다. 대처(帶妻)가 금지됐다. 그래도 첩(妾)을 두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는 제자가 에도(江戶) 시내 빈민촌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 오는 날 밤 인세키는 하인의 어깨에 바둑판을 지우고 집을 찾아가 몸 둘 바 모르는 제자에게 무덤덤히 말을 했다. “바둑도 못 두고 있다기에 판 하나 가져왔네. 바둑꾼이라면 그래도 연구는 해야 하지 않겠나.” 허락이었다. 숨어 지낼 때 제자도 바둑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소문이 날 테니 말이다.

“바둑꾼이 된 것부터 나는 불행”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 또 있었다. 1844년 5월 에도(江戶)성에 화재가 일어나 성곽이 거의 다 타버리고 인명 피해도 컸다. 막부(幕府)는 성의 수축(修築) 비용을 제후(諸侯)에게 부과했으며, 제후는 그 부담을 백성에게 돌렸다. 의분을 느낀 인세키가 당국에 상신했다.

“단순한 실화(失火)임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가냘픈 어깨를 핍박한다는 것은….”

옳은 상신이라도 극형을 당하기 일쑤인 봉건체제 속에서 신분에 넘치는 상신이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 들어앉아 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등성(登城)하여 장군을 배알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제후들은 다투어 교제를 청했고 그는 국사(國士)로서의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848년 인세키는 은퇴를 하고 병학자(兵學者)를 자처하면서 호를 겐난(幻庵)이라 했다. 그는 가끔 “바둑꾼이 된 것부터 나는 불행하다”고 했다.

풍랑으로 물거품 된 마지막 도전
1852년 54세의 인세키는 중국에 가서 웅지를 펼쳐보겠노라는 뜻을 품고 나가사키(長崎)로 내려갔다. 데지마(出島·그림·1636년 축조된 인공 섬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던 일본에서 200여 년간 유일의 해외 무역창구 역할을 했다.) 주변에서 이리저리 길을 모색해보았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크게 어지러웠지만 그는 그것도 모른 채 밀항을 시도했다. 고맙게도 풍랑이 크게 일어나 배는 남쪽 가고시마(鹿兒島)로 떠내려갔고 그는 변소에 갔다가 그만 돈주머니를 바다에 떨어뜨렸다. 180냥의 금화였다. 비싼 똥을 누었다.

그는 에도로 돌아갈 여비도 없어 가고시마에서 단위 면장(免狀)을 남발했다. 뒷날 가고시마의 애기가들은 그가 발행한 면장을 두고 ‘인세키 초단(因碩初段)’이라 불렀다.

1859년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엔 병란(兵亂) 없던 태평천하도 끝이 났다.

막부가 무너지고, 1924년 일본기원이 설립되어 다시금 바둑이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되기까지 일본 바둑계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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