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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풍운아·괴짜들 구름 행렬 … ‘황푸군관’은 양산박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 오른쪽은 랴오중카이가 사망한 이후 군관학교 당 대표를 계승한 왕징웨이(汪精衛). [사진 김명호]
1924년 봄,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황푸군관학교 학생모집 공고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광저우에서 15㎞ 떨어진, 초목이 무성한 작은 섬이 중국 혁명을 완수할 열혈 청년들을 기다린다.”

당시 청년들은 ‘신청년’을 좋아했다. 발간되기가 무섭게 푼돈을 들고 서점에 달려가야 직성이 풀리는 청년들이 전국에 널려 있었다.

소련과 함께 군관학교 설립을 주도한 쑨원(孫文·손문)도 각 지역의 대표들에게 “우수한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근거지가 남방이었던 국민당은 북방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미비하긴 했지만 공산당은 북방과 남방에 조직이 산재해 있었다. 국민당에 뒤질세라 전국의 당원들에게 통지문을 보냈다. “건강하고 건전한 청년들을 선발해서 황푸로 보내라.”

중국에 공산주의를 처음 소개한 리다자오(李大釗·이대조)는 베이징에서 학생들에게 황푸행을 권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털보라고 놀리던 중공 창당 발기인 허수헝(何叔衡·하숙형)은 창사(長沙)에서, 청나라 말기 진사 출신 동비우(董必武·동필무)는 우한(武漢)에서 학생들을 선발해 광저우로 보냈다.

후난(湖南) 청년 마오쩌둥도 상하이에서 쓸 만한 학생들에게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대(大)서예가인 전 정국군(靖國軍) 사령관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은 지원자들이 광저우로 떠날 때 글씨를 한 폭씩 써 주며 앞날을 격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상에서 입소문이 가장 빠른 나라가 중국이다. 국·공 양당이 합세해 군관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황푸로 가자(到黃埔去)”는 구호가 전국에 요란했다. 북방군벌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가 “황푸군교 응시생은 발각 즉시 총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난세의 청년들이다 보니 열정이 어마어마했다. 자신과 조국의 미래, 심지어 민족의 미래가 양 어깨에 있다고 자부했다. “신해혁명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군벌들이 중국을 암흑세계로 몰아넣었다. 이들을 타도하지 않는 한 혁명은 요원하다”며 군벌들에게 모든 탓을 돌렸다. 혁명의 성공이 새로운 군벌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장차 대륙에 풍운을 몰고 올 괴짜들이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산시(山西)성 미즈(米脂)에서 중학을 갓 졸업한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은 ‘신청년’에 난 군관학교 설립 소식에 흥분했다. 아버지는 집안에 하나뿐인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 수 없다며 창고에 가둬버렸다. 평소 두위밍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던 젊은 과부가 사다리를 들고 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훗날 국민혁명군 최초의 육군상장(上將·우리의 대장에 해당)은 다른 사람 몫이었다.

1985년 6월 11일 베이징에서 열린 황푸군관학교 동창회에서 초대 회장에 선출된 쉬샹첸(徐向前·오른쪽) 전 국방부장. 왼쪽은 당시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양상쿤(楊尙昆). 3년 후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허시(河西)촌의 소학교 교사 쉬샹첸(徐象謙·서상겸)은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복통에 시달렸다. 밖에 있는 시간보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책이라도 보지 않으면 악취를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엉덩이와 씨름하며 ‘신청년’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군관학교 학생모집 기사를 읽었다. 몇 달 전 수업시간에 신해혁명과 파리 강화회의를 소개했다는 이유로 교장의 사퇴 압력이 심할 때였다. 쉬샹첸은 교장에게 사직원 대신 똥물을 끼얹고 교단을 떠났다. 양자강을 건너는 배 안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조리던 중 “이제부터 무조건 미래를 향해 전진하겠다”며 샹첸(向前·향전)으로 개명했다. 상하이에 도착해 마오쩌둥 앞에서 예비시험을 치르고 본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광저우로 향했다.

예쁜 유부녀에게 ‘방앗간 뒤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베이(湖北) 소년 린뱌오(林彪·임표)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군인이나 되겠다”며 형들과 함께 광저우행 열차를 탔다. 허난(河南)성 상취우(上丘)에 있는 허난대학 신입생 허우징루(侯鏡如·후경여)도 사연이 만만치 않았다. 미모의 국어교사가 군관학교에 응시하라고 꼬드기는 바람에 대학생활을 포기했다.

철도 파업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장인타오(張隱韜·장은도)와 일본 유학생 셴쌰푸(宣俠父·선협부), 몽골의 부잣집 아들 룽야오센(榮耀先·영요선)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남방의 작은 섬을 찾았다.

윈난(雲南) 군관학교를 마친 평안도 출신 최용건과 월남 청년 훙수이도 호찌민의 소개장을 들고 광저우에 첫발을 디뎠다.

쑨원과 줄다리기 끝에 군관학교 교장 자리를 꿰찬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자신을 환골탈태(換骨奪胎)시켰다. 일기에 금주(禁酒), 금연(禁煙), 금색(禁色)을 다짐했다. 금색은 실패했지만, 술과 담배는 죽는 날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교장 취임 8개월간 46차에 걸쳐 학생과 교관들을 모아놓고 ‘군인의 의무와 책임, 혁명군의 신앙, 군인이 총을 소지하는 이유, 기율과 복종, 군인의 단체생활’ 등을 직접 강의했다. 중공 원수 쉬샹첸의 회고에 의하면 종이 한 장 안 보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교장의 강의에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고 한다.

황푸의 학생군은 전투에도 참여했다. 첫 번째 대상은 중국의 조지 워싱턴을 꿈꾸던 광저우 상인협회 회장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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