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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9) 한남동 가정식 밥집 ‘빠르크’ 허정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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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말이 있다. 아니, 있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 뒤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 말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속담도 있다. 아니, 있었다. 여자 인생은 결국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믿음(혹은 체험)에서 나온 속담 말이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어처구니없는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봐도 여자는 이렇게 자기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 아버지나 남편, 심지어 아들에 기대는 수동적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전쟁통의 혼란기는 물론 다들 배고팠던 시절 집안을 건사했던 건 어머니이거나 아내거나, 아니면 딸이었다. 한남동의 트렌디한 가정식 밥집 ‘빠르크’의 맛을 책임지는 허정희(62)씨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식모살이를 했고, 넉넉한 생활비를 못 버는 남편 대신 집안 건사하느라 하숙집 아줌마 되기를 마다하지않았으며, 식당 해보고 싶다는 큰아들 등쌀에 결국 한식당 주방까지 맡고 있으니 말이다. 매 순간 자기 삶의 주인공이었던 허씨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엄했던 허정희씨의 아버지 허명규씨(1999년 작고)와 가족들. 앞줄은 정희씨 큰아들 모과씨
와 작은아들, 뒷줄은 아버지와 정희씨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왼쪽부터).
사업가인 허씨의 아버지(허명규·1913~1999)는 정말 깐깐했다. 슬하의 여섯 자녀에게뿐만이 아니라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순천의 허씨 집성촌이었던 매곡동 마을 사람을 다 깨우고 다닐 만큼 엄격하기도 했다. 그러니 자기 자식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런 아버지를 잘 알기에 아이들은 뭔가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면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허씨가 덜컥 사고를 쳤다. 아버지가 심부름하라고 준 돈 1000원을 친구들이랑 노느라 다 써버린 거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어요. 별 반찬이 없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단무지를 담가 먹었죠. 학교 가는 길에 아버지가 단무지 담글 노란 물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어요. 그런데 뭐에 씌었는지 그 돈을 다 쓴 거예요. 놀 땐 신났는데 막상 집에 가려니 덜컥 겁이 났죠.”

버스 차비가 15원, 자장면 한 그릇에 50원 하던 시절이다. 어마어마한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도저히 집에 갈 엄두를 못 내고 일단 친구집에 갔다. 거기서 하룻밤 자며 친구를 꼬드겼다. 서울 가서 돈 벌자고 말이다. 그리곤 나중에 갚겠다며 친구 언니에게 돈을 빌려 다음날 친구와 둘이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아는 사람이라곤 서울서 직장 다니던 오빠뿐이었다.


가출해 남의 집 식모살이할 즈음의 허정희(오른쪽)씨.
열다섯 소녀, 식모살이의 추억

물어물어 서울역 근처에 있다는 오빠 하숙집에 찾아갔다. 하지만 오빠가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차비 줄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맞아 죽는다”며 버텼다. 고집을 꺾지 못한 아주머니는 결국 식모 자리를 알아봐 줬다. 열다섯 소녀는 그렇게 1967년 다른 많은 소녀가 그랬듯 식모가 됐다.

60년대는 근대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며 많은 젊은이가 서울로 몰려들던 때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골에서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아직 어린 딸을 일부러 서울로 보내기도 했다. 아무 기술도 없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숱한 소녀들은 공장 여공이 되거나 버스안내원을 하고, 아니면 식모살이를 했다. 월급이 많지 않았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식모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참, 이젠 사라지다시피한 식모란 단어는 갓난아이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는 만능 살림꾼을 말한다. 요즘의 입주 가사 도우미와 비슷하지만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그때 친구는 보광동 철물점으로 식모 살러 갔고 난 남대문 근처에 있는 남창동의 한 부잣집에 갔어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모나미 볼펜 만드는 사장(이용섭) 부모님 댁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해보는 남의 집살이였지만 힘들기는커녕 좋기만 했다. 당시 사람 대접 못 받으며 식모살이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허씨는 그 집 딸을 언니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낼 정도로 잘 지냈다. 그 언니는 뜨개질 솜씨가 워낙 좋아 백화점에 스웨터를 납품할 정도였는데, 그 언니 심부름이 주된 업무였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났을 때 언니가 갑자기 병이 나 한 팔을 못 쓰게 됐다. 그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진 거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혼날까 봐 잔뜩 겁을 먹었는데 아버지가 그새 많이 부드러워졌더라고요. 그렇게 엄한 아버지에게도 어린 딸의 가출이 충격이었나 봐요. 집으로 돌아갔지만 학교는 다시 못 갔어요. 가출했다는 소문이 이미 다 났는데, 자존심에 못 다니겠더라고요.”

 

스물하나 처녀, 미제 파는 보따리 장사가 되다

그렇게 6년을 집에서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지내다 21살 때인 73년 다시 서울로 향했다.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제안이 솔깃했기 때문이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미군부대 PX(매점)에서 일하는데 거기 화장품을 떼어다 줄 테니 보따리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미제라면 다들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었어요. 게다가 지방에는 미제 파는 가게가 없어 보따리 장사 인기가 좋았거든요. 지금도 생각나요. 이태원의 한 다방에 앉아서 물건을 받았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 순 사기꾼이었어요. 가짜를 가져온거죠. 그 자리에서 돈을 다 환불 받았어요.”

일단 시작한 만큼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물어물어 다른 거래상을 찾았고 결국 정품을 공급해주는 곳을 뚫어 장사를 시작했다. 큰 여행 가방에 화장품과 커피, 양주를 팔았다. 한 달에 20만~30만원은 벌었다. 당시 한 달 하숙비가 2만원이었으니 꽤 큰 돈이다. 그렇게 서울과 순천을 오가며 5년을 일했다.

“이게 돈은 됐지만 불법이라 경찰한테 검문을 많이 당했어요. 경찰은 큰 짐 갖고 있는 사람만 보면 따라가서 검사도 하고 그랬죠. 운이 좋아 한번도 안 걸렸는데 5년째 되던 해에 딱 걸린 거죠. 그래서 그만뒀어요.”

 

하숙집 하던 20대 후반 노처녀 시절. 대학생들 엄마 노릇 하는 틈틈이 멋 부리고 여행을 즐겼다.
스물여섯 노처녀, 대학생들의 하숙집 엄마로

여자 나이 스물여섯. 지금은 오히려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다 걱정하는 심한 노처녀 축에 속했다. 노처녀가 하는 일도 없으니 아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딸 입에서는 “결혼할 생각은 없고 혼자 서울에 살겠다”는 선언까지 나오니 말이다.

“주변에 결혼한 언니나 친구를 보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늘 식구가 먼저고 자기자신은 없었죠. 그게 굉장히 초라하고 고생스러워 보였어요.”

장사할 때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만큼 쓰기도 많이 썼다. ‘내가 번 돈 내가 쓴다’며 명동에서 살롱 신발 신고 집에 갈 땐 그 비싼 초콜릿도 선물로 사갔다. 그러니 돈이 모일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노처녀가 돈까지 없으면 안된다며 “집 하나 사줄 테니 먹고 살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때 문득 서울대가 떠올랐다. 최고의 대학이니 근처에서 하숙 하면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렇게 78년 신림동에 방 7개짜리 이층집을 샀다. 하숙비 2만원씩 받으며 방 6개를 하숙을 줬다. 어릴 때부터 손맛 좋은 할머니 솜씨를 보고 자란 덕에 음식도 곧잘 했다.

“당시엔 하숙집에서 도시락도 싸줬는데 우리 집엔 법대생이 많아 늘 도시락을 두세 개씩 싸줬어요. 옷은 물론이고 운동화까지 다 빨아줬고요. 사실 그 대학생들이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났는데, 그래도 엄마 같은 존재였죠.”

 

스물여덟 아내, 가족 생계를 책임지다

시간 나면 책 읽고 맛있는 음식점 찾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다 79년 7남매의 장남이던 33살 노총각과 중매로 만나 28살에 결혼을 했다. 혼자 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키 177㎝의 체격 크고 남자답던 남편에게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자기 부모에게 잘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게다가 꽤 사는 집처럼 보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시아버지는 중절모 쓰고 백구두 신으며 멋부리던 한량이었다. 알고보니 시어머니가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다. 전셋집 정도는 해줄 거라 믿었는데 신접살림으로 월셋집밖에 못 해줄 형편이었던 거다. 결혼 당시 국회의원 홍성우 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던 남편은 결혼 뒤 수원에 헌책방을 차렸다.

“사실 그때 돈 벌 기회가 있었어요. 85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이 개점하기 직전에 그 근처 서점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백화점이 생기면 서점엔 별로 안 좋을 것 같다며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거기만 들어갔어도 강남 특수를 누렸을 텐데 말이죠.”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결혼할 즈음 잠시 쉬었던 하숙을 다시 쳤다. 아들 둘이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살며 다른 방엔 하숙생을 들였다. 이때 허씨 모자(母子) 얘기는 조성기 작가가 90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우리 시대의 하숙생』이란 단편 소설에 등장한다.

“데모 하다 잡혀 가서 고초를 치른 서울대 철학과 학생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이던 우리 아들 데리고 맨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당시 우리 동네에 살던 조성기 작가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 얘기를 소설로 쓴 거예요.”

 

마흔여섯 계주, 돈 날리고 원룸 주인 되다

90년대까지도 계는 서민의 목돈 마련 수단으로 웬만한 금융회사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활달한 데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 덕분에 허씨는 늘 계모임을 주도했다.

“어릴 때부터 사업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켰어요. 그래서 신용이 확실했죠. 90년 즈음부터 계모임을 했는데 500만원짜리부터 시작해 나중엔 5000만원 짜리 계도 했죠. 한때 ‘허정희가 은행보다 더 확실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98년 외환위기 때 계모임 4개를 하고 있었는데 앞 순번이 돈 타서 도망가는 바람에 무려 3억원이나 손해를 봤다. 계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있는 돈은 물론 은행 대출까지 받아 겨우겨우 돈을 메꿨다.

“그때 완전히 망했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요. 아는 분이 땅 판 돈을 선뜻 빌려줬어요. 평소 내 모습을 보고 믿어준 거죠. 그 돈으로 원룸을 지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죠.”

2000년대에 들어서자 신림동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다른 대학가처럼 이곳에도 하숙 대신 원룸 바람이 분 거다. 2층 주택을 다들 4~5층으로 올려 원룸으로 만들었다. 그도 집 바로 앞에 땅을 사 5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신림동에 가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할 수 있죠. 옛날엔 다 산이었고 우리 집에서 조금만 가면 개울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랑 도시락 싸들고 가서 애들 눕혀서 재워놓고 놀며 빨래하며 그랬거든요. 지금은 다 원룸밖에 없어요.”

 

예순둘, 아버지처럼 다시 일어서는 삶

한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결국 지난해 비슷한 일이 또 생겼고, 돈을 갚기 위해 30년 넘게 살아온 신림동 집까지 지난해 팔았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자 젊은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바로 그 집을 말이다.

하지만 담배 하치장 사업으로 큰 돈을 만지다 1962년 산정저수지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쫄딱 망한 아버지가 건축업으로 다시 재기한 것처럼 그도 다시 일어서는 중이다. 큰아들 박모과(33·본명 박성우)씨가 지난해 시작한 한식당 ‘빠르크’의 총주방장을 맡아 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엄마 돈 받아서 세계 여기저기 여행하며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던 아들이 느닷없이 엄마표 밥집을 한다니 처음엔 황당했죠. 하지만 어째요. 아들이 해보고 싶다니 도와줘야죠. 요리법 가르쳐주고 계속 품평도 해줬죠. 다행히 반응이 좋아 올 초 신세계 백화점 본점까지 입점하게 됐어요.”

백화점 입점만으로도 기분이 으쓱해지지만 특히 신세계라 제안을 받고 더 기뻤다고 한다. 80년대부터 자주 드나들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땐 고객이었지만 이제 직장이 됐으니 기분이 묘하죠. 이젠 내가 고객 시중 들어야 하니, 어찌보면 어릴 때처럼 식모살이를 한다고 해야 하나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매일 출근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한다.

“내가 만든 음식을 아들과 함께 팔고 있으니 더 할 수 없이 좋아요. 그리고 이렇게 일하다보면 언젠가 내 집을 다시 찾을 날이 오지 않겠어요.”


글=심영주 기자 yjshim@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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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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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