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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세계적 디자이너가 없는 이유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디자인한 사람은 외국인이지만 한국 디자이너의 작품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제품에 디자인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쓰인다. 에코 디자인, 북 디자인, 푸드 디자인 등 새로운 디자인 영역이 속속 생겨난다. 얼마 전에는 ‘금융을 디자인하라’는 광고 문구까지 나왔을 정도다. 디자인은 이런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 의해서 끊임없이 표현된다.

디자인을 정의하라면 ‘시대가 바라는 모습을 가진 하나의 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표현 방식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디자인의 타깃이다. 1990년대 정보기술 사회에 접어 들면서 디자인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급증했고 유통 속도 역시 빨라졌다.

인쇄 매체나 방송·인터넷을 통해 각기 다른 산업에서 쏟아지는 여러 디자인을 쉽고 빠르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은 더 이상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다. 디자인에 가속도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관심대상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표현 방식이 빠르고 다양해져 디자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우리가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해외 유명 디자이너 이름으로 포장하기 급급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10년 간 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포인트다. 이탈리아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탈리아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한다.

패션·구두·가방 같은 소품을 필두로 자동차와 가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나라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디자인이란 단어를 광고나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디자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일반 뿐 아니라 문화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영국·프랑스·독일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이 문화가 되기까지 수많은 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은 진심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을 존중하고, 디자이너에 대한 존경심을 터득했다. 그래서 이런 국가의 국민은 자국 디자이너의 명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 예로 이탈리아의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를 보자. 그는 국내외서 쌓은 명성으로 토리노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 선정됐고, 이어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 다이슨은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와 날개 없는 선풍기 등 혁신적인 상품을 디자인한 것을 국가가 인정해준 사례다.

디자인이 문화로 정착된 나라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대기업들은 디자인을 앞세워 제품을 판매하는 데 열심이다. 디자인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광고를 쏟아 붇기에 여념이 없다. 정작 디자이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저 평가된다. 널리 알려진 해외의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제품을 포장하기 급급하다. 실력 있는 한국 디자이너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미 유명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고르는 게 제품 홍보와 판매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우위를 점한다. 디자인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자동차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대우자동차(현 한국 GM)에서 디자인 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중요 프로젝트 품평때마다 최고경영진은 이탈리아의 디자인 전문 메이커인 ‘이탈디자인’의 제안을 채택했다. 이탈디자인에는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은 주지아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고경영진은 한국 디자인 팀에서 내놓은 디자인은 보지도 않고 이탈디자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옳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늘 “한국디자이너는 실력이 없으니 더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곤 했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더 이상 실력만으로 승부가 불가능했다.

1990년대 중반 나는 27명으로 구성된 팀을 데리고 이탈디자인을 방문, 그곳에서 3주간 신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이탈디자인의 프로젝트팀과 경쟁을 하면서 최종 디자인을 내놨다. 결정은 주지아로에게 맡겼다. 당시 대우차 최고경영진이 한국 디자이너보다 주지아로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주지아로는 우리 팀의 손을 들어줬다. 이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신차 프로젝트에서 한국 디자인 팀의 디자인이 채택돼 생산까지 이어졌다. 한국 디자이너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모델이 ‘매그너스’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가 만끽했던 승리가 20년 전이지만 지금도 한국 디자이너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한국 디자이너들은 이런 불리한 환경을 탓하며 스스로 게을러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실력을 입증할 기회를 찾거나 만들어내는 노력은 부족하다. 핑계를 대기보다는 디자이너 스스로가 늘 긴장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디자인하고 있는가” 게으른 측면은 디자인 카피를 위해 구매하는 소비자라는 ‘카피슈머(Copysumer)’라는 신조어에서 확인된다. 디자이너 사이에 유명 디자인 제품을 대놓고 ‘카피’하는 경향을 빗댄 말이다.

유명 백화점에 가보면 ‘NO COPYSUMER’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디자인 사대주의 잔재가 남은 한국의 또 다른 악습이다. 해외에서 트렌드를 이끄는 디자인을 카피해 빠르고, 멋있게만 보여주려는 그릇된 시각의 결과다. 우리나라 단청의 조화로움과 불탑의 조형미, 비취색 고려청자의 우아함은 선조들이 만들어낸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디자인은 시대를 대표했다.

최근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콘텐트를 개발하면서 한복·도자기·나전칠기·한옥 등과 같은 아이템을 사용한 디자인이 관심을 받고 있다.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위상을 회복한 게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한국형 디자인을 몇백년 전 유물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프랑스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은 1889년 귀스타브 에펠이 디자인해 세워졌다. 나는 에펠이란 디자이너도 훌륭하지만 당시 수많은 반대에도 에펠탑이 완성될 수 있도록 지원한 파리시 관계자들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디자인으로 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분명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에펠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거다.

디자인은 장거리 달리기

디자인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다. 전력질주 해서 결승선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은 오래도록 사람에서 사람에게, 시대가 시대로 전해주는 문화유산이 된다.

올해 초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개관해 큰 화제가 됐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도시가 된 서울에 이 정도 규모의 랜드마크는 있어야지 한다는 당찬 각오로 시작된 프로젝트다. 완성된 DDP에 대한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전임 시장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한 전시행정이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어쨌든 동대문 야구장이 멋진 디자인 아이콘으로 탈바꿈했다.

건축 설계는 아랍계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자하 하디드(독일 빈예술대학 교수)가 맡았다. 아직 보강이 필요하지만 이곳에 꽤 많은 한국 디자이너의 작품이 속속 들어선다. 이는 한국 디자인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디자인 문화로 성장하기 위한 다방면의 소통이 DPP 같은 형태로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김태완 ‘완에디’ 디자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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