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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결과 기대해도 되나” 묻자, 최용해·김양건 ‘끄덕’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오른쪽에서 둘째) 등 북한 최고 실세 3명이 4일 인천 영빈관에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에서 둘째) 등 우리 측 관계자들과 오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인천=뉴시스]
휴일에 이뤄진 북한 최고실세 3인방의 전격 방남(訪南)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였다. 지난 8월 우리 정부의 고위급 회담 제안에 묵묵부답하던 북한이 4일 인천을 전격 방문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을 통해 두 달 가까이만에 답을 내놓은 것이다. 10월 말이나 11월 초 사이에 2차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자는 화답이다. 이로써 지난 2월 판문점에서의 첫 고위급 회담 합의에도 불구하고 줄곧 대립각을 세워온 남북한은 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 테이블에 마주앉게 됐다.

[남북 ‘인천 회담’] 성사 배경과 전망은

이에 따라 남북관계는 차차 복원 수순을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4일 접촉 때 양측 분위기는 밝았다. 오전 11시 인천 오크우드호텔에서 이뤄진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북측 일행의 티타임에선 김양건 노동당 비서(통일전선 담당)가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되겠나”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용해 비서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오후 1시50분 시작된 오찬회담 때는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고위급 접촉으로 봐도 되나”고 묻는 기자에게 “접촉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해 이날 만남을 정부가 남북 간 고위급 공식회동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통일부는 회담 종료 2시간 만인 5시40분 합의 내용을 언론에 발표하는 등 만족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앞으로 2차 고위급 회담의 개최를 비롯한 남북 관계의 로드맵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하는 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조문단 파견 두 달 뒤인 2009년 10월 남북은 싱가포르에서 비밀접촉을 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북한이 불만을 품고 회담 내용을 일방적으로 왜곡·폭로하면서 더 큰 파국을 맞았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총정치국장을 파견했다는 건 관계개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의미”라며 “남북 간 경색을 풀 절호의 기회를 살려가기 위해 우리 정부의 대북라인이 지혜롭게 대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전 물밑 교섭 없이 전격 방문
황병서 일행의 남한행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방문 하루 전인 3일 인천 아시안게임에 참가 중인 북한 대표단 고위인사를 통해 청와대 국가안보실 측에 ‘고위급 방문’ 의사가 극비리에 타진됐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최용해·김양건 당비서가 포함된 명단을 보고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부처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사전에 남북 간에 물밑 접촉이나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설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정부는 “대북관계에서 투명성을 강조해온 박근혜 정부에서 북한과 비밀접촉은 없다”고(정부 고위 당국자) 선을 긋는다. 김양건 당 비서도 남측 대표단과의 오찬 환담에서 “불시에 오게 됐다. 급히 관심 갖고 수고해주신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극히 몇몇 정부 당국자만이 황병서 일행의 방문이란 감을 잡고 준비작업을 지휘했다고 한다. 통일부는 북한 측의 인천공항 도착 2시간여 전인 4일 오전 7시27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각 언론사에 “오전 9시 남북행사 관련 발표”라고 알렸다. 그러면서도 “사정상 그 내용은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9시 브리핑 때엔 ‘고위 대표단’으로 표현됐던 황병서 일행은 오전 10시54분 언론 공지 때 ‘북측 대표단 방문행사’로 수정됐다. 또 ‘남북대표단 오찬회담’으로 정부가 명명하겠다고 밝히면서 김관진 안보실장과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회담으로 성격이 최종 규정됐다. 북한의 제의가 있던 3일 오후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까지 열었지만, 임박해서까지 미세조정이 필요할 정도로 서둘러 준비됐다는 것이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자신의 권력을 떠받치는 세 사람을 남한에 파견한 건 다급한 북한 상황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다. 집권 3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정권은 핵·미사일 도발로 인해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했다. 방북한 미국인 3명을 장기 억류하며 대미 인질극까지 벌였지만 워싱턴은 꿈쩍 않고 있다.

최대 후견국을 자처해온 중국도 김정은의 핵실험에 대응한 국제제재에 동참했다. 이에 반발해 북한이 시진핑 체제를 겨냥한 비난전까지 펼치다 보니 중국 지도부도 냉랭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최근 이수용 외무상을 유엔에 파견하고, 유럽 등을 무대로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피랍 일본인을 카드로 내세운 북·일 교섭도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지난주 5만t의 식량을 원조받았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1월 초 신년사에서 ‘북남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강조했던 김정은은 아직 대남 접근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2월 첫 고위급 회담에 따라 이산상봉까진 진행했지만, 3월 말 북한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명 비난을 재개하면서 다시 꼬였다.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제안(3월 28일)을 거부하고, 한·미 군사훈련 비난과 대북전단 살포 중단 위협 등의 대남전술을 구사했지만 우리 정부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권공세로 북한을 압박하고 나섰다.

그러다 인천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김정은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응원단 파견을 공언했다. 이를 통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의 ‘북한 바람’을 재연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하지만 12년 사이 남한은 정권과 국민여론 모두 확 바뀌었다.

결국 체류비용 등에서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응원단 파견이 무산되고 말았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하반기 남북관계 주도권 잡기의 기회로 여겨졌던 아시안게임을 그대로 놓칠 상황에서 북한이 막판에 부여잡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시안게임이 대화 국면 전환 계기
황병서를 비롯한 3인방의 파견은 절묘한 인적 구성이란 지적이 나온다. 황병서는 지난해 12월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 전 국방위 부위원장 처형 이후 2인자에 오른 최고 실세다. 김정은은 최근 완공한 평양방직공장 기숙사로 황병서를 보내 여공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격려토록 하는 등 ‘대리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과거 북한은 총정치국장을 미국(2000년 조명록), 중국(2013년 최용해)에 특사로 보낸 전력이 있다. 이번엔 황병서를 대남특사로 파견한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양건 당 비서는 발언 곳곳에 “우리 총정치국장께서 오셨다”며 각별히 예우했다.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북한의 국호(國號)가 새겨진 전용기를 황병서 일행에게 사용토록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용해 당 비서는 숙청된 장성택이 갖고 있던 국가체육지도위원장 자리에 최근 올랐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참석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북한 선수단을 격려하고 폐막식에 참석하는 데 가장 적합한 직함이다. 대남 총책인 김양건 당 비서의 경우 남한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대표단에 발탁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오찬회담 등에서 “총정치국장 동지의 승인을 얻어 말하겠다”며 황병서를 치켜세우면서도 실제 대남 관련 발언을 주도했다.

당초 황병서 일행이 김정은의 친서를 가져왔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은 김기남 비서를 단장으로 한 조문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한 청와대 방문을 요구했고, 일정을 하루 연장해 결국 만났다. 그때 김정일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일행은 조문단에서 특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번엔 친서는 없었다는 게 정부 당국의 설명이다. 다만 대남 메시지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도 이뤄지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오찬회담 때 우리 측이 북한 대표단의 청와대 예방 계획이 있다면 준비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전했다”며 “그러나 북한은 이번엔 폐막식 참석을 위해 온 것이며 시간 관계상 어렵다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메가톤급 고위인사의 남한 방문이 폐막식 참석과 오찬회담만을 위한 것이라 보기엔 무리란 지적도 있다. 남북회담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2차 고위급 회담의 속개 같은 사안은 판문점 전화통지문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특사급에 해당하는 방문에 걸맞은 비중 있는 현안이 논의됐을 것이란 얘기다.

상호 의중 감 잡을 수 있는 좋은 자리
우리 측은 이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사업과 드레스덴 선언 등 박 대통령의 대북 구상을 설명하는 자리로 삼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북한은 5·24 대북제재 조치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관심사를 제기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은 “이번 회담은 특정 현안을 논의하고 해결하기 위한 협의 자리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북한 대표단의 방문 의도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우선 김정은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간의 정상회담 결과물인 10·4 선언 기념일에 고위 대표단을 내려보낸 건 합의 이행을 남측에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극렬한 대남 비난을 퍼부으면서 대화 제의를 내놓는 건 우리를 얕잡아보는 행위로 북한의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4일 아침에도 박근혜 대통령을 ‘괴뢰집권자’로 표현하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김정은의 건강이상설을 잠재우려는 ‘바람잡기’란 진단도 있다. 그렇지만 정부 당국은 “김정은 와병설에도 불구하고 최고실세 그룹이 평양을 비울 수 있다는 건 북한 체제에 문제가 없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남북 고위급 회담 재개 합의 정도는 김양건 혼자 해도 될 사안임에도 서열 2,3위가 함께 왔다는 점, 평소 김정은에게만 붙는 경호원들이 황병서 중심으로 따라붙었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익명을 원한 한 교수는 “권력서열 2~4위가 동시에 평양을 비운 건 보통 일이 아니다”며 “김정은 건재 과시보다 황병서의 실력 과시용이라는 인상마저 준다”고 말했다.

황병서 일행은 12시간의 남한 체류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대북 기류를 체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의 대북·안보정책을 보좌하는 김관진 안보실장과 김규현 안보실 1차장, 홍용표 통일비서관을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다. 여기에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한기범 국정원 1차장까지 합류했다. 우리 정부도 황병서를 비롯한 김정은의 최측근과의 만남을 통해 북측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향후 대북접근법을 그려볼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란 평가다.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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