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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홍색·회색 용광로 ‘황푸군관’은 중국 리더 제조창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제1차 중국국민당 대표자 대회 모습. 국민당과의 합작과 황푸군관학교 설립안을 통과시켰다. [사진 김명호]
잡교(雜交)를 거쳐 만들어진 동식물이 모본(母本)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낯선 문화와 사상과의 접촉도 마찬가지다. 혼혈아들이 총명하고 예쁜 것처럼 견문 넓은 사람은 생김새도 다르다. 고집과 신념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알고, 말만 잘하는 엉터리들과 전문가를 식별하는 안목이 탁월하다. 가끔 괴상한 사고도 치지만 결국은 남이 상상도 못할 업적을 후세에 남긴다.

20세기 초반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의 작은 섬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지방 군벌들까지 연합한 군사학교가 문을 열었다. 당시 중국에는 규모나 시설이 비슷한, 고만고만한 군사 교육기관이 많았다. 이 학교도 그냥 ‘육군군관학교(陸軍軍官學校)’였지만 흔히들 지역 이름을 본떠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라고 불렀다.

황푸군관학교는 연합과 잡교의 결정체였다. 공산당의 홍색(紅色)과 국민당의 남색(藍色), 군벌들의 회색(灰色)이 뒤섞여 만들어낸 금색(金色)과도 같았다. 훗날 “국민당과 공산당은 뿌리가 같다. 양당의 대결은 황푸군관학교 출신들끼리의 싸움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공 양당의 군 지휘관과 정치 지도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정치부주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비롯해 쉬샹첸(徐向前·서향전)·예젠잉(葉劍英·엽검영)·천껑(陳賡·진갱, 한국전 참전군 부사령관 역임)·다이리(戴笠·대립)·후쭝난(胡宗南·호종남)·린뱌오(林彪·임표)…. 나이가 엇비슷한 그들은 교관과 생도로 뒤섞였다. 국민당 대리선전부장에 선출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생도 선발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천하의 황푸군관학교는 시작부터 ‘국·공연합’ 네 글자가 따라다녔다. 성립 과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 소련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다. 위기를 느낀 소비에트 정권은 제국주의의 능욕 대상이었던 인접 국가들과 제휴를 모색했다. 이듬해 7월 25일 ‘대중국선언(對中國宣言)’을 발표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 중국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고 만주(滿洲)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취했던 이권을 일률적으로 포기한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선언서가 중국에 미친 영향은 기대 이상이었다. 중국인들은 한겨울에 불어온 훈풍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환호했다. 친소(親蘇) 바람이 대륙을 휘감았다. 대학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러시아 학과와 관련 연구기관을 개설했다. 공산주의 소조(小組), 사회주의 연구사(硏究社),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같은 단체들도 줄을 이었다.

1920년 3월 소련 공산당은 ‘코민테른 원동국(遠東局) 서기처’ 주석단 위원 중 한 사람인 보이딘스키를 중국에 파견했다. 상하이에서 진보적 지식인 천두슈(陳獨秀·진독수)를 만난 보이딘스키는 중국에 공산당 조직의 성립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공산당 창당에 골몰하던 천두슈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5월에 공산당 임시 중앙조직을 만들고 전국에 기층조직 건립을 서둘렀다. 보이딘스키는 천두슈의 민첩함에 경악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레닌에게 “우리는 중국의 동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혁명을 수출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보고서를 발송했다.

1921년 6월 코민테른은 레닌이 추천한 네덜란드 출신 마린을 중국에 밀파했다.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에 도착한 마린은 전국에서 온 13명의 대표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마린은 중공 성립의 주역이었지만 중공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보이딘스키와 천두슈의 조급증을 원망했다. “학술단체지 정당이 아니다. 당원도 오륙십 명밖에 안 된다. 모였다 하면 말싸움으로 시간만 허비할 뿐 5개월이 지나도 결과물이 하나도 없다. 보이딘스키의 보고서가 만들어낸 조산아에 불과하다.”

마린만 싫어하라는 법이 없었다. 중공 초대 서기로 선출된 천두슈도 마린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공이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금 지원도 거절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코를 끌려갈 수 없다. 내가 서기를 그만둘지언정 코민테른이라는 모자를 쓰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원들은 마린을 두둔했다. “마린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당의 창당은 1~2년 후라야 가능했다.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마린은 제 손으로 만든 공산당보다 쑨원(孫文·손문)이 주도하는 국민당에 더 호감을 느꼈다. 공산당은 공개활동이 불가능한 비밀정당이었지만 국민당은 달랐다.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춘 대정당이었다. 혁명의 역사도 유구했고 광둥과 광시(廣西) 일대에 기반도 단단했다. 10만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들의 지지도 예상보다 컸다. 마린은 중공당원을 내세워 쑨원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북벌(北伐)을 준비 중이던 쑨원은 마린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았다. 남들 몰래 구이린(桂林)에서 두 차례 만났다.

쑨원과 마주한 마린은 상하이의 공산당과 남방의 국민당을 비교했다. “공산당은 희망이 없다. 국민당이야말로 사회주의 정당”이라며 소련과의 합작을 전제로 대담한 제안을 했다. “첫째, 국민당을 개조하고 사회 각 계층, 농민, 노동자와 연합하자. 둘째, 혁명기지가 필요하다. 군관학교를 만들자. 셋째, 공산당과 합당을 추진하자.”

마린의 뒤를 이어 중국 땅을 밟은 보르딘(오른쪽). 별명이 광둥의 레닌이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마린은 중공당원들에게 국민당 입당을 요구했다. 당원들의 반발이 한결같았다. “국민당은 중증 환자다. 비적과 투기분자들의 집합처와 다를 게 없다. 타협을 좋아하고 내부 문제도 복잡하다.” 마린은 중국을 떠났다.

새로운 사람을 물색하던 레닌은 마린보다 한 수 위인 보르딘을 파견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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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