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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시계, 진화와 종말사이 ② 진격의 스마트 워치 … 중저가 시계 몰락 불러오나

영국 교육학자 켄 로빈슨 경이 2010년 테드(TED) 강연을 하다 갑자기 “25세 이상은 손을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관중들이 들었던 손을 내리자 그는 “지금 손목시계 찬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다시 요청했다. 신기하게도 처음과 두 번째 손 든 사람이 거의 일치했다.

로빈슨은 “손목시계 차는 걸 혹시 당연하게 여기느냐”고 물으며 “디지털 세상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시계를 안 찬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10대 딸에게 물었더니 시계는 시간 보는 기능밖에없어 쓸모 없다더라.” 로빈슨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게 결코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손목시계를한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시계업계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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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휴대폰을 손에서놓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시간만 알려주는 손목시계는 이제 쓸모없는 물건이 된 걸까. 게다가 스마트폰이 스마트워치란 이름으로 시계가 놓여있는 손목까지 정복하려 들고 있으니 과연 시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스마트워치의 등장

“원 모어 씽(하나 더 소개할 게 있습니다).”

지난달 9일 팀 쿡 애플 CEO가 애플워치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故)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바꿔놓은 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했던 방식 그대로 말이다. 그렇게 애플의 첫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년 초 제품이 출시되면 아이폰이 그랬던 것처럼 또 한번 세상을 요동치게 할 수 있을지 여러 전망과 분석이 쏟아진다. 경제 전문 통신사 블룸버그는 애플워치 발표 다음날 “아이폰 출시로 기존 휴대폰 강자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위기에 빠진 것처럼 애플워치가 시계산업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플린트 센터에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애플의 첫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를 발표하는 모습. 애플워치가 기존 시계 산업을 뒤흔들 것이란 전망이 많다. [사진 블룸버그]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스마트 워치라면 소니나 삼성도 이미 내놓지 않았나. 심지어 삼성의 스마트워치 시장 점유율은 지난 2분기에 73.6%(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나 차지했다. 그러니 단지 애플의 브랜드 파워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애플이 ‘스마트’가 아닌 ‘워치’(시계)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으로 본다.

삼성은 지난해 스마트워치 ‘갤럭시 기어’를 내놓으며 애써 시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몸에 착용하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접근했다. 이영희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마케팅팀장은 최근 베를린에서 “스마트워치는 시계가 아닌 기계”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미국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소니나 삼성 스마트워치는 언론의 주목은 받았을지언정 소비자에게 주려는 가치가 무엇인지 불분명해 정작 소비자 관심은 적었다”고 평했다. 삼성의 시장점유율이 현재는 높다해도 스마트워치 시장의 잠재력에는 못 미친다는 평일까.

어쨌든 애플은 달랐다. 애플워치가 시계라는 걸 분명히 했다. 애플워치는 아예 손목시계 용두(태엽 감는 꼭지)를 닮은 ‘디지털 크라운’까지 달았다. 사실 디지털 크라운은 줌, 화면 넘김 기능 정도 외에 특별한 기능은 없다. 하지만 이 작은 꼭지는 애플워치에 시계의 아날로그 감성을 더해줬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뉴욕타임스는 심지어 ‘애플워치가 시계 팬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라는 기사의 시작을 아예 ‘시계’(The Watch)라는 단어로 시작했다. 손목시계가 16세기 이후 조금씩 발전해왔지만 애플은 하루도 되지 않아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일한 시계로 등극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삼성과는 다른 애플의 이같은 전략은 이미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올해 태그호이어 글로벌 영업·판매 담당 임원 패트릭 프루니오를 영입하는 등 시계업계와 패션업계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영입했기 때문이다.

과연 애플워치가 스위스로 대변되는 기존 시계시장을 얼마나 위협할까. IT매체인 애플인사이더는 미국 투자회사 BMO캐피탈을 인용해 애플워치는 2015년까지 1200만 대가 팔릴 것이라고 추산했다. 대략 4조3000억원 규모로, 스위스 한 해 시계 수출액(25조원)의 20%에 육박한다. 시장조사업체 캐널리스가 추산한 2015년 전체 스마트워치 시장 규모 2820만대에 비춰봐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현재 손목에 차는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무려 85개나 출시돼 있기 때문이다.

결코 터무니없는 숫자가 아니다. 한국에서의 관심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평소 답답해서 손목시계를 차지 않는다”며 “간편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다보니 여러 기능이 잘 섞인 제품을 사는데 스마트폰 기능을 다 구현하면서 디자인도 제법 괜찮으니 애플워치에 관심이 간다”고 했다. 직장인 김현정(33)씨도 “기존 스마트워치와 달리 남성성이 그닥 강하지 않아 관심이 간다”며 “스스로 시계에 지불하는 마지노선을 30만원대로 잡고 있는데 애플워치가 딱 그 가격대라 더 사고 싶다”고 했다.

① 체 게바라와 롤렉스-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는 늘 롤렉스를 찼다.
② 케네디 부부와 까르띠에-스타일 아이콘이었던 케네디 부부는 평소 까르띠에 시계를 즐겨 착용했다. 재클린은 결혼 4주년 선물로 케네디 대통령에게 까르띠에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댈러스에서 암살당할 당시 차고 있던 시계다.
③ 실베스타 스탤론과 파네라이-직접 이탈리아 피렌체 매장에서 샀다는 다이버용 파네라이 시계. 스탤론은 이 시계를 영화 ‘데이라잇’과 ‘람보4(사진)’에 차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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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시계, 기계식 시계 시장을 반토막내다

일부에선 애플워치 하나로 기존 시계시장이 위협받는다는 전망은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1969년 일본 시계회사 세이코가 세계 최초로 전지로 가는 전자시계(쿼츠) 아스트론을 내놓았을 당시를 떠올리면 애플워치의 도전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세이코가 기계식 시계보다 얇으면서도 시간은 훨씬 정확하게 알려주는 전자시계를 출시하자 스위스 시계 산업은 위기에 빠졌다. 한상곤 코트라 취리히 무역관장은 “70년대 1600여 개에 달하던 시계 제조회사는 80년대 1000여 개가 도산하며 600여 개로 줄었다”며 “세계 시계시장에서의 스위스 시계 비중도 43%에서 15% 이하(현재는 54%)로 떨어졌을 정도로 전자시계 등장의 충격은 컸다”고 말했다.

전자시계의 등장으로 16세기 이후 이어오던 기계식 손목시계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게 아니냐는 비관도 속속 나왔다. 해밀턴이 70년 숫자로 시간을 보여주는 첫 디지털 시계를 내놨을 때만 해도 무려 2100달러라는 고가라 시장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고장 문제까지 불거져 실제로 상업적인 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74년 카시오에 이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가 75년 20달러짜리 디지털 시계를 내놓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러나 스위스 시계업계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주요 시계회사가 휘청이자 채권단이었던 스위스 은행들은 81년 스위스 컨설팅회사인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의 니콜라스 하이에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등장한 게 하이에크 리포트다. 전세계 시장과 소비자 심리를 분석한 후 내린 결론은 세계 시계시장 90%가 저가 시장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스위스 시계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스위스 몇몇 시계회사를 합병해 스와치 그룹을 만든 후 83년 자신의 보고서를 토대로 저렴한 가격에 패션 코드를 담은 플라스틱 시계를 만들어 냈다. 바로 스와치다. 세컨드 워치(두번째 시계)라는 의미, 다시 말해 값비싼 예물시계 하나쯤 있어도 재미 삼아, 또는 패션 아이템으로 하나 더 사는 시계라는 컨셉트로 소비자를 공략했다. 첫 출시 가격은 50스위스프랑(한화5만5000원). 가격 경쟁력은 확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와치의 전 세계적인 빅히트로 스위스 시계 산업은 도산 위기에서 탈출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시계산업을 호령하는 강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휴대폰, 손목시계를 무용지물 만들다

배터리로 가는 전자시계의 등장은 기계식만 고집하던 스위스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사실 전체 시계업계를 패닉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이때만해도 누구나 당연히 손목시계를 차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계가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수동이냐 배터리냐, 아니면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휴대폰의 대중화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손목시계가 필수품의 지위를 내어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을 확인하려고 손목시계를 찰 필요가 없게 됐다. 휴대폰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재밌는 조사 결과가 있다. 시장조사회사 트렌드리포트가 국내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손목시계를 차고 있어도 대부분(65%)이 휴대폰으로 시간 확인을 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은 24%에 불과했다. 손목시계를 차는 사람조차 시계를 시간 보는 기능으로 쓰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휴대폰의 등장은 좀더 오래 됐지만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건 97년 비교적 저렴한 고주파대역 이동통신서비스인 PCS폰 등장부터다. 이때부터 전 국민의 휴대폰 보유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건국대 범 교수는 “휴대폰 대중화로 사람들은 더 이상 시계가 필요없게 됐다”고 했다. 특히 2007년 애플의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시간 확인만 하는 시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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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스포츠, 과시, 그리고 시계

그런데 이상하다. 스마트폰 시장의 급성장에도 시계는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성장하고 있다. 90년대 스위스 시계 수출액은 50억 달러(5조원) 수준을 유지했으나 2000년대 이후 급성장을 거듭해 지난해 236억 달러(23조6000억원)까지 늘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내 시계 매출은 2조3000억원으로 2008년 대비 3배 이상 성장했다. 시계의 주된 기능은 시간 확인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데 시계산업의 급성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여기엔 시계회사의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시계를 시간 확인하는 도구에서 전혀 다른 상징을 지닌 물건으로 재해석해 내놓은 거다. 소비자에게 끊임없이 시계는 자기 표현을 위한 도구라는 이미지를 주면서 말이다.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과 교수는 “시계란 내가 누구라는 걸 결정지어 주는 물건”이라고 했다. 남성복 디자이너 정두영 실장(반하트 디 알바자)도 “특히 남자에겐 시계는 사회적 지위와 격식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했다. 사실 이런 말은 시계회사가 늘 하는 말이다. 까르띠에 인터내셔날 스타니슬라스 드 케르시즈 회장은 늘 “시계는 당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깃발”이라거나 “시계는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믿는지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반복한다.

시계가 부를 나타내는 과시재라는 얘기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연구교수는 “휴대폰이 이미 시계의 시간 확인 기능은 대체했다”며 “시계는 이제 보석처럼 자기를 과시하는 기능이 더 크다”고 했다. LG경제연구원 김나경 책임연구원도 “시계는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마지막 남은 수단”이라고 했다.

전통적인 고급 예물용 시계인 롤렉스뿐 아니라 수천만원, 아니 수억원짜리 하이엔드 남성용 시계가 불황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고 다이버·항공·레이싱용 스포츠 시계가 점점 럭셔리를 지향하는 데는 다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시계의 기능은 이제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라. 심해 몇 백 미터 방수 기능에 엄청난 압력에도 견디는 내구성, 동시에 여러 계측까지 가능한 기능이 필요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하지만 그런 시계가 손목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이버와 레이싱을 즐기는 돈 많고 쿨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확실히 줄 수 있다. 시계가 여성에게는 패션으로 다가갔다면 남성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채널로 접근한 셈이다.

자, 지금까지는 스위스 시계회사의 전략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스위스의 메이저 시계회사 일부는 애써 스마트워치의 위협을 무시한다. 하지만 태그호이어는 거꾸로 2015년 스마트워치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발표했다.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니콜라스 하이에크(왼쪽 사진) 스와치그룹 회장은 생전 양 손목에 시계 8개를 차고 다녔다지만 보통 사람에게 허락되는 시계는 오직 하나다. 과연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흥미진진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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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