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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단발령, 장발 단속, 두발 자율화…나라 바꾼다고 머리부터 바꿨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한국 근현대 이발의 역사

머리카락까지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이 말은 몸을 소중히 하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효경』에 실린 공자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머리카락 한 터럭조차 몸의 일부로 여겼기에 유교가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던 조선 시대엔 이를 함부로 자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상투는 일종의 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조선 말기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1895년 12월(고종 32년) “성년 남자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고종의 칙령이 선포된 것이다. 이른바 단발령이다. 근대적 개혁의 일환이었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유학자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정부는 채두관(상투를 자르는 관리)을 전국에 파견해 성인 남성의 상투를 강제로 잘랐다.



단발령 이후의 고종. [사진=사진가 권태균]
당시 고종·순종은 물론 대신들 머리를 깎아준 이가 왕실 이발사 안종호다. 사실상 한국 1호 이발사인 셈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기록상 한국 1호 이발관은 1901년 서울 인사동에 문을 연 동흥이발소로, 이발사 유양호가 운영했다.



일제 치하에선 일본군 장교와 공무원 영향을 받아 짧은 상고머리(옆·뒷머리를 3~4㎝ 이상 치켜 깎은 머리)가 유행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권(1948~60년) 당시엔 6·25전쟁 등으로 인한 혼란 탓인지 두발에 대한 규정이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제 말 군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12mm 스포츠머리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박정희 정권(1961~79) 시절인 70년대에 “사회악과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장발족 단속에 나섰다. 73년엔 아예 경범죄 처벌법 개정안에 장발 단속을 포함시켰다. 당시 장발 단속을 둘러싼 재밌는 일화가 많이 전혀진다. 예컨대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삽입곡인 가수 송창식(67·당시 28세)의 ‘왜 불러’가 금지곡이 된 사연 같은 것 말이다. 영화 속에서 경찰의 두발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이 노래가 “공무를 방해한다”며 금지곡으로 정했다.



전두환 정권(1980~88) 시절인 82년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다. 경범죄처벌법에 명시된 두발 단속 조항도 89년 삭제됐다.



김대중 정부(1998~2003) 땐 사회 전반에 인권 인식이 높아지며 두발 자율화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민간은 물론 교도소와 학교 등 공공기관에서의 머리길이 제한까지 없어졌다. 2000년 7월 법무부는 재소자 두발제한 제도를 공식 폐지했다.



초·중·고에서의 두발 자율화 역사는 보다 복잡하다. 80년대 잠시 교복 자유화와 맞물려 두발도 자율화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시기, 대부분의 학교에선 두발 자유에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그러다 2010년 10월 김상곤 당시 경기도교육감이 공식적으로 공포해 이듬해 시행했고,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도 ‘두발 자율화’를 담은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했다. 2012년 재보궐 선거로 문용린 전 서울시교육감이 취임하면서 ‘두발 규제’를 담은 개정안을 지난해 말 공포했다. 하지만 올 6·4 지방선거에서 다시 진보성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취임하며 인권조례 원안을 유지하고 있다. 인권조례에도 불구하고 두발 단속은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한국인의 두발 길이는 근·현대사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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