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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通新이 담은 사람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매주 ‘江南通新이 담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는 江南通新 로고를 새긴 예쁜 빨간색 에코백을 드립니다. 지면에 등장하고 싶은 독자는 gangnam@joongang.co.kr로 연락주십시오.

“이 시 알아요?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고은의 ‘그 꽃’이야. 캬~, 열다섯 자에 내 인생 전부가 녹아 있어요.”

 재수생 전문학원인 이투스청솔 분당점 경비 이석철(69) 할아버지. 그는 2002년까지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에서 본부장으로 일했던 대기업 간부 출신이다. 명예퇴직으로 물러난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대다 퇴직금을 다 날렸다. “서초동 우성아파트 살았는데, 집까지 들어먹고는 경기도 성남 반지하 월세방으로 이사왔지.”

 이보다 더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안 보여. 뿌옇고 짙은 안개가 한가득인 거야.” 두 달 가까이 정밀 검진을 받았지만 ‘원인 불명’에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다. “가족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죽음을 생각했지.” 혈관확장제, 수면제, 그리고 소주 한 병 사들고 우면산에 올랐다. 소주병을 따는 순간 “나는 죽으면 끝이지만 날 보낸 가족은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내 삶의 마지막 모습이 이건 아니잖아.” 살기로 마음 먹고는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다. “한 달을 울기만 했지. 그런데 서서히 눈이 밝아져. 이 말 들으면 ‘순 사이비’라고 욕하겠지만, 어쩌겠어. 내가 체험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경비로 오라는 거야. 성남구청에 ‘일거리 지원’ 신청해 둔 게 있었거든.” 그날부터 학원 출입문 바로 옆 의자가 그의 자리가 됐다. 학원 강사나 학부모가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45도로 상체를 숙이며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넨다. “난 한 번도 경비 자리에 앉으리라 상상해본 적이 없거든. 딱 그 자리에 앉게 되니, 참 많은 게 보이데.” 그의 눈엔 학원에 다니는 재수생뿐 아니라 강사도, 학부모도 모두 자식같다. “내가 이 학원 12년째 근무하는데 아직 인사 안 받는 선생님도 있어. 처음엔 눈물이 펑펑 쏟아졌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하지. 사실 나도 회사 다닐 때 경비하고 눈도 안 마주쳤거든.”

 그가 겪은 시련은 재수생 아이들을 토닥여주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어느 날 갑자기 카톡에 ‘할아버지, 나 이제 죽어’ 이렇게 메시지가 온 거야.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놈이 정자역이래. 냅다 택시 타고 가서 애 붙잡고 엉엉 울었어. ‘너 보고 싶은 날 이 할아버진 어떻게 하냐’면서. 그랬더니 이놈도 같이 울더니 죄송하대.”

 그는 재수생들이 수능 끝내고 한참 놀 때 학원 빈 강의실에 ‘사진반’을 개설한다. “특히 말썽 피우던 놈들 위주로 불러다 가르쳐. 사진 찍으면서 이런저런 조언 좀 해주려고.” 이렇게 정을 쌓다보니, 아이들이 써준 편지가 그의 자리 뒤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도 남는다. “출근할 때마다 생일 선물 받는 기분이야. 지하철에서 갑자기 ‘청솔 할아버지!’하면서 따라와 안기는 놈도 있고. 처음 회사 그만둘 땐 죽을 맛이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행복해.”

 만난 사람=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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