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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파티·서구식 결혼식 첫선 … 미군 장교 숙소로 써 먼로 위문공연도





조선호텔 100년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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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 백 년은 한국 근현대사 백 년이다. 울분의 역사도 있고, 열광의 순간도 있다. 하나 서러운 장면이 더 많은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지난 백 년 우리네 살아온 모양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조선호텔 100년 약사(略史)를 소개한다.



땅에도 운명이 있다 1914년



조선호텔은 1914년 서울 소공동 106번지에 문을 열었다. 이 땅이 참 얄궂다. 소공동(小公洞)이라는 이름은, 작은 공주가 살았던 동네라는 뜻이다.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살아서 소공동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이 주둔했고, 왜란 이후에는 명나라 사신이 머물렀다. 예부터 나그네의 터였다.



고종은 이 터에 하늘을 본 딴 모양의 3층짜리 원구단을 쌓고 1897년 10월12일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 즉위식이 열린 것이다. 황제 즉위식이 열린 바로 이 자리에 일제가 세운 호텔이 조선호텔이다.



“조선호텔은 서울 중심 중의 중심에 세워졌어요. 경복궁과 숭례문이 횡으로 이어지고 중간쯤에 덕수궁과 마주보게 지었죠. 일제가 호텔을 지으면서 원구단은 크게 훼손됐습니다.”



우리근대건축연구소 김정동(66) 소장의 설명처럼 현재 남아있는 원구단의 흔적은 3층 높이로 팔각지붕을 얹은 황궁우(皇穹宇)와 석고(石鼓), 돌로 만든 대문이 전부다. 지금은 호텔 정원을 장식한 쇠락한 정자 꼴이지만, 황궁우는 신위를 봉안하던 건물로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해당했다.



일제는 왜 이 자리에 호텔을 지었을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을 도모했고, 한반도를 잇는 철도 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 철도가 놓이고 역이 들어서면서 호텔도 문을 열었다. 1912년 부산철도호텔을 시작으로 1914년 조선호텔과 신의주철도호텔, 1922년 평양철도호텔이 개관했다. 조선호텔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산하 철도호텔 중 하나로 시작한 것이다.



1900년 경성역이 개관한 뒤로 센긴마에(朝銀前. 지금 한국은행 앞) 광장 주변에 근대 건물이 속속 들어섰다. 조선은행(1912)·조선호텔(1914)·경성우편국(1915)·미츠코시(三越)백화점(1930) 등이 하나 둘 건설되면서 경성은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그 복판에 조선호텔이 있었다.



조선호텔이 국내 최초의 호텔은 아니다. 1888년 인천에 건립된 대불호텔이 국내 최초의 호텔이다. 1902년 서울 정동에 문을 연 손탁호텔도 있었다.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식당으로 바뀌었고, 손탁호텔은 1922년 철거됐다. 대불호텔은 터만, 손탁호텔은 표지석만 남아있다.





모던 보이의 핫 플레이스 1914~45년



조선호텔은 경성의 랜드마크였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설계한 독일 건축가 게오르크 데 라란데(1872∼1914)가 조선호텔을 설계했다. 건물 외양은 당시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독일풍이었고, 지붕은 바로크 양식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샹들리에와 엘리베이터를 공수했고, 은 제품은 독일 장인으로부터 공급받았다. 건평 580평(약 2000㎡)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조선호텔은 객실 52개와 레스토랑·바·볼룸 등을 갖췄다. 당시 건립비는 84만4000원. 1927년 쌀 한 가마니가 6원이었으니 요즘 물가로 계산하면 340억원이 들어갔다. 김정동 소장은 “라란데가 일본 고베(神戶)나 요코하마(橫濱)에 지은 호텔도 2∼3층 높이였는데 조선호텔은 4층이었다”고 설명했다.



조선호텔은 유행을 선도했다. ‘수직열차’라 불리던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국내 최초로 운행했다. 서구식 결혼식, 댄스파티, 아이스크림도 조선호텔에서 처음 선보였다. 지금의 황궁우 주변에 조성됐던 로즈가든에서 연주회가 열렸고, 영화가 상영됐다. 1920∼30년대 조선호텔은 모던 보이의 사교장이었다.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 ‘팜 코트’에서 스테이크 ‘프라임 립’을 비롯해, 플랑베 스테이크와 달팽이 요리가 제공됐다. 무용가 최승희가 팜 코트의 단골이었다. 팜 코트의 양파수프는 전설의 메뉴다. 오늘도 조선호텔은 푹 익은 바게트 빵 안에 치즈가 듬뿍 얹힌 양파수프(작은 사진)를 내놓는다.



조선호텔이 대중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구보 박태원(1909∼86)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에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조선호텔 앞을 지나, 밤 늦은 거리를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대낮에도 이 거리는 행인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경성 안내 책자에 따르면 욕실을 갖춘 아메리칸 플랜 더블 룸 객실 가격이 21엔부터였으니, 요즘 시세로 53만원이 넘는다.



조선호텔의 높은 콧대를 증명하는 일화가 있다. 1938년 허름한 행색의 일본인이 조선호텔에 들어가려다 제지 당했다. 실업가 노구치 시다가후(野口 遵·1873∼1944)는 수모를 갚겠다며 조선호텔이 바로 앞에 지상 8층의 호텔을 지었다. 그 호텔이 반도호텔, 지금의 롯데호텔이다.





격동의 소용돌이 1945~67년



광복과 함께 한반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격동의 회오리에서 조선호텔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광복 직후 조선호텔은 미군 24사단 고위장교 숙소가 됐다.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숙소도 호텔에 마련됐다. 호텔은 당연히 미 군사시설이 됐다.



46년 6월 미군 초청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2년3개월 동안 조선호텔 임페리얼 스위트 201호에서 머물렀다. 이 방에서 ‘독립신문’이 발간됐다. 조선호텔 201호는 여느 객실과 다르다. 애초부터 VIP 전용 객실로 설계돼, 일제 강점기에도 귀족과 국빈만 묵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서울 전체가 쑥대밭이 됐지만, 조선호텔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문제는 어느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바뀌었다는 데 있었다. 50년 7월 북한군, 10월 미군, 51년 1월 북한군과 중공군, 두 달 뒤 3월부터 국군이 호텔을 차지했다. 호텔을 점령한 북한군이 로비에 김일성 사진을 걸고 와인을 마셨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호텔도 정부가 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고마움의 표시로 미군에게 호텔을 넘겨줬고, 호텔은 미8군 장교 숙소로 활용됐다. 53년 메릴린 먼로를 포함한 밥 호프 공연단이 조선호텔에서 미군 위문공연을 한 뒤 조선호텔은 미국에도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조선호텔 영업권을 되찾은 건 61년이었다. 63년 정부는 조선호텔 관할부서를 교통국에서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로 교체했다. 국제관광공사는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통합 운영하면서 이름도 반도조선호텔로 바꿨다. 두 호텔을 연결하는 아케이드가 그 시절 건설됐다.



미군이 호텔에 머문 10년 사이 대중문화 시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8군에서 활동하던 가수가 호텔로 무대를 옮긴 것이다. 패티 김, 김시스터즈 등 인기가수가 조선호텔 클럽 무대에 올랐다. 패티 김은 조선호텔 전속가수로 1년간 활동했다. 패티 김의 회고다.



‘당시 외국인은 조선호텔을 ‘노 초이스 호텔(No Choice Hotel)’이라고 불렀다. 주요 외국인 인사는 거의 모두 조선호텔에 투숙했기 때문이다. 그런 호텔의 전속가수가 되었으니 선진 문화를 체험하겠다던 꿈도 반쯤은 이룬 것이었다.(중앙일보, 2008년 3월13일)’





다시 태어나다 67년 이후



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호텔 재건축을 지시했다. 70년 아시안게임 개최에 대비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힘을 싣고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안게임 개최는 북한의 위협 때문에 실패했지만 대신 호텔 산업에 불이 붙었다. 70년대 들어 더 플라자 호텔(76년)·서울신라호텔(79년)·롯데호텔서울(79년)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67년 정부는 미국 기업(아메리칸 에어라인)과 합작으로 재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이로써 조선호텔은 국내 첫 체인호텔이 됐다. 3년의 공사 끝에 조선호텔은 70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됐다.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에, 사람 인(人) 자처럼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안타까운 건, 옛 조선호텔의 흔적이 전혀 안 남았다는 사실이다. ‘민족적 수치와 비화(悲話)가 엉킨 곳’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호텔 정원의 나무와 에어컨 등은 다른 호텔로 옮겨졌고, 서재필이 사용했던 침대 등 집기 1000여 점은 경매로 팔았다.



새 조선호텔은 새 문화를 선도했다. 야외 수영장, 나이트클럽, 뷔페 레스토랑이 들어섰고, 크리스마스 파티, 밸런타인데이 파티, 옥토버 페스트, 패션 쇼 등 서양 이벤트를 연이어 쏟아냈다. 91년 문을 연 아이리시 펍 ‘오킴스’도 명소였다. 오킴스는 2002년 국내 최초 하우스 맥주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70년대 장안의 명물이었던 야외 수영장에 천장을 덮은 건 94년이었고, 국내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 2011년 스테이크 하우스로 바뀐 건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직도 나이트클럽 ‘투모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곳보다 입장료가 5배 넘게 비쌌지만, 밤마다 긴 줄이 섰다. 72년 문을 연 투모로는 개장 1년 만에 호텔 업장 최고 매출을 올렸다. 배우 유인촌이 여기서 DJ를 하기도 했다(경향신문, 82년 9월24일).



현재 조선호텔의 주인은 신세계다. 83년 관광공사 지분을 삼성이 인수했고, 92년 삼성에서 신세계가 분리되면서 조선호텔 지분을 신세계가 가져갔다. 호텔 체인 웨스틴과는, 조선호텔이 로열티를 지급하는 프랜차이즈 관계다. 브라이언 백 총지배인은 “호텔이 100년 동안 이뤄낸 것을 지키고 앞으로 다가올 100년에도 호텔 업계를 주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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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100년의 기억 100년의 인연』(조선호텔) ▶『이야기 관광한국 - 한국관광공사 50년사』(한국관광공사) ▶『조선호텔 처리지』(국제관광공사) ▶『호텔 브랜드 이야기』(테라다 나오코)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김종록)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서울은 깊다』(전우용) ▶ 『근대를 산책하다』(정재정 등)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조이담·박태원) ▶‘조선호텔 - 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정영효, 동국대 박사과정 논문)



글=손민호·홍지연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서울 웨스틴조선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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