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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고 백지상태에서 만나 서로를 배워라

존 롭 수제화 공방에서 작업 중인 안느-샤를로트 이베르 작가(오른쪽 작은 사진)와 그가 가죽의 장력을 부각해 만든 ‘산 죽은 공장’(2013).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옛 것을 알면 새것도 안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에르메스는 어떻게 전통과 현대를 접목했나

하지만 만만치 않다. 옛 것과 새것이 만나는 것부터 그렇다. 막상 만나도,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길이 다르고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77년의 전통을 가진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이 지점에 주목했다. 전통과 현대는 만나야 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2008년 설립된 에르메스 재단(이사장 피에르-알렉시 뒤마)이 2010년부터 시작한 ‘법고창신’ 프로젝트다. 매년 세계적인 작가 4명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거쳐 4명의 젊은 작가를 선발한다. 이들은 각자 다른 에르메스 공방에 머물며 최고의 장인들로부터 제작 기법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습득한 노하우와 최고의 소재를 활용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든다. 장인들은 옆에서 작가를 돕는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16명의 작가가 16점을 내놨다. 다른 분야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배려, 전통의 계승, 창조의 정신이 모두 한데 ‘응결’된 결과다. 2013년 여름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시작된 전시 ‘컨덴세이션(Condensation·응결)’이 도쿄를 거쳐 서울에 입성했다. 10월 2일부터 11월 30일까지 서울 신사동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지하에 새로 마련된 전시장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다. 이들은 전통에서 어떻게 미래를 찾아냈을까. 문화융성을 꿈꾸는 우리가 이 전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오유경 작가의 이야기
서울시립대에서 조각을 공부한 오유경(35)씨는 2002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파리로 날아갔다. 나이 제한이 있는 프랑스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학시험 통과를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했다.

“전공 학과가 없고 특정 선생님 문하가 되어 배우는 도제식이에요. 선생님이 안 받아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럼 다른 선생님을 찾아가야 하죠. 입학해보니 좋은 점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교수님, 학생들과 다 함께 상의해서 결정한다는 것이었어요. 적절한 재료를 거의 무료로 제공받고 기술 담당 선생님의 지도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죠.”

세계적인 작가 주세페 페로네의 지도학생이 된 그는 삶의 순환을 바람이나 빛, 중력 같은 비물질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다. 파리 8대학에서 조형예술 석사 과정까지 동시에 마치고 국내외 레지던시를 전전하던 그에게 주세페 교수는 “에르메스에 추천할 테니 포트폴리오를 보내라”는 메일을 보냈다. 2012년 7월부터 3주간의 워크숍이 시작됐다. 선정 작가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제가 가게 된 곳은 퓌포카 공방이었어요. 은(銀)기구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죠. 30년 이상 숙련된 장인들이 12분 정도 계셨습니다. 처음 가서는 줄질부터 해야 했어요. 하루에 100개~200개씩 제품을 다듬었죠. 그런데 이 줄질이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더라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모든 제작 과정을 보고 참여했다. 34년간 숙련된 장인 파트릭 큐로트가 그를 인도했다. 넓다란 은판에 열을 가해 구부리고, 접고, 잘라내 포크와 나이프, 각종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 신기했다. 아카이브에서 다양한 자료를 찾아 공방의 역사도 열심히 공부했다.

“제품 하나를 똑같이 복제하는 게 과제였어요. 저는 체스의 킹 조각을 만들었는데, ‘여기 취직하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귀국해 두 달 여의 작업 구상을 마치고 다시 공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생각한 것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탑’이었다. “은이라는 금속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담겨있어요. 또 조상님들은 정화수를 떠놓고 달에게 빌었고, 산길을 가다가 돌무더기에 돌을 얹으면서도 행복을 기원했죠. 그런 의미를 기하학적 모양의 블록을 만들어 탑처럼 쌓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제작 기간은 3개월이었지만 두 배가량 늘어났다. 그가 처음 보여준 종이 모형을 본 파트릭의 첫 마디는 이랬다. “이런 건 한 번도 안 만들어봤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황동으로 삼각 기둥, 사각 기둥, 원기둥의 형태를 만들고 일일이 은도금을 했다. 도금 기법은 다른 공방에 가서 따로 배웠다. 황동을 밀봉한 채 은도금을 하면 폭발하기 때문에 마지막 뚜껑 부분은 은도금을 한 뒤 용접을 하고 줄질로 하나하나 다듬어야 했다. 그렇게 은도금 블록 탑 두 세트를 만들었다(하나는 에르메스가 보관하고 하나는 작가가 소유한다).

“같이 작업하면서 서로 시너지를 얻었어요. 파트릭이 ‘(안 해본 걸 하니) 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고 말해줄 때 참 고마웠어요. 무뚝뚝한 프랑스 중년 남자에 대한 인상이 그때 바뀌었죠. 평생 친구를 얻은 느낌이랄까. 이번 작업을 통해 ‘작가는 평범한 오브제를 예술로 만드는 연금술사’라는 평소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내한한 작가들의 공방 경험담
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오씨를 포함해 총 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영국 출신 엘리자베스 클라크는 퍼포먼스와 사운드 작업을 해온 작가지만 사야 가죽공방에 배치됐다. 그가 이곳에서 바느질 하는 장인들의 팔 동작과 가방의 두툼한 원형 손잡이에 주목했다. “두 팔을 커다란 원처럼 움직이는 게 에르메스 특유의 기법인 ‘새들 스티치’를 구사하는 모습이었어요. 이것을 거대한 원형 가죽조각으로 만들었죠. 장인 50명과 함께 하는 멋진 체험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가죽을 단단하게 감싸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죠.”

여성의 몸을 크리스털 작품들로 표현해낸 마리-안느 프랑크빌은 생-루이 크리스털 공방에서 기법을 공부하다가 지금은 사실상 사장된 몰딩 기법에 착안했다. 몰드를 이용하는 기법의 전승자인 피에르와 함께 공방 구석에서 마침내 18세기에 쓰던 몰드를 찾아내 작품에 활용할 수 있었다. “제가 찾아낸 엉겅퀴 무늬 몰드를 보더니 피에르도 ‘처음 본다’며 신기해 하더라고요.”

수채화를 공부한 가브리엘레 키아리는 텍스타일 공방에 갔다. 그는 이곳에서 씨줄과 날줄로 엮은 천 위에 염색을 한 뒤 씨줄을 빼고 새로운 줄을 집어넣는 ‘더치스 새틴’ 공법을 배워 작업에 활용했다. “그전까지 종이 작업만 했는데 이제 비단 작업까지로 영역이 넓어졌다”고 귀띔했다.

콜롬비아에서 온 안들레스 라미레즈는 무용수이자 음악가이기도 하다. 역시 텍스타일 공방을 찾은 그는 엄청난 이미지가 들어있는 아카이브의 규모에 우선 놀랐고 그런 이미지가 컴퓨터에서 고르면 천으로 짜여 나오는 시스템에 다시 놀랐다. “이전까지 조각 작업을 많이 했는데 실크 공방 이미지들 덕분에 회화 감각이 아주 좋아졌다”는 게 그의 소감이다.

또 생-루이 크리스털 공방에 다녀온 올리비에 세베르는 입으로 유리를 불어서 만드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고, 아르덴느 가죽 공방에 있었던 시몬 부드뱅은 인근 채석장을 다니며 버려진 돌에 대해 장인들과 이야기하다가 버려진 가죽의 의미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들려주었다.

카트린느 츠키니스의 이야기
에르메스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지금은 이사로 있는 카트린느 츠키니스는 경력이 다채롭다. 무용가이자 안무가로 활동해온 그는 박사과정에서 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프랑스 문화홍보부에서 각종 정부 정책을 수립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는 “무용을 하면서 완벽한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부단한 연습을 하는 게 어릴 적부터 몸에 배있다”며 “무용은 음악적 센스와 미술적 감각까지 필요한 장르로 그 과정에서 다른 예술을 많이 접했고 또 공무원으로서 예술 지원 정책을 많이 연구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정의한다’는 에르메스 재단의 기본 정신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서 ‘행동’이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 축적된 노하우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둘째로 창의적 활동을 지원한다는 것, 셋째로 갖고 있는 기술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장인들 노하우의 발전적 전승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그런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떻게 진행되나.
“우선 장인 정신에 대한 이해가 높고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작가에게 추천을 의뢰했다. 수잔나 프릿셔, 리처드 디콘, 엠마뉴엘 소니에, 주세페 페노네가 그들이다. 이들이 1~3명을 추천하면 재단에서 심사를 통해 총 4명을 선정한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지를 본다.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하기 때문에 프랑스어도 능통해야 한다.”

전통 장인과 현대 작가가 공감대를 이루기란 쉽지 않을 텐데.
“맞다. 장인은 매번 같은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젊은 작가는 매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 두 세계는 정말 다른 세계다. 그래서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떻게.
“우선 현대 작가는 장인에 대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이라는 존경의 마음을 갖고 다가가도록 했다. 각 공방에 도착한 작가들은 2~3주간 장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관찰하고 기법을 체험한다. 둘째로 공방에 갈 때 미리 작품 구상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미리 생각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원천봉쇄하고 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그럴 경우 장인과 작가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교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3주간의 시간에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가능성을 찾는 기간으로 삼고 있다.”

이 시스템은 누가 생각했나.
“3주간의 관찰 단계는 피에르 알렉시 이사장이, ‘백지화 상태’는 내가 고안했다.”

다음 단계는.
“구상한 작품 제작이 과연 가능한지 함께 논의한다. 확정이 되면 공방에 자리를 만들고 제작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비행기표·주거비·식비·교통비·재료비·제작비 등이 다 지원된다. 이들의 작업 과정은 화보집과 DVD로 만들어진다.”

작가들의 아이디어가 제품으로도 활용되나.
“전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메세나 활동이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장인은 젊은 작가들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작가들 역시 전통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이들이 함께 도전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의식을 갖게 됐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재단의 예술지원 활동이 다양하다. 한국에서의 향후 계획은.
“컨템퍼러리 아트를 지원하는 전시공간이 전세계에 6개(브뤼셀·도쿄·뉴욕·싱가포르·서울·베른) 있다. 한국에서는 젊은 현대미술 작가를 위한 에르메스 미술상(Misulsang·독특하게 한국어를 영어로 표기한다)이 올해로 15회를 맞았다. 내년부터는 더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 코리아 Photo Tadzio©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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