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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직격 인터뷰] 발레리 장 우즈베키스탄항공 회장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를 본 소년은 말했다. “나도 크면 조종사가 될 거야.” 엄마는 “꿈이어서 괜찮다”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끼니조차 잇기 힘들던 시절 엄마의 꿈은 아이의 생존이었다. 그래도 소년은 꿈을 좇았고 마침내 그 꿈은 이뤄졌다. 우즈베키스탄 국영항공사인 우즈베키스탄항공의 발레리 장(68) 회장은 민항기 조종사 출신 최고경영자다. 1만70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이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2세인 장 회장은 우즈베크에 살고 있는 18만 명의 고려인 중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우즈베크 의회 상원의원도 겸하고 있다. 지난 8월 18일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우즈베크항공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장 회장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다. 조종사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18만 명의 고려인 중 최고위직에 오른 장 회장은 우즈베크에서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민항기를 운항한 우즈베크 최초의 조종사 타이틀을 갖고 있다. [사진 대한항공 우즈베크사업단]
-민항기 조종사로서 처음 조종한 기종이 뭐였나.

 “AN(안토노프)-2라고 농업용 경비행기였다.”

 -그게 언제였나.

 “1969년 스물세 살 때였다. 항공학교 졸업 후 부조종사로 있다가 그때 처음 조종사로 AN-2기 조종간을 잡았다.”

 -민항기 기장 자격으로 직접 조종한 기종이 모두 몇 가지나 되나.

 “AN-2, AN-24, IL(일류신)-62, IL-76, IL-86, A(에어버스)-310, B(보잉)-757, B-767 등 8종이다.”

 -지금까지 몰아본 비행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기종은.

 “B-787 드림라이너다. 지난해 구매 결정에 앞서 직접 시험 조종을 해봤다. 왜 드림라이너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우즈베크에서 대서양 건너 미국까지 민항기를 운항한 우즈베크 최초의 조종사라고 들었다. 언제, 어떤 기종이었나.

 “92년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크 대통령이 유엔을 처음 방문했을 때였다. 소련제 제트여객기인 IL-62를 조종했다.”

 -350명의 승객을 태운 상태에서 고장 난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킨 우즈베크 최초의 조종사라는 기록도 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82년이었다. 운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IL-86 기종으로 타슈켄트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었다. 엔진 고장으로 카자흐스탄 악튜빈스크에 비상 착륙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당시 이 사고로 매우 시끄러웠다. 장·차관급까지 조사를 받았는데 결국 기체 결함으로 밝혀졌다. IL-86에서 발견된 최초의 결함이었다.”

 -좋은 조종사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규율과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조종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객의 안전이기 때문이다.”

 -장 회장의 부친은 일제의 강제 병합 직후인 1915년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연해주로 간 걸로 돼 있다. 부친의 출생지는 어디인가.

 “이주 도중 길을 잃어 부모와 헤어졌다고 들었다. 너무 어려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자신의 성(姓)이 장(張)씨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선 어머니 사진 한 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어머니, 그러니까 내 할머니 사진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부친은 어린 시절을 극동에 있는 고아원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 고아원인지 아는가.

 “하바롭스크 인근 우수리스크라는 도시였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거기서 사셨다.”

 - 그때까지 거기서 어떤 일을 하셨나.

 “고아원을 들락날락하셨다고 한다. 결국 고아원을 도망쳐 나와 노숙을 하는 등 굉장히 어렵게 지냈다고 들었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온갖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을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사셨다. ‘고아원 신드롬’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지 7년째 되던 44년, 즉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여덟 살 연하의 어머니와 결혼하신 걸로 돼 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 혹시 아는가.

 “부친이 강제 이주돼 온 곳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접경 도시인 일이치에서 10㎞ 떨어진 시골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독일인·체첸인·그리스인 강제 이주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순수 독일계 혈통을 가진 분으로 역시 원래 살던 레닌그라드에서 그곳으로 강제 이주됐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몹시 힘들게 사셨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고 추위를 달래줄 땔감조차 없었다. 함께 고생하는 과정에서 서로 알게 돼 마음이 통한 것 같다.”

 -어머니한테 독일어는 안 배웠나.

 “어머니는 독일어를 잘하셨지만 집에서는 독일어를 쓸 일이 없었다. 부모님은 러시아어로 대화를 했다. 아버님은 고려말을 잘하셨다. 주위에 고려인 친구이 많았는데 그들과는 늘 고려말로 이야기를 하셨다.”

 -장 회장 몸에는 고려인과 독일인 피가 반반씩 섞여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생각을 하나.

 “물론이다. 나의 뿌리는 한국이다. 여권에도 고려인으로 돼 있고 아이들이나 손자·손녀도 다 고려인으로 돼 있다. 내가 만 60세가 되던 해 집에서 한국 전통에 맞춰 환갑 잔치를 했다. 아들 셋과 며느리, 손자 셋과 손녀 한 명까지 온 가족이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을 입고 한국 전통 음악도 연주했다.”

 -환갑 잔치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나.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인도 고려인인가.

 “아니다. 타타르 민족이다.”

 -댁에서 식사는 한국식으로 하나.

 “이걸 한국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밥이 없으면 식사를 못했다. 김치와 매운 음식도 좋아한다. 어머니가 한국 음식을 잘 만드셨다.”

 -어머니께서 아버님을 굉장히 사랑하셨던 모양이다. 한국 음식도 잘 만드셨다니….

 “집사람도 잘 만든다. 어머니가 아내에게 한국 음식 만드는 걸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 나라인 독일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이 있는가.

 “어머니는 생전에 독일로 이주할 기회가 있었다. 강제 이주당한 독일인들에게 독일 정부가 이주비와 정착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살았으니 여기서 죽어야 한다며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하셨다. 돌아가신 뒤에는 본인의 뜻대로 아버지와 같은 곳에 묻히셨다.”

 -조종사에 대한 꿈을 갖게 된 게 언제인가.

 “아주 어릴 때였다. 남자 아이들 꿈은 자주 바뀌지만 나는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 한 번도 꿈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조종사보다는 기술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몰래 항공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한 뒤에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그제야 어머니도 허락하셨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셨나.

 “아버지는 워낙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항공학교 입학을 위해 집을 나서기 전 ‘네가 원하는 걸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알았다’고 딱 한마디만 하셨다. 항공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운명하시기 직전 ‘나의 아들, 파일럿’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알게 됐다.”

 -카리모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특별기를 조종한 적도 있다던데.

 “그렇다. 92년 처음 방한했을 때 IL-62 전세기를 조종했다.”

 -우즈베크에 사는 고려인 위상이 과거 소련 시절만 못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지 않다. 우즈베크 독립 이후에도 고려인의 위상은 달라진 게 없다. 우즈베크항공에도 많은 고려인이 근무하고 있다.”

 -스스로 인생을 돌아봤을 때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생신 때면 온 가족이 모이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도 나와 내 아내 생일이면 온 가족이 모인다. 한자리에 모인 아이들과 손자·손녀를 보면 아주 만족스럽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운 말고 다른 게 있다면.

 “글쎄, 자립심이라고 할까. 어릴 때부터 나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싸워도 혼자 싸웠고, 지는 걸 제일 싫어했다.”

 -승부욕이 대단한 것 같다.

 “어렸을 때 그랬다는 뜻이다.”(웃음)

 -상원의원이 된 경위는.

 “100명의 상원의원 중 전문성과 민족을 고려해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는 16명 중 한 명으로 2010년 임명됐다.”

 -우즈베크항공 회장과 상원의원 임무에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하고 있나.

 “아무래도 우즈베크항공 일이 본업이다. 상원의원 일도 항공 쪽과 관련된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 같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일곱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한국인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다. 어렸을 때 고려인과 많이 어울렸다고 들었다.”

 -이 기회를 빌려 우즈베크에 있는 고려인이나 한국에 있는 동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려인은 잘살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런 노력을 통해 각자 원하는 목표를 달성했으면 좋겠다. 한국에 있는 동포에게는 한반도의 평화와 지속적 발전, 성공적 통일을 기원한다. 통일은 한국 발전의 새로운 큰 걸음이 될 것으로 믿는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장 회장은 …

1946년 옛 소련 우즈베키스탄 시르다르야주에서 태어남. 67년 크라스나쿠트스크 항공학교 졸업. 75년 레닌 항공아카데미 수료. 87년 옛 소련 국영항공 우즈베크 관리국 비행·탐색 부장. 92년 우즈베크항공 이사. 2002년 우즈베크항공 회장. 2010년 상원의원. 우즈베크 국가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독립국가연합(CIS)국가 간 항공위원회 의장.

[인터뷰 후기] 소설 같은 삶 … 오전·오후 두 번에 걸쳐 인터뷰

장 회장의 비서는 인터뷰가 아니라 접견이라고 못박았다. 잠깐 만나 차 한잔 하며 사진이나 찍자는 거였다. 기사 쓰는 데 필요한 내용은 이력서를 참고하라고 했다. 그것이 우즈베크 스타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그날 결국 두 번에 걸쳐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오전에 만나 잠깐 얘기를 나눈 뒤 생각이 바뀌었는지 일정을 조정해 오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 정에 끌리는 한국인의 피를 속일 순 없는 것일까.

 그의 삶은 소설이었고, 드라마였다. 아무래도 인터뷰는 그의 인생 역정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돌아보는 인물탐구가 되고 말았다.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눈매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다. 태도에서는 편안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그는 전형적인 다문화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는 타타르인. 큰며느리는 벨라루스인, 둘째 며느리는 러시아인이다. 미혼인 셋째 아들은 한국 여성을 사귀고 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약속한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인터뷰 섭외와 진행을 위해 애써준 주우즈베크 한국대사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우즈베크사무소, 대한항공 우즈베크사업단에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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