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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해방 직후 벌어진 위폐 사건 계기로 한국은 반공사회로

베른하르트 작전을 소재로 해 2007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카운터페이터’. 나치친위대 소속 베른하르트 크뤼거 소령은 140여 명의 인쇄기술자들을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집결시켜 4년간 1억3000만 파운드어치의 위조지폐를 제조했다. 이것은 모든 물건을 통틀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짝퉁’ 생산이었지만 여기에 동원된 유대인들은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일찍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은 “자본주의를 붕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타락(debauch)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타락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짜 돈을 유통하는 것이다. 돈은 신뢰를 바탕으로 주고받는 것이며 가짜 돈의 범람은 그 신뢰를 파괴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교환과 무역도 안심할 수 없다.

가짜 돈은 요즘과 같은 불태환화폐 제도뿐만 아니라 금속화폐 제도하에서도 골칫거리였다. 기원전 6세기께 소아시아 지역에서 화폐가 발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가짜 돈 또는 불량 화폐와의 전쟁을 치러왔다. 그 전쟁을 일으킨 범인은 진짜 ‘전범’과 다름없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위조범에 대한 가장 가혹한 처벌의 하나는 1690년에 있었던 일이다. 영국의 토머스 로저스라는 사람은 가짜 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딸과 함께 은화 40개를 고의적으로 깎아서 약간의 은가루를 챙겼을 뿐이었다. 로저스는 교수형을 당하고 그 시체는 물에 담갔다가 토막 난 채 버려졌다. 그리고 그의 딸은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명예혁명을 통해 등장한 영국 최초의 민주정부가 한 일 치고는 전혀 명예롭지 못했다. ‘돈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만큼 용서될 수 없는 역모로 간주한다.

16세기 인쇄술이 가져온 변화
위조화폐에는 고도의 기술이 동원된다. 북한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100달러짜리 ‘수퍼노트’는 너무나 정교해 감별기로도 식별이 안 된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140여 명의 유대인 최고 기술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잡아 가둔 뒤 필사적으로 파운드화를 위조하도록 했다(베른하르트 작전). 영국 로저스 부녀의 사례가 개인 차원의 일탈이었다면 북한과 나치의 사례는 타국을 향한 국가 차원의 공작이었다. 그렇다면 ‘가짜’ 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화폐전쟁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진짜 돈에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이 동원된다. 화폐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조폐기술은 1550년께 독일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100년 전 인쇄업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을 정도로 금속과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과 견고함을 가진 스페인 은화. 아프리카 노예의 노동력으로 남미에서 채굴된 은을 유럽의 기술로 제조한 뒤 아시아로부터 수입품을 구매하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이 돈의 유통은 진정한 글로벌 현상이었다.
그 이전에는 모든 나라가 귀금속을 녹여 돈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양이 균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쉽게 변형되고 마모됐다. 그런데 1550년께 인쇄기술에서 파생된 압축공법이 개발돼 과거보다 훨씬 단단하고 정교한 모양의 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때마침 남미 대륙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한 스페인은 국왕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지역에서 압축 기계를 가져와 은화(작은 사진) 제작에 적용했다. 세고비아 지방에서 첨단기술로 만들어진 새 돈은 정교함과 단단함, 그리고 균일함 면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주변국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스페인 은화는 자연스럽게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스페인의 은화는 ‘톨라르’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졌다. 이것이 오늘날 ‘달러’라는 화폐단위가 널리 보급된 발단이었다(dollar는 한 나라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문자로 쓴다). 그 돈은 임진왜란 이후 필리핀과 일본을 거쳐 한국과 중국에까지 유입됐다. 중국인들은 스페인 은화를 보고 놀라운 듯 ‘은원(銀圓)’이라고 불렀다. 가운데가 뻥 뚫어진 그들의 엽전과 달리 가운데가 막혀 있어 둥그런 은쟁반 같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둥글다’는 뜻의 한자가 한·중·일 3개국의 화폐단위로 쓰이게 된 계기가 됐다. 이 모든 것이 16세기 독일의 인쇄술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불태환 시대로 접어들면서 화폐와 인쇄술은 더욱 가까워졌다. 불태환 시대에는 주화보다 은행권, 즉 지폐를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위조량은 금속화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해방 직후 우리가 겪었던 위조지폐의 경험은 나치가 저지른 베른하르트 작전보다도 극적이다.

한때 모조지 화폐 발행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상징이던 원구단(圜丘壇)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오늘날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인천항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일본인들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 주변에는 조선은행(오늘날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포함한 주요 국가시설들이 밀집했다. 그중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교과서 인쇄)와 근택(近澤)인쇄소(신문 인쇄)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종의 딸(경정공주)이 태어났던 그 동네의 이름을 ‘작은 공주골(소공동)’에서 ‘하세가와마치(長谷川町)’로 바꿨다. 하세가와는 조선총독의 이름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은행 일본인 간부의 결정으로 급하게 발행된 조선은행 을(乙) 100원권. 인쇄원판이 공산당원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조선정판사 위조화폐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북한군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똑같은 돈을 위조해 대량 살포했다. 해방 전에 발행된 갑(甲) 100원권에 비해서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조잡한데도 조선은행은 안이하게도 이를 계속 유통시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은행권은 원래 대장성 인쇄국에서 인쇄됐다. 그러나 패전이 가까워 오면서 일본 본토가 극심한 물자 부족에 빠지자 제작 장소가 서울로 바뀌었다. 이 무렵 조선도 정상은 아니었다. 대장성인쇄국 서울출장소는 화폐용지를 조달하지 못해 시내 지물포에서 모조지를 구입한 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통해 은행권을 제작했다. 교과서 인쇄기를 통해 급하게 만들어진 조악한 지폐는 이후 수십 종의 위조지폐가 출몰하게 되는 원인이 됐다.

그런 상태에서 해방이 찾아왔다. 철수작전에 돌입한 조선은행의 일본인 간부들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100원짜리 인쇄원판을 빼돌렸다. 그리고 인근의 근택인쇄소에서 미 군정청과 조선인 직원들 몰래 지폐를 인쇄한 뒤 귀국길에 나선 일본인 예금주들에게 지급했다. 그 바람에 불과 며칠 동안 100원권 발행액은 두 배로 늘었다.

그런 불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인쇄소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철수하기 바쁜 일본인들 손에서 다시 인쇄원판을 빼돌려 똑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직원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해방 직후 남조선에서는 공산당이 합법 단체였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압수한 재산을 불하할 때도 미 군정청은 근택인쇄소를 조선공산당에 넘겼다. 거기서 근무하는 직원의 상당수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은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로 개명한 뒤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활동이었다. 인쇄소의 임직원들은 빼돌린 인쇄원판을 이용해 건물 지하에서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제작했다. 그리고 공작금으로 썼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 인쇄원판을 팔아 넘기려다 적발됐다.

소공동 74번지 지하에서 위폐 제작
1946년 5월 검거된 10여 명의 피고인들은 ‘용공 조작’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법정에서는 사상 최초의 재판부 기피신청과 법정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법정 밖에서는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 의문사하거나 담당판사가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극도의 혼란이 수개월간 계속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당시 신탁통치 찬반 문제는 지식인들끼리의 관념적인 문제였던 반면 위조지폐 문제는 전 국민을 금방 빨아들여 흥분시키는, 무섭도록 폭발적인 문제였다. 은행에서 100원짜리 지폐 수취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가운데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낙인찍혔다. 주범 박낙종과 이관술은 종신형에 처하고(한국전쟁 중 처형),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북으로 도망갔다. 해방일보는 매각돼 오늘날 경향신문으로 전환됐다. 이것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전말이다.

해방 직후 순진했던 남조선은 소공동 74번지(오늘날의 조선호텔 앞) 지하에서 벌어진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반공사회가 됐다. 돈의 타락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지만 그 실패는 공산주의를 추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의 ‘짝퉁’은 그 어떤 ‘짝퉁’보다도 위태롭다.

그런데 ‘돈의 타락’은 원래 위조화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닌이 말한 돈의 타락이란 진짜 돈의 범람이었다. 레닌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면 자본주의가 붕괴한다고 믿었다. 즉 무능한 중앙은행에 의한 화폐 남발이 화폐 불신을 초래해 자본주의의 씨앗인 화폐를 사라지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 무능한 중앙은행은 사회 전체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린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라이히스방크는 돈을 너무 많이 풀어서 탈이었고, 대공황 때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돈을 너무 적게 풀어 탈이었다. 화폐경제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물질로서의 돈을 잘 만드는 것 말고도 사회제도와 신념체제로서 돈을 잘 가꾸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조상은 그런 것을 잘 몰랐다.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도 금융과 중앙은행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나머지 돈의 재질을 개량하는 데만 매달렸다. 그런 면에서 레닌보다도 더 유물론적이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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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