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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번역가·편집자들이 뽑은 명단편 6

소설 읽기에 유행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최근 ‘단편의 맛’을 일깨우는 수많은 기획물들이 서가를 노크하고 있다. 지난해 단편소설의 대가인 앨리스 먼로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조용히 시작된 단편 읽기 열풍. 그리고 유년의 기억이나 한 줄 하이쿠처럼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단편소설의 위력.

인생에 ‘문학’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는 이들에게 단언컨대, 이 글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장편소설 읽을 시간도 없는데 ‘웬 단편?’이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서사’와 ‘캐릭터’를 소설 읽기의 가장 큰 축으로 삼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려다 만 얘기 같은 시원치 않은 결말, 이야기에 집중하기에는 짧은 호흡, 생의 서글픈 단면을 전하다 말고 소멸하는 얄궂음.

하지만 소설가들은 장편과 단편을 핑퐁처럼 번갈아가며 세상에 던진다. 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단편’은 결코 쓱 밀어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편은 일상의 삶 같은 것이고요. 단편 쓸 때는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라고 한 소설가 김연수 역시 20년간의 소설가 생활 동안 7권의 단편집을 냈고, 올해 초에는 ‘단편문학의 경전’으로 꼽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을 직접 번역해 내놓기도 했다.

출판계의 블루칩 중 블루칩으로 꼽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실 단편집의 팬이 더 많은 소설가 중 하나다. 최근 ‘9년만의 신작 소설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된 <여자 없는 남자들>은 출간 보름 만에 4쇄를 찍었고, 그의 미발표 단편과 기존의 단편을 좀 더 정리된 형태로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최근 문학동네는 <반딧불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빵가게 재습격> 등 세 권의 개정판을 냈다. 올 초부터 이어달리기 하듯 출간된 은희경, 성석제, 천명관 같은 중견 소설가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겠다.

소설가로 한껏 무르익은 이들의 장편에서 그들의 ‘주인공’이 읽힌다면, 이들의 단편에서는 작가가 어느 밤 보았던 장면, 끄적인 메모들, 최근의 관심사 같은 것들을 끝없이 상상해 보게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이야기가 무르익어 ‘장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하지만, 출판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한 작가의 작품 중 판매 부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대부분 장편 쪽이며, 해외 작가의 경우 장편에 비해 단편의 저작권료가 훨씬 저렴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물음에 출판사 마음산책의 정은숙 대표는 너무나 단호한 진단을 내렸다.

“이야기의 힘, 구성의 아름다움, 캐릭터의 생생함은 장편이 더 뛰어날 수 있지만 미학적인 면에서 더 아름다운 건 단편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가들도 장편은 ‘엉덩이의 힘’으로 쓴다는 말을 해요. 반면 단편은 작가가 설계도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다가 여러 번 퇴고하여 잘 구축된 세계를 독자에게 툭 던지는 듯한 문학이에요. 이야기를 풀어주지도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죠. 소설이 과연 예술인가라는 물음에 일각에서는 ‘이야기다, 인물이다, 대중적인 서사의 장르다’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최소한 단편이 예술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최근 <여자 없는 남자들>을 번역한 양윤옥 선생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녀는 그의 장편과 단편을 오가며, 과연 작가에게서 어떤 기미와 태도 변화를 읽었을까?

“장편에서는 작가가 시간의 제약에 쫓긴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격투합니다. 장편엔 반드시 작가의 그런 물리적 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죠. 반면 단편은 작가가 꾸며낸 한 칸의 방과도 같아요. 삶의 특정한 기미를 포착하고 그것을 집약적으로 담아내죠. 물리적이고 필사적인 투쟁이 없는 만큼 삶을 추상화하는 예술성이 진해져요.” 단편을 ‘건축’이나 ‘방’에 비유하는 것은 소설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편은 여덟 평짜리 원룸과 같은 공간이에요. 고심 끝에 배치한 의자에 앉아 벽지와 바닥과 동선에 대해 고민하게 되죠. 단편을 쓸 때면 가장 먼저 그 원룸 안의 오롯한 의자로 돌아가게 됩니다.” 최근 단편집 <알로하>로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소설가 윤고은의 고백이다.

문학의 진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외에, 분초를 다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단편문학’의 효용은 존재한다. ‘테마 명작관’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보석 같은 숨겨진 고전 단편들을 주제별로 묶어내고 있는 에디터 출판사의 김태진 대표는 ‘경제성’이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선 소위 ‘문호’라 불리는 작가들 작품들이 대부분 장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꺼운 책들을 현대인들이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단편소설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대가들의 문장력, 사상, 인생의 단면에 대한 사유를 오롯이 느낄 수 있어요. 자투리 시간에 잠깐만이라도 읽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됐죠.” 올해도 몇 권의 소설을 읽었지만, 에디터의 머릿속에 잔상을 남긴 것도 오히려 단편 쪽이다.

특히 ‘상실’의 잔인함이 컸던 올 한 해, 인상 깊게 읽었던 단편 몇 권의 이미지가 여전히 너울거린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쓴 안톤 체호프의 ‘애수’,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가업을 상실한 하층민의 이야기 김승옥의 ‘염소는 힘이 세다’, 여자 잃은 남자의 고독감을 묘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가을, 시간을 잊기보다는 사색에 빠지고 싶다면, 좋은 단편집 한 권을 잡아볼 일이다.


소설가·번역가·편집자들이 뽑은 명단편 6

1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by 문학동네 편집자 양수현


카버의 단편소설은 짧은 분량과 간결한 문체 안에 소시민들의 복잡미묘한 일상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때로는 건조하게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고 생생한 인물 묘사가 인상적이다.

2 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by 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정은숙

은희경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 고독하다’ 그리고 ‘우리 안의 고독들이 만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독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은 ‘사이토 마리코’라는 일본 시인의 시집 <입국>의 ‘눈송이’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땄는데, 나 역시 그 구절을 기억하고 있어서 이 소설집이 더 반가웠다.

3 사쿠라기 시노 <호텔 로열>(현대문학) by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양윤옥

나오키상 수상 작가 사쿠라기 시노는 홋카이도의 광대한 습지 위 언덕에 러브 호텔이 건립되고 이윽고 퇴락하기까지 30여 년의 세월을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7명의 삶으로 집약해서 그려냈다. 단편에서는 의외의 모험이나 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수작. 각 편이 독립적이면서도 마지막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는 묘미를 맛보는 데는 ‘연작 단편집’ 형식이 효과적이다. 특히 ‘별을 보고 있었어’의 청소부 이야기, 번역하면서 심장이 꿈틀할 만큼 슬펐다.


4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문학동네) by 소설가 정용준

이 책에는 짤막한 16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단상 혹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그가 포착한 짧은 단면 속의 인물과 상황은 꿈과 같다. 어떤 꿈은 아름답고 어떤 꿈은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가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아름답게 느끼는 것처럼 그의 소설은 기억으로 간직할 수 없는 감각과 명징한 모호함이 있다. 그것을 더듬는 일은 늘 서늘하고 아름답다.

5 알퐁스 도데 <알퐁스 도데 단편선>(문예출판사) by 소설가 윤고은

열다섯에 도데를 만났다. 스물다섯에는 소설 속 배경을 향해 떠났다. 서른다섯, 글을 쓰는 나는 코르니유 영감의 텅 빈 방앗간을 종종 떠올린다.

6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media 2.0) by 소설가 손홍규

이 책에 실린 11편의 단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별개의 이야기인 동시에 삶의 진창을 뒹구는 보석이 바로 인간임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척박한 세계에 내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뼈아프게 인식하며 살아가는지, 어떤 방식으로 시간과 고통에 빚어져 보석처럼 빛나게 되는지 알고 싶다면 애니 프루를 읽어야 한다. 단편소설은 삶의 결정적 한순간을 포획하는 섬세하고 절제된 언어의 예술이지만 그렇게 포획된 순간들이 순식간에 한 생애를 관통해버리는 불멸의 예술이기도 함을 애니 프루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격렬하게 보여준다.

글=박지혜 헤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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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