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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왕' 빌 그로스 핌코 떠나 야누스로

한 인물이 움직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채권왕(Bond King)’으로 통한 사람이다. 그가 돌연 소속사를 옮긴다고 선언했다. 순간 수조원에 이르는 뭉칫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독일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장면 같다.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람을 쫓아 가는 듯하단 얘기다.

주인공은 바로 빌 그로스(70)다. 그는 자금 2조 달러(약 2120조원)를 운용하는 미 자산운용사 핌코의 설립자 겸 대표 펀드 매니저였다. 채권전문 자산운용업계에서 핌코만큼 돈을 굴리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한 주 전에 그는 “핌코를 떠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새 둥지는 야누스란 자산운용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이달 1일 “그로스의 이적으로 미 국채시장과 남미 환율이 일시적으로 요동쳤다”고 전했다 . 그가 맡고 있던 핌코의 토털리턴펀드에선 1주일 새 거금이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9월 한 달 동안 토털리턴펀드 자산이 235억 달러 이상 줄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독일계인 도이체방크는 “그로스 사임 이후 2년 사이에 핌코에서 빠져나갈 자금은 2600억 달러(약 270조원)를 넘을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핌코의 운용자산은 2조 달러다. 어림잡아도 10% 넘는 돈이 이탈한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펀드런(Fund Run)’이라 해도 될 만하다.

돈의 세계는 잇속과 빠른 셈이 지배한다. 돈이 한 인물이나 회사에 정을 주지 않는 까닭이다. 전설적인 펀드매니저인 피터 린치가 1990년대 피델리티마젤란펀드를 떠날 때도 이처럼 뭉칫돈이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핌코 이사들이 충격에 떨고 있다. 돈의 세계에선 ‘자금이탈’이라 쓰고 ‘죽음’이라 읽는다. 그들은 그로스 쇼크를 예상하지 못 했다. 애초 그들은 그로스를 제거해도 뭉칫돈이 이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궁정반란 벌이듯이 ‘해고’ 또는 ‘퇴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그로스를 압박했다.

핌코는 ‘그로스에 의한, 그로스를 위한, 그로스의 회사'나 다름없었다. 1971년 그가 앞장서 설립했다. 이후 40여 년 사이 핌코를 한 금융회사의 부서에서 세계 최대 채권전문 자산운용사로 키웠다. 그로스의 투자 철학과 전략에 의존해서다.

왜 핌코는 그로스를 내치려 했을까. 월스트리트저널(WS)과 블룸버그 통신은 “그로스가 선글라스를 끼고 투자자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등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행동을 해 이사회가 사퇴를 압박했다”고 전했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다. “‘그로스의 투자 철학과 전략의 쓸모가 다했다’는 핌코 내부자들의 인식이 진짜 이유”라고 로이터 통신 등이 전했다.

실제 그로스가 돈을 잘 벌던 시절엔 신경질적인 말이나 일탈 행동을 비판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마침 그의 수익률이 시원찮았다. 그 바람에 투자자들이 그의 펀드에서 돈을 꾸준히 빼냈다 1년 새에 700억 달러 정도가 줄었다. 투자자들의 비판 목소리가 커졌다. “그로스의 실제 능력은 그저 그런데 연봉은 터무니없이 높다”는 말까지 나왔다.

핌코 이사회는 결단해야 했다. 로이터는 “핌코 이사회가 투자자 이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그로스를 사실상 축출했지만 더 많은 뭉칫돈이 빠져나가 당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악수를 둔 셈이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미 펀드 평가회사는 “그로스 사임 이후 핌코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거대 공무원 연기금인 캘퍼스 등은 “그로스 이탈이 낳은 파장을 가늠해보고 있다”고 발표했다. 여차하면 핌코에 맡긴 돈을 빼내겠다는 신호다.

돈이 그로스와 정들었단 말인가. 결코 아니다. 그로스의 존재가 곧 투자의 역사다. 그는 이른바 ‘알파(Alpha) 혁명가’로 불린다. 알파는 투자 수익 가운데 시장 평균을 웃도는 부분이다. 투자컨설턴트인 피터 번스타인은 『투자아이디어』란 책에서 “그로스는 ‘금융시장에서 아무리 잘해도 시장 평균 수익밖에 얻지 못한다’는 통설을 뒤집었다”며 “특히 그는 주식시장보다 규모가 커 초과 수익을 내기 어려운 채권시장에서 알파를 거둬들였다”고 설명했다.

그로스의 비결은 시장이 정상에서 벗어난 순간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미 국채 가운데 만기 3개월 짜리가 1년짜리보다 비싸진 비정상적인 상황이 됐을 때 그는 투자에 나선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마이런 숄즈 시카고대 교수는 “그로스는 비정상적인 시장이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값이 싼 자산을 사들여 높은 수익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로이터는 “그로스의 능력은 2008년 금융위기 전후 더욱 빛났다”며 “덕분에 핌코 자산은 2006년 5000억 달러 정도에서 올 8월 말에는 2조 달러로 4배 정도 불었다”고 전했다. 자산운용사는 투자자가 많은 돈을 맡겨야 돈을 번다.

돈의 세계에서 과거 성공이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로스가 야누스로 이적하면서 핌코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야누스 등 군소 운용사로 이동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채권시장에서 핌코의 독주체제가 해체되고 있다고 보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채권시장에 빅뱅이 예고됐다는 얘기다.

이제 관심은 그로스의 2막 인생이다. 그가 알파 혁명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핌코 독주체제 붕괴가 역설적으로 그로스에 장애가 될 전망이다. 펀드 매니저들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투자 수익은 평준화되는 게 금융시장의 법칙이어서다. 게다가 투자전문 알파매거진은 1일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말을 빌려 “그로스 나이 이제 일흔”이라며 “그에게 새로운 영감이나 전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평했다. 그로스의 인생 2막은 혁명가의 삶보단 관리자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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