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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관청, 고려 당간지주, 조선 행궁 … 역사 이야기 ‘한 보따리’

온양향교(왼쪽)는 아산에 남아 있는 아산향교나 신창향교와 달리 조선시대 향교의 전형적인 공간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당간지주(오른쪽 위)와 구온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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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溫陽)은 온수현(溫水縣)이 세종 23년(1441)에 온양군(溫陽郡)으로 승격된 이래 약 600년 동안 이어져 온 오래된 지명이다.

온양군의 관아가 있던 치소(治所)는 속칭 ‘구온양’이라 불린다. 현재는 온양6동에 포함돼 있고, 그 이전에는 읍내리·읍내동·온주동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지역의 연배가 있는 주민들에게 가장 익숙한 명칭은 여전히 ‘구온양’이다. 이곳은 백제의 탕정군이 설치된 뒤부터 통일신라의 탕정군, 고려의 온수군·온수현을 거쳐 조선시대 온양군 시기까지 이 지역의 중심 지역이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나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 기타 자료에서 치소가 옮겨졌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그러니 구온양은 대략 2000년 동안 이 지역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2000년 동안 아산의 중심지

아산시, 특히 구온양 지역이 언제 백제의 영역이 되었는지, 언제 행정관청이 설치됐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로서는 두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백제 건국 직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6년의 기록 중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주민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는 기록에 근거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BC 18~AD 28 재위) 재위 36년이면 서기로는 18년이다. 2000년 전의 일이 된다.

 또 다른 시기는 고이왕(234~286 재위) 때 혹은 그 이후일 것이다. 주류 사학계에서는 백제 제8대 고이왕의 재위 기간이었던 3세기 후반에 마한 연맹체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대 주도권이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성덕왕이 온양에 행차하였다(712년)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온양온천을 ‘1300년 왕실 온천’이라고 하는 근거가 된다. 세종 때 온양행궁(온궁)이 건립됐고, 그 이전의 태조(1회)부터 세종(3회), 세조(3회), 현종(5회), 숙종(1회), 영조(1회) 등 모두 여섯 분의 왕들이 온양행궁에 다녀갔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들의 온행 때 이용하는 길이 있었는데 어로(御路)라 기록돼 있다. 배방 쪽에서 이곳 구온양을 거친 뒤 북서쪽의 청댕이 고개를 넘어 지금의 온양 시내에 있는 온궁으로 이어졌다. 적게는 700여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장대한 왕의 행렬이 대부분 온주아문 앞을 지나갔다. 수령과 아전, 지역민들에게는 매우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일이었을 테지만 동시에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다.

 1914년 일제가 다른 행정구역이었던 온양군과 아산군, 신창군을 하나로 통합했다. 통합된 군의 명칭은 아산군이었고, 군청은 영인면 아산리에 있던 통합 전의 아산군 관아에서 그대로 계속 맡게 됐다. 그로 인해 온양군의 중심지였던 구온양은 치소, 즉 군청 소재지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으니 딱 100년 전의 일이다.

온양군 관아 자리에 남아 있는 온주아문.
 그 이전인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약탈적인 일본 자본가와 모리배들이 군대를 등에 업고 현재의 온양관광호텔 자리에 있던 온양행궁의 강탈을 추진했다. 결국 온양행궁은 이듬해 불법 강탈당했고 1906년부터 온양관이라는 여관으로 전락했다. 그 뒤부터 헌병 분견소, 일본 육군병원 온양분원, 금융조합, 상업시설 등 각종 시설들이 그 인근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1922년에 충남선(현 장항선) 온양온천역이 개설되고 영인에 있던 군청까지 옮겨오면서 당시 온천리 일대가 온양의 새로운 중심 지역이 됐다. 말하자면 신온양인 셈인데, 이때부터 옛 온양군의 치소였던 읍내리 일대는 구온양이라 일컫게 됐다. 오랜 기간 동안 온양 지역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온양 일대에 옛 유물·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왜란 때 소실된 후 광해군 2년(1610)에 지금 자리에 옮겨 세워진 온양향교, 흥선대원군 때 중수된 온주아문과 동헌 건물, 비석들, 그리고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보물 537호) 등이 눈에 띄는 전부라 할 수 있다.

 ‘읍내리 당간지주’는 온주아문 남서쪽 200m 지점의 길가에 서 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커다란 깃발을 거는데 이 깃발을 당(幢)이라 한다. 그 깃발을 거는 높은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니 당간지주는 그 장대(깃대)를 세워서 고정시키기 위한 시설이 된다. 이곳 구온양의 행정지명이었던 읍내리를 붙여 읍내리 당간지주라 부르는데 높이는 약 4.1m가 된다.

왜란 때 많은 건물 소실

당간지주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데 절 입구에 세워진다는 점과 지형으로 볼 때 당시에는 그 북쪽, 지금의 온양향교 옆(동쪽)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실제로 향교 동남쪽 밭에 서 있던 석탑을 본 적이 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도 있다.

 온양향교는 아산시 지역에 남아 있는 아산향교, 신창향교와 함께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온양향교의 특징은 전형적인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산향교나 신창향교는 지형과 상황에 의해 약간씩 변형돼 있다. 그러나 온양향교는 연산 남쪽 기슭의 완만한 경사면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대략 남북 일직선상에 日(일)자 형태의 공간 구획이 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앞쪽(남쪽)에는 교육공간으로서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북쪽)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교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성전에는 정부의 규정에 따라 중앙에 중국의 5성, 좌우에 중국 2현과 우리나라 18현(‘동방18현’)을 배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향교를 문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중 공자의 묘호가 ‘대성지성문선왕’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대성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온양군 관아 자리에는 정문인 온주아문과 동헌이 남아 있다. 온주아문은 2층 누문으로서 1층은 3문, 위층은 누각 형태를 지니고 있다.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과 함께 전국의 관아를 정비하던 1871년에 중수됐다.

 남쪽으로는 마치 주작대로처럼 남향으로 뻗은 도로와 멀리 온양의 상징적 산인 설화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동헌은 온양군수가 머물며 공식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며 현재의 건물은 역시 흥선대원군 당시 중수한 것이다. 온양군이 폐지된 뒤 일제 경찰의 주재소, 해방 후 파출소로 쓰이다가 잠시 온주동 사무소로도 이용됐다. 1993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했다.

 그 밖에도 바로 뒷산(연산)과 동쪽 1km 남짓 지점에 있는 성안말의 옛 성터, 지명을 통해 옛 빙고(氷庫) 자리와 활터, 장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1919년 3월 11일에 어린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100여 년 역사의 온양초등학교를 둘러볼 수도 있다.

 이들은 이튿날이 장날임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터에서 또 만세를 부르다가 다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뒷산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금광 흔적, 금방앗간 이야기 등도 전해진다. 멀리감치 보이는 설화산과 배방산, 광덕산, 봉수산 등 아산 지역의 주요 산들도 볼 만하다.

 구온양은 비록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살펴보기에는 충분한 지역이다. 소박하지만 꽤 좋은 평을 듣는 음식점들도 몇 곳 있어서 시간을 내어 천천히 다녀볼 만한 좋은 곳이다.

천경석 교사

1960년 충남 아산 출생. 강원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34년간 고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아산의 향토사학자다. 현재 온앙고에서 근무 중이다. 순천향대 부설 아산학연구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지방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산 인물록』 『아산의 입향조』 『종곡리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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