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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유산적 문제’와 불평등이 미래 민주주의 최대 위협

“그대는 우리의 인내력을 얼마나 시험할 것인가? 우리를 조롱하는 그대의 광기는 얼마나 더 오래 갈 것인가? 그대의 끝없는 뻔뻔스러움은 언제야 끝날 것인가?”

먼 훗날 소와 염소가 풀을 뜯고, 더 먼 훗날엔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들이 정신없이 셀카를 찍고 있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의 핵심 중 핵심이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원로원에서 이렇게 ‘카틸리나 탄핵’을 위한 연설을 시작한다. 루치우스 세르주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 그가 누구였던가? 뇌물을 뿌려 로마 집정관이 되려다 실패한 카틸리나는 시민들의 부채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지지자를 모아 쿠데타를 도모한다. 음모를 간파한 키케로는 네 번에 걸친 원로원에서의 연설을 통해 쿠데타 지지 세력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민주주의의 힘. 공화국의 위대함. 지성의 영향력. 뭐 그런 걸 가르칠 때 늘 단골로 등장하는 얘기다. 물론 멋지다. 하지만 몇 가지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 로마 원로원은 민주주의적 의회가 아니었다. 매년 2명씩 뽑히는 새로운 집정관을 돕는 재력가, 유명인, 그리고 과거 관료들로 구성된 자문기관일 뿐이다. ‘세넥스(senex)’, 그러니까 ‘어르신’이란 라틴어 단어에서 만들어진 ‘세나투스’(원로원)는 말 그대로 힘 좀 쓰는 어르신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제의 영향을 받은 로마 공화정의 진정한 의회는 서민들로 구성된 민회(Concilium Plebis)였다. 민회는 법을 통과시키고 집정관과 원로원의 권력을 통제하며 군을 지휘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민회는 점차 어르신들과의 싸움에서 밀렸고, 급기야 “망해 가는 공화정을 재건하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거짓말로 시작한 로마제국 건립 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독일 화가 조지 그로스(George Grosz)의 ‘사회의 기둥’(1926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시작된 독일의 첫 민주공화국(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고 있다.
직접민주제 대부분 과두정치로 변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고, 잘사는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상일 거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고, 자유롭지 않고, 못 사는 세상보다는 낫다. 문제는 ‘모두’ ‘평등’, 그리고 ‘자유’의 정확한 의미에서 시작된다. 우선 ‘모두’의 뜻이 부정확하다.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는 ‘Isonomia’, 그러니까 ‘법(nomos) 앞에 평등(iso)’은 모든 시민이 모든 결정에 참여하고 논의하며 투표할 수 있는 직접 민주제에서만 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국회·직업 정치인 없이 랜덤(random, 아무렇게나)으로 선택된 일반 시민들이 행정부를 담당하게 했다.

4년마다 줄 서 기다리다 도장 한 번 찍는 미국·유럽·한국식 민주주의와는 달리 두꺼운 전화번호부에서 무지막지로 이름을 뽑아 장관·차관·대통령을 임명한다는 말이다. 물론 본질적인 문제가 많은 제도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직접민주제 투표를 통해 현명한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를 추방했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켰다. 랜덤으로 뽑힌 대부분의 관료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오늘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미래를 등쳐 먹는, 뭐 그런 전통적인 포퓰리즘의 문제들 말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당연히 다양하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해야 하는 농부와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 말솜씨가 좋은 사람과 말 없는 사람. 공동체의 마당발과 외톨이. 부모 없는 고아와 잘나가는 부모 덕분에 능력 없이도 덩달아 잘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직접민주제는 그렇기에 서서히 돈 많고, 능력 있고, 말 잘하고, 연줄 많은 사람 위주의 통치, 그러니까 과두정치로 변신한다.

포퓰리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통적인 대안은 물론 대의원제다. 투표로 뽑는 대리인들을 통해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시민들의 의견을 현실적인 정책으로 평준화하겠다는 말이다. 랜덤으로 섞인 잡음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신호를 평균화해 숨겨진 정보를 찾아내는 통계학적 신호처리 방법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신호와 잡음을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필터(filter)가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필터에 ‘바이어스(bias)’, 그러니까 편견과 성향이 포함돼 있다면? ‘저주파 통과 필터’를 사용하면 오로지 낮은 주파수의 신호만 통과되겠고, ‘고주파 통과 필터’를 쓰면 오직 높은 주파수의 신호들만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국회·의회·하원·상원 의원들은 편견 없는 ‘불편 필터(unbiased filter)’들일까? 물론 아니다. 역시 시간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 바쁜 사람보다 선거에 출마할 확률이 높다. 말 못하는 벙어리는 어느 국회에서도 찾기 어렵고, 하루 종일 비디오게임에 미쳐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오타쿠들이 상원의원으로 뽑힐 리 없다.

독일 화가 조지 그로스. 조국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했던 그는 패전과 함께 시작된 독일의 첫 민주공화국, 바이마르공화국(Weimarer Republik)에 모든 희망을 건다. 하지만 희망은 곧 실망으로 변했다. 그의 분노는 ‘사회의 기둥’<그림>이란 작품을 탄생시켰다. 형식적으론 완벽한 민주국가 독일. 하지만 결국 그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로스의 작품 속엔 전쟁과 침략만 생각하는 민족주의 파시스트들, 요강을 덮어쓴 언론, 술 취한 성직자, 잔인한 군인들, 머리에 똥만 가득 찬 정치인 등이 등장한다. 정치인의 가슴에 붙인 종이엔 ‘Sozialismus ist Arbeit’,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일자리다’라고 적혀 있다.

체사레 마카리(Cesare Maccari)의 1888년 작품,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
시민을 노예로 변하게 한 로마의 불평등
민주주의는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전거이며 비행기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추락하는. 직접민주제·대의원제·대통령제 모두 언제든 과두정치와 독재, 무질서와 카오스로 변질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불안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아마도 ‘유산적 문제(legacy problem)’와 불평등이겠다. 유산적 문제란 무엇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운영체제가 좋은 예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법칙) 덕분에 컴퓨터 하드웨어는 지속적으로 빨라지지만 사용자의 경험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거기다 유닉스(Unix) 운영체제 기반인 리눅스(Linux)나 애플의 OSX보다 언제나 더 불안전하다. 문제는 윈도의 ‘유산적 문제’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과거 MS-DOS 시절의 코드들을 계속 유지하다 보니 시스템이 불안전해지고 느려지는 것이다.

비슷하게 1791년에 제정된 미국 헌법 수정 제2조를 생각해 보자.

“잘 구성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시민의 권리는 침해할 수 없다.”

이 조항이 만들어진 시기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불과 몇 년 전에 치렀고, 아직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땅들로 둘러싸였던 18세기였다. 당시를 가정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법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종, 문화,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3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여전히 개인이 돌격 소총을 소유하고 공공장소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난센스다. 전통적인 유산적 문제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유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법에 ‘유효기간’을 도입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법들의 중요성에 따라 5년, 10년, 100년마다 갱신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무효가 되도록 설계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미래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초(超)대규모 불평등이다. 대부분 평범한 농부들로 구성됐던 로마의 민회는 언제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을까? 훗날 로마제국의 직업군인들과 달리 공화정 시대 군대는 평범한 시민들의 집합체였다. 아내의 남편. 딸·아들의 아버지. 봄에 씨 뿌리고 늦은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돌아와야 하는 농부들. 하지만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지중해 주변 모든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3개월의 종군은 3년, 10년이 돼 버린다. 병사들의 농가는 황무지로 변한다. 군인들은 굶는 아이들을 위해 돈을 빌려야 한다. 더 이상 빌릴 수 없으면 집과 땅을 판다. 파는 사람이 많으면 헐값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바로 ‘senex’, 돈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로마가 팽창하는 만큼 나라는 부자가 되지만 로마는 더 이상 서민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토론하고 투표하던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은 비굴하고 책임감 없는 노예로 변해간다. 로마식 민주주의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토론하고 투표하며 공동체를 책임졌던 자존심 강한 키케로 시대의 원로원 의원들 역시 점차 황제의 노예로 변해갔다. 드디어 제국의 황제 역시 보이지 않는 신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신의 노예가 돼 버린다. 노예성은 감염성이 있는가보다.

지나친 평등, 국가 간섭도 인간을 노예화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저서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에서 언급했듯이 지나친 평등, 국가의 개입, 개인성의 무시는 인간을 국가의 노예로 만든다. 하지만 지나친 불평등과 국가의 외면 역시 개인을 강한 자의 노예로 바꿔 버린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주장대로 자본의 이득이 노동의 이득보다 더 빠르게 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장 위협할 불평등의 근원은 따로 있다. 30년, 50년, 100년 후. 기계가 드디어 정보를 이해하고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의 발명도, 혁신도, 노동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아무도 인간의 노동·혁신·발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계가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더 저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10개의 인공지능 회사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구는 무한으로 부자가 되겠지만 99% 이상의 사람들은 직업도, 소득도 없다면? 지구에서 소득세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단 10명뿐이라면? 100년 후의 인공지능 시대에 과연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재할지 궁금해진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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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