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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7) 현대차 첫 여성 임원 출신 김화자씨

① 동덕여대 가정관리학과 4학년 재학 당시 사은회 모습. 왼쪽 세 번째가 김화자씨. [사진 김화자]
②, ③1987년 3월 현대자동차는 처음으로 주부 영업사원을 뽑았다. 당시 동기생과 기념촬영한 사진. [사진 김화자]]
④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현대자동차 가락지점을 찾았다. 그는 현대자동차 부녀영업사원 1기로 입사해 이곳에 27년간 몸을 담았다.]
⑤ 2010·2011년 충북지역본부장 시절 우수지역본부로 선정돼 받은 상패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활약이 눈부시다. 여성 대통령까지 탄생한 마당이니 여성 최고경영자(CEO)나 여성 은행장 얘기는 진부하기까지하다. 하지만 조금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현실이 보인다.

올 3월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표에서 한국은 조사국 27개국 중 꼴찌였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36개국 30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한국의 여성임원 비율이 1.2%로 가장 낮았다. 태국(26.5%)·말레이시아(26.2%)·싱가포르(25.1%)·대만(24.3%) 등 다른 아시아 신흥국과 대조적이다.

여성 지위가 높아졌다지만 아직 유리천장이 견고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사실 대졸 여성이 대기업에 취업해 남자와 똑같은 대접을 받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임원을 단 김화자(59)씨가 그래서 더 대단하다. 1987년 주부사원 1기로 입사해 ‘별’까지 단 그의 인생에는 한국 여성의 분투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여자의 인생 목표는 오로지 결혼

“화자야, 너 서울 가라.”

속초여고에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강원도 속초에서 명태 건조 덕장(고기 말리는 곳)을 하던 아버지는 맏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공부 좀 한다는 부잣집 애들은 죄다 서울 유학 가던 시절이지만, 딸은 아들과 달리 유학이 드물었다. 딸 자식은 혼자 타지 보내면 안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제기동에 방 다섯 칸짜리 집을 장만하고 식모까지 붙여줬다. 서강대생한테 과외도 받게 했다. 하지만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서울만 가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턱 하고 붙을 줄 알았을 텐데 믿었던 맏딸이 동덕여대 가정관리학과에 들어갔으니 실패라면 실패죠.”

하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시집 잘 간다’는 여대, 그것도 가정관리학과 아닌가. 이화여대만큼은 아니어도 당시 결혼시장에선 여대 프리미엄이 있었다. 서울대 간 친구를 딱히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 인생을 결정짓는 건 대학이나 취업이 아니라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분위기는 오히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시집 못 간다”고 할 정도였다.

여자는 대학 마치면 시집 가서 애 낳아 키우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들 졸업 후 집에서 신부수업이란 이름 아래 백수 생활을 했다. 김씨는 “같은 과 동기 40명 중 취업한 사람은 두 셋 밖에 안 됐다”며 “신부수업 하다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고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했다. 그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8년 대학 졸업한 지 4개월 만에 대학 2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남자(남편은 2006년 작고)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살 터울로 두 딸을 낳아 행복한 삶을 살았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주부사원으로 사회에 첫발 내딛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 건 결혼 9년째이던 87년이다. 첫째가 7살, 둘째가 5살이었다.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뭔가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또 결혼 전 워낙 풍족하게 용돈을 받았던 터라 용돈보다 적은 남편 월급으로 사는 게 답답하기도 했다.

김씨가 집에서 살림하는 사이 사회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60년대 중반 경제개발계획이 산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부족한 노동력 충원을 위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81년 대우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기혼여성을 고용하면서 여성 취업이 탄력 받기 시작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번역·비서·디자이너 등 6개 분야에 경력사원 30명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는데, 원서 접수 첫날에만 800명 넘게 몰렸다. 지금처럼 간편하게 기업 홈페이지에 지원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 직접 가서 원서를 산 후 손으로 직접 써서 제출하는 방식이었는데도 이렇게 몰렸다. 접수 기간 8일 동안 지원서 2600여 장이 팔렸고, 680여 명이 실제로 지원해 2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씨는 “사회 진출에 대한 주부들 열망이 그만큼 뜨거웠다”며 “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말했다.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돈을 벌어보고 싶었고, 남편과 자식 앞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룬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서고 싶었다. 교사·간호사 친구 앞에서 괜히 주눅 들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더이상 싫었다. “일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 매일 신문 하단 취업 광고를 살폈다. 하지만 경력 없는 주부를 채용하는 곳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전화하면 “여자는 안 뽑는다”거나 “유부녀는 필요 없다”는 싸늘한 답변만 돌아왔다. 보험과 책 방문판매는 가능했으나 워낙 내성적 성격이라 당시엔 도전할 엄두를 못냈다.

그러던 중 현대자동차 대졸 부녀사원 영업직 모집 공고가 눈에 띄었다. 기왕 할 게 영업밖에 없다면 책이나 보험보다 자동차 팔아 돈이나 많이 벌자는 생각이었다. 이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자동차 한 대 팔아봐야 떨어지는 건 차값의 1% 정도밖에 안 됐어요. 400만원 짜리 차 팔아야 4만원 받았죠. 철부지 주부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요. 그때는 ‘하늘이 준 기회’라는 생각에 당장 현대차 계동 본사로 달려갔죠.”

 
97년 일간지에 실린 현대차 영업사원 모집 광고. 김화자(아래 오른쪽)씨 등 파리공원영업소 직원이 모델로 나왔다.
첫 차 판매를 망치다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보다 일할 수 있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남산타워호텔(현 반얀트리)에서 5일간 직원 교육 받을 때까지도 그랬다.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어요. 앞으로 펼쳐질 고난의 세월을 그때는 상상도 못했죠.”

입사 한 달 만에 꿈에서 깼다. 나와 보니 세상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하고 자란 그가 매일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영업이라는 게 그랬다. 항상 을(乙)이었다. 두 달에 한 번 새로 뽑아야 할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차를 못 팔았다는 거였다. 당시 선배들은 늦깎이 신입사원에게 ‘명함 걷어오기’를 시켰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업무 보고다. ‘이만큼 발로 뛰어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증거물이 명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숫기가 없는 탓에 이마저도 제대로 못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음식점 문 열고 들어갔다 그냥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죠.”

더 힘든 건 여자에 대한 편견이었다. 여자라고 무조건 무시하고 깔보는 시선 말이다. “여자가 아침부터 와서 재수없다”는 말을 부지기수로 들었고, 음식점에서는 “다시는 오지 말라”며 소금까지 뿌렸다. 현실은 너무 버거웠다. “화장실에 숨어서 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그냥 얌전히 애나 키울 걸,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후회막심이었죠.”

입사 3개월 만에 드디어 차를 팔았다. 아랫집 살던 지인이 소개해준 사람이 법인 명의로 프레스토를 2대 구입했다. 프레스토는 액센트 같은 소형차다. 경험이 없어서인지 첫 판매부터 대형 사고를 쳤다. 견적서를 원가보다 낮게 써서 고객에게 보낸 거다. 상사는 “차액을 책임져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김씨 두 달 월급을 통으로 내야 할 만큼 큰 금액이었다. 당시 차는 가장 싼게 400~500만원, 그의 월급은 15만원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혼나는 게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어요. 고객과 통화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죠.” 다행히 큰 문제 없이 해결됐다.

이날 이후 계약서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꼼꼼히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첫 계약의 실수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꼼꼼하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돌이켜보니 지금의 나를 만든 토대가 된 것 같아요.”

 
반려된 사표

위기는 이어졌다. 판매실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1년도 안 돼 한계에 부딪혀다. 일도 힘들었지만 애들이 더 큰 문제였다. “한번은 퇴근하고 집에 가니 첫째가 방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거예요.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 갖다줄 엄마가 집에 없으니 혼자 비 맞고 왔다는 겁니다. 이렇게 애들까지 내팽개쳤으면 밖에서라도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가는 곳마다 무시나 당하니.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첫째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엉엉’ 소리내서 울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냈다. 하지만 상사가 그를 말렸다. 난생 처음 한 일을 도중에 관두면 앞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며 설득했다. “인생 첫 도전에서 좌절하고 평생 낙오자로 살아갈 것인지, 불굴의 의지로 이겨낼 것인지 고민했죠.” 김씨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어요. 잘할 때 그만두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죠.”


2010년 1월 김화자씨는 여성 최초로 현대차 임원이 됐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에게 임명장 받는 모습.
자동차 업계 최초의 여자 지점장이 되다

그리곤 전략을 짰다. 무턱대고 아무 회사를 찾아가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걸 깨닫고는 인맥을 활용하기로 했다. 친구 소개로 알게 된 잠원동에 있는 한 기업교육원을 집처럼 드나들면서 사람을 사귀었다. 기업 대상으로 강의나 컨설팅을 하는 곳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차를 팔기보다 사람 사귄다는 생각으로 대했다. 차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만 하니 사람들이 경계를 먼저 허물었고, 한두 사람이 차를 구입하자 영업에 탄력이 붙었다. 이런 자세는 차를 팔 때보다 차를 판 후 더 빛을 발했다. 차 한 대를 팔면 열흘 후, 한 달 후에 꼬박꼬박 전화해 ‘차가 마음에 드는지, 고장은 없는지’를 물었다. 요즘은 회사 차원에서 만족도 조사를 따로 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팔고나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품질이 좋지 않아 잔고장이 많았으니 가급적이면 고객과 연락을 끊고 싶어하는 영업사원도 적지 않았다. 보통 차가 고장 나면 고객이 직접 공업사나 수리 센터를 찾지만, 김씨 고객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객 차에 문제가 있다고 할 때마다 가장 빨리 수리할 수 있게 도왔어요. 만약 쏘나타 바퀴에 이상이 있으면 공업사마다 전화해 부품 있다는 곳에 차를 입고시켰죠.”

이런 일이 하나 둘 쌓일 때마다 주변에서 ‘김화자만큼은 믿을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많은 남자 직원들이 차 팔기 전에는 술 마시며 ‘형님, 형님’ 하지만 막상 차 팔고난 후에는 연락 한 번 안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술 대신 세심한 배려를 한 거죠. 자주 연락하니 주변에 차 살 사람이 있으면 저를 먼저 떠올려주더라고요.”

고객 관리 중요성을 깨달은 후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입사 3~4년 만인 90년대 초반 팀 내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 고객관리프로그램을 사용했다. “당시 컴퓨터 한 대 가격이 80만~100만원, 고객관리프로그램도 100만원이 훨씬 넘었죠. 부담스러웠지만 투자할 가치가 분명 있다고 믿었어요.”

그렇게 남들보다 먼저, 다른 사람보다 빨리 고객관리에 공을 들인 게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운 좋게도 그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88년은 자동차 산업이 막 부흥할 때였다. 85년 자동차 100만 시대가 열렸다. 70년대 원유 파동과 80년대 초반 정치 불안으로 주춤했던 소비가 80년대 중후반에 활짝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거다. 특히 현대차는 88년 1월 자동차 100만 대를 수출하고, 국민차로 자리매김한 쏘나타를 출시하는 등 국내 최고 자동차 회사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자동차 산업이 활황이니 차 팔기가 수월했다. “잘 살게 되니 너도 나도 자동차 구매에 관심을 가졌어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고객한테 먼저 연락이 왔어요. 2년 정도 지나니 실적이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더군요. 잘할 때 그만두자고 결심했지만, 막상 잘하게 되니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대리 3년차 때였던 94년에는 한 번에 100대를 묶음으로 판 적도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단골 고객이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동차를 대량 구매한 거다. “그 해 다른 영업사원의 2~3배 성과를 냈어요. 많이 팔아야 100대 팔던 시절에 200대 판매를 기록했죠.”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대리 3년차 때 과장으로 특별 승진을 했다. 현대차 최초 여성 과장의 탄생이었다. 97년에는 자동차업계 최초로 지점장에 올랐고, 2010년 현대차 여성으론 처음으로 임원이 됐다.


커피 잘 타는 여자가 일도 잘 한다

얼핏 보면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다른 노력을 했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핑계는 대지 않았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입사 후 5년은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기도 했어요. 전시장 당직은 남자만 시켰죠. 자동차 판매가 급증할 때라 전시장에 나가만 있으면 2~3대 파는 건 기본이었으니 남자들이 실적 올리기가 훨씬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남녀차별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고 더 악착같이 인맥을 쌓아 나갔다. “돌이켜보면 이때 쌓은 인간관계가 초석이 돼 ‘최초’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됐어요. 그때 남자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했죠. 가만히 있어도 욕 안 먹을 정도로는 팔 수 있으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뛸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관리자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원래 술을 못먹지만 97년 목동 파리공원 지점장을 맡고는 술까지 배웠다. 또 밤늦게 술 많이 마신 회식 다음날에는 드럼통에 미역국을 끓여가 직원들과 나눠 먹었다. 이런 노력은 실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450개 지점 중에서 420위였던, 쉽게 말해 꼴찌에 가까웠던 지점을 100위권으로 끌어 올렸다. “상사는 직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 안 돼요.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죠.”

그는 지난해 현대자동차 자문역을 끝으로 27년간 현대차 생활을 마쳤다. 지금은 의류 사업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이 시대 여성들에게 조언했다. “상사가 커피 심부름 시킨다고 불평하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타도록 고민하는 사람이 되세요. 사소한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큰일도 잘합니다. 불평등을 방치하라는 게 아니에요. 생각을 바꾸면 나쁜 상황도 얼마든지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글=전민희·조한대 기자 skymini1710@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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