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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당정치가 죽어간다

비단 국회가 공전된다고 해서 위기라 부르진 않는다. 권한을 위임받은 정당과 국회의원이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본말전도를 걱정하는 것이다. 국민이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하는 순간은 이미 늦다. 정치판을 떠난 원로들이 후배 정치인들에게 주는 진심 어린 정치 훈수를 모았다.

8월 29일 오후 국회의사당을 견학 온 중학생들이 텅 빈 본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


올해 초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우연의 일치 중 하나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전설적 팝그룹 비틀스의 1963년 11월 22일 행적을 들었다. 이날 케네디는 텍사스주 댈라스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이곳에서 8천㎞ 떨어진 영국에 있던 비틀스는 팝음악의 진로를 영원히 바꿔놓은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etles’를 발표했다. 비틀스는 한 달 전 기념비적인 싱글 앨범 ‘I Want to Hold your Hand’도 출시했다.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앨범에 담긴 음악들은, 케네디 사망으로 절망에 빠진 미국인들이 엄청난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이 잡지는 해석했다. 비틀스 음악이 충격에 빠진 미국을 구했다는 설정이다.

한국도 그런 기적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 4월 16일 단군 이래 최대 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침몰에 이어 국론은 사분오열되는 등 나라가 지리멸렬하다. 다들 자기 목소리만 낼 뿐 상대방의 얘기에는 귀를 닫는다. 정치권은 갈등을 양산하고 극한 대립만 일삼는다. 대의제와 다수결이 작동하지 않다 보니 국회가 입법 기능을 상실한지 꽤 됐다. 그러니 한국 성인 8명 중 1명은 우울증을 경험할 정도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2008년 7월~2010년 5월 재임)의 요즘 화두는 ‘정당’이다. 복잡하게 뒤엉킨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푸는 단초를 정당 개혁에서 찾고자 한다. 그에게 정당의 존재감은 지금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더욱 뚜렷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당이라는 울타리가 국민 여론을 대변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결사체 기능을 했다. 또한 정치인은 물론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고 신장하는 교두보 역할도 했다.

그랬던 정당이 민주화가 이뤄진 21세기에는 오히려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그는 느낀다. 정당이 국민의 다양한 여론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변화무쌍한 사회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현실을 둘러보면 정당이 국회에 짐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론이 제기하는 정책 현안은 정당을 거쳐야 국회에서 입법화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종 현안이 왜곡되거나 변질된 채 국회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어떤 건 아예 국회의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다. 불필요한 내용을 걸러내고 정리해서 국회에 전달하는 정당이 이제는 스스로가 걸림돌이 돼가는 게 아니냐고 김 전 의장은 반문한다. “이러다가는 정당 때문에 대의민주주의에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이렇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민의가 국회로 직행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수단은 앞으로도 더욱더 확산되게 마련이다. 영역을 확대하는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와 충돌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때 행동이 둔한 정당 때문에 대의민주주의가 궁지로 내몰리게 된다.

‘정당민주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이자 보루’라는 말은 20세기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이다. 21세기는 정당의 존재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로 직접 전달된다. 국회 기능이 더 날렵하고 확장돼야 한다. 이런 시대 흐름에 뒤처진 정당은 국회의 기능마저 제약한다는 게 김 전 의장의 지론이다.


정당민주주의가 저문다

7월 15일 세월호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별법 입법청원 서명지를 국회의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의 정치 난맥상도 이런 프레임을 통해 분석이 가능하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5월 2일 이후 국회 처리 법률안 건수는 ‘0’이다. 법안 통과 여부를 정당이 당론으로 결정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당론에 발목을 잡힌다. 헌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할 권리를 정당의 당론에 빼앗기고 만다. 모든 걸 당론이 좌우하면서 민생현안이 19대 국회에 진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의 힘은 공천권과 막강 조직에 있다. 국회의원은 다음에도 금배지를 다는 게 어쩔 수 없는 숙원이다. 그러자면 공천을 주는 당 대표나 실권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의정활동 아무리 잘해본들 공천권자의 눈밖에 나면 끝이다. 결과는 뭔가? 의정활동 열심히 하라고 국회의원으로 선출해주니 당 지도부 앞에서 굽신대는 게 한국 정치다.

정당은 대표·최고위원·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 지도부가 이끌어간다. 크고 작은 정책·당론은 여기서 결정된다. 그것도 밀실에서 비공개로 몇몇 실세가 ‘당론’이란 이름으로 못박아버린다. 원내대표가 있고 ‘의원 총회’도 있지만 형식적이고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메커니즘이다.

김 전 의장은 “국회 기능을 활성화하려면 정당의 비대한 인적 구성을 혁파하고 공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당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정당의 힘을 빼는 쪽으로 권한과 인적 구성을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정당 지도부가 막강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정당 발전은 없다. 국회 발전도,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

이와 관련해 참여정부의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2012년 펴낸 저서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제시했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 국회에서 처리된 3131건의 법안의 태동과 입법화, 집행까지 걸리는 기간을 분석했다. 어떤 정책 현안이 정부 입법안으로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해 다시 정부에서 집행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일종의 법안처리 속도라 하겠다. 결론은 약 35개월이었다.

정책 현안이 정부 입법으로 성립하는 데 21.5개월, 국회 심의와 표결을 거쳐 통과하는 데 7개월, 정부가 시행에 들어가는 데 5.9개월이 평균적으로 소요됐다. 당정 협의를 거쳐야 하고 또 여야 간 밀고 당기는 과정을 겪다 보면 법안 하나 집행하는 데 3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내각제 국가에서는 내각의 결정이 곧 의회의 결정이므로 정책결정이 원(one) 라운드로 끝나지만 대통령중심제는 행정부 결정, 의회 결정 등 투(two) 라운드가 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중심제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어 집행력이 높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앞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언급했듯이 이런 사이클에 들어 있는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면 법안처리 속도를 떨어뜨리게 되므로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정권 창출’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정치권에 회자됐지만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역임한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는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이렇게 말한다.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고자 정권을 잡는 게 정당이다.” 위정자들은 ‘정권 창출’보다 ‘국민을 위한 정치’에 우선가치를 둬야 한다는 뜻이다.

글=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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