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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안팎 비난 속 개발독재 22년 … 퇴임 후엔 국민에게 존경

22년간의 집권 후 퇴임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한 이슬람 사원에서 금요 기도를 마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 들이닥친 외환위기는 전 아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승승장구하던 아시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이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서슬 퍼런 처방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세계에서 단 한 나라, 말레이시아만이 반기를 들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 총리는 “서구 투기자본 탓인데 왜 근면한 아시아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며 정면대결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그 여세를 몰아 1999년 가을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20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2000년 3월 총리 집무실을 방문했다.

마하티르 총리(가운데)가 1983년 8월 11일 창원공단의 삼성정밀 공장을 방문,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오른쪽)으로부터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서구 대신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
당시 그는 전혀 75세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격무와 삶의 황혼기에서 느껴지는 피로감과 허탈함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존경하는 아시아 지도자로 중국의 마오쩌둥과 함께 이승만·박정희를 언급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이었소.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이 처음부터 민주화가 됐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거요. 늘 지도자가 교체되고 어수선한….”
그는 특히 박정희에게 각별했다. “박 장군은 매우 강한 지도자로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켰습니다. 돈도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모델이지요.”
그는 시종 ‘박 장군(General Park)’이라고 불렀다. 마하티르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을 많이 차용했다. 81년 총리 취임 후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는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국의 ‘하면 된다(Can Do Spirit)’ 정신을 ‘말레이시아는 할 수 있다(Malaysia Boleh)’로 재생시켰다. 박 대통령처럼 매일 아침 경제관료 회의를 주재하며 선글라스를 끼고 전국 현장을 시찰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과도 친했다. 권위주의적이기는 하나 그들의 열정, 애국심, 고민에 같은 개도국 지도자로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다. 당시 마하티르의 동방정책은 노태우 ‘북방정책’의 단초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두 사람은 비공식으로 만나면 미·일 등 강대국에 대한 비판을 실컷 나누는 사이였다.
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며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을 때 마하티르는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난 김에 그때 이야기를 슬쩍 물었더니 우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국민의 원성을 들으며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하고 싶은 지도자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은퇴한 뒤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죠. 문제는 퇴임 후 정치보복이요. 알다시피 신생국 지도자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을 수 없거든요.”
이 대목에서 그는 책상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만약 민주적이진 않지만 힘센 리더가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그에게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화를 이룩하자고 설득합니다. 이후 막상 민주화가 되자 사람들은 그를 감옥에 넣습니다….”
마하티르는 이날 내게 점잖게 말했다. 그러나 후일담이지만 전·노 구속 당시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자신들의 롤 모델이었던 한국이 벌이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 잘나가던 한국 건설사의 말레이시아 공사 수주는 별 볼 일 없어지고 말았는데 이 역시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있을까 싶다.
마하티르는 존경하는 서구 지도자로 매우 잔인했지만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룬 표트르 대제(1682~1725 재임)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총리를 꼽았다.

유창한 영어와 냉철한 논리로 서구 비판
57년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잘살았다. 인구는 우리의 절반 정도인데 면적은 세 배나 넓고 천연자원이 풍부했다.
마하티르에게 과거 한국은 ‘희망 없는 나라’였다. 그는 어린 시절 한국을 아주 낙후된 ‘은둔 국가(Hermit Kingdom)’로 배웠고 장성해서는 분단·전쟁·가난과 같은 말로 인식했다. 65년 초선 의원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서울은 불빛조차 많지 않았고 변변한 산업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조국을 발전시키자”며 벌이는 ‘새마을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인의 애국심·근면·자조자립·규율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현대자동차와 대우조선을 방문해서는 입이 쩍 벌어졌다.
81년 총리로 집권하자마자 그는 서구 중심 국가발전 모델을 과감히 버리고 아시아의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는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의 리더십 아래 말레이시아는 만년 열대 빈국에서 벗어나 약진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지난 수백 년간 말레이를 지배한 서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명문 ‘킹 에드워드7세 싱가포르 의대’를 졸업한 그는 영국식 교육에 힘입은 유창한 영어와 비판 논리로 서구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했다.
“서구인들은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이며 비판적 토론을 옹호하면서도 정작 동양인이 그러면 비난한다.”
상대방의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언변,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솔직하게 밝히는 태도,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은 90년대 들어 국제무대에서 마하티르를 ‘아시아의 대변인’으로 부상시켰다. 그는 97년 아시아위크(Asiaweek) 선정 ‘아시아 파워 50인’ 중 중국의 장쩌민에 이어 2위로 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해 아시아에 몰아친 외환위기로 동남아 통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기 시작했고 경제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분노한 마하티르는 “서구 투기 자본의 결과”라며 미국 뉴욕의 ‘큰손’ 조지 소로스를 겨냥해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아시아 각국이 미·영 주도의 IMF의 살인적인 ‘고(高)금리·구조조정’ 처방을 받아들였지만 마하티르는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외과의사 출신답게 원인을 분석해 처방을 얻으려고 했다.
마침내 98년 8월 그는 IMF 처방과 정반대되는 ‘저(低)금리·경기부양·고정환율제’를 골자로 하는 신경제정책을 단행했다. ‘마하티르의 마이 웨이(My Way)’로 명명된 이 조치는 즉각 서구 언론과 금융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국가의 인위적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 이 조치는 곧 홍콩·대만에서도 차용됐다. 이후 추락하던 동남아 경제는 대반전에 성공, 아시아 외환위기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약속대로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
외환위기 당시 마하티르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빠졌었다. 그의 후계자인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가 연일 미국을 공격하고 미국 언론도 마하티르를 독재자로 비판할 때 안와르는 ‘친미(親美)’ 자세를 취했다.
98년 5월 이웃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 처방을 수용한 데 반발한 폭동으로 32년 권좌에서 물러나자 부총리 안와르 측은 자신들을 ‘개혁세력’, 마하티르를 ‘물러나야 할 구세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이런 안와르를 ‘말레이시아의 희망’으로 치켜세웠다.
마하티르는 강공을 택했다. 98년 9월 안와르를 부총리에서 해임한 후 동성애와 직권남용,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해 버렸다. 예상대로 서구 언론은 안와르를 피해자, 마하티르는 가해자요 탄압자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경제 회복이 되면서 그의 입지는 다시 공고해졌고, 총선에서도 이겼다. 마하티르는 인터뷰 당시 “이번 총리직이 마지막이며 후계자도 정해졌다”고 공언했다. 약속대로 그는 2003년 10월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총리가 된 후 단 한 번도 선거에서 패하지 않고 무려 22년간 집권한 뒤 건강한 상태에서 자의(自意)에 의해 퇴임한 것은 그가 처음 아닐까 싶다.

경호원 없이 쇼핑 다니는 평온한 말년
최고 통치자로서 마하티르는 여러 얼굴의 소유자다. 국가 발전의 올바른 비전을 갖고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성취시키는 실천력은 박정희를 닮았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을 상대로 호령하고 뛰어난 국제 감각을 보이는 모습에선 이승만이 연상된다.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독립의 아버지’인 툰쿠 초대 총리와 싸울 정도로 원칙주의자였으나 집권하고서 중도실용의 길을 걸은 것을 보면 김대중이 떠오른다. 그러나 민주주의 신봉자인 김대중과 달리 마하티르는 개발독재를 옹호한다.
그의 철저한 반미 노선은 일견 노무현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이 감정적이고 국제관계에 문외한인 반면 마하티르는 냉철한 프로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평하면 평생 ‘마이 웨이’로 살아온 삶이다. 일국의 정치가로서, 최고 권력자로서 맞닥뜨린 수많은 인물과 사건, 상황 속에서 그는 예스(Yes)면 예스, 노(No)면 노였지 에둘러 가지 않았다.
그는 기존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변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놀랄 만한 직관력과 솔직함을 무기로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 그를 세상 사람들은 ‘독재자’‘독불장군’‘이단아’라고 불렀지만 그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고 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조국은 번영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의 재임 기간(1981~2003) 중 말레이시아는 후진 농업사회에서 세계 17위 무역대국이자 산업국가로 부상했다. 지금도 5% 넘는 고도성장을 하고 있다.
마하티르는 현재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구순(九旬)이 다 된 나이에 경호원도 없이 혼자서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쇼핑도 한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시민 대부분이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청하거나 함께 사진 찍기를 부탁한다. 마하티르는 귀찮아 하는 기색 없이 특유의 미소로 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지난해까지 주(駐)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며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용준 경기도 국제관계대사는 “국민으로부터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모습이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런 말레이시아인들의 모습은 지금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살벌하게 싸우는 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마하티르의 삶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마하티르는 이토록 존경받고 평안하게 사는 데 비해 그가 롤 모델로 여긴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의 잘못 때문인가, 마하티르의 착각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편협함 때문인가.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작은 선택에도 늘 망설이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며, 주위 눈치나 보면서 소심하게 살아가는 범인(凡人)들이 볼 때 마하티르의 ‘마이 웨이’ 성공은 신기하기조차 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그를 만들었을까.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외곬이자 결단력이 있다.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한 목표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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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