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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6) 3대째 만리동 이발사 성우이용원 이남열씨

서울 중구 만리동 시장 뒷골목에 들어서면 ‘성우이용원’이란 낡은 간판을 단 판잣집이 하나 나온다. 1927년 문을 연 후 3대째 이어오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 이발소다. 4평(13.2m²) 남짓 이 좁은 공간에서 외할아버지 서재덕(생몰연대 미상)과 아버지 이성순(1915~84)을 거쳐 이남열(65)씨가 3대째 성우이용원을 지키고 있다. 그가 이 업에 처음 발을 디딘 지 벌써 52년이나 됐지만 성우이용원엔 그보다 더 오래 손님을 받은 낡은 물건이 적지 않다. 이씨가 반세기 넘게 시장통 좁은 이발소 안에서 목격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성우이용원의 53년 된 세면대.

성우이용원 입구에 있는 가격판에는 ‘이발’이라는 요즘 단어 대신 조발(調髮·머리털을 깎아 다듬다)이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인지 가격판만 슬쩍 봤을 뿐인데도 마치 한 세기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이씨는 “요즘 유명 프랜차이즈 미장원에선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주고 간식도 챙겨준다는데 우리는 이런 옛 느낌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1960년대 후반 이발 보조사 자격으로 아버지를 돕던 이남열씨(당시 16~17세 추정)의 모습. 창문 너무로 보이는 30대 남성은 당시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 한 간부의 운전사다. 매일 간부를 출근시켜준 후 이용원에 놀러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가격판에서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낼 필요도 없다. 이곳의 모든 게 다 옛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66년에 1200원(현재 가치 4만3000원) 주고 산 독일제 쌍둥이표 골동 면도칼은 이제 137년 됐고, 바리깡은 50여 년, 심지어 드라이어조차 20년 넘었다. 그의 아버지가 미장일 하던 친구에게 부탁해 벽돌 쌓아 만든 세면대도 53년 동안 손님을 받아왔다.

반짝반짝하는 새것만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이 이런 낡은 이발소를 찾을까. 이씨는 “꾸준히 하루에 10명은 온다”고 했다. 조발 1만3000원에 세발(샴푸) 3000원, 드라이 5000원. 거기에 면도(9000원)까지 ‘풀 세트’로 다 해도 3만원이다. ‘블루클럽’등 저가의 남성 헤어컷 프랜차이즈보다는 비싸지만 웬만하면 바리깡 없이 가위와 칼, 빗만으로 정성껏 손질해서인지 1만~2만원 더 얹어주는 손님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남열씨가 4~5년 전 아내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아내 이욕연씨는 87년 결혼한 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두 번씩 직접 싼 도시락을 이용원으로 실어 나른다고 한다.

인민군 머리 깎았던 아버지

한국 나이와 서양식 만 나이. 한국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나이가 둘 있다. 마흔 넘은 한국 남자 중엔 하나 더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로 호적상 나이다. 형·아우 따질 때면 등장하는 이 호적 나이에는 대개 “할아버지가 1년 늦게 출생 신고 하는 바람에…”라는 정형화된 설명이 따라 붙는다. 어떤 이에겐 그저 나이 한 살 더 올려보려는 얄팍한 수단이겠지만 대부분은 진실이다. 이씨 역시 그랬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만에 장티푸스에 걸리자 부모님은 ‘곧 죽을지 모른다’며 신고를 미뤘고, 1년 뒤인 6·25 전쟁통에야 겨우 출생 신고를 했다.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란갔다. 전쟁 전 일제 강점기 시절 화물차에 깔려 한쪽 다리를 절게 돼 움직이기 불편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의 아버지는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며 만리동에 남았다고 한다. ‘혹시 인민군이 잡아가면 어쩌나’싶어 불안했는데 인민군은 ‘병사 머리를 깎으면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아버지가 인민군 머리를 깎아 받은 쌀로 다섯 남매(※이후 동생 둘이 더 태어남)가 먹고 살 수 있었다. 이씨는 “그때는 인민군으로 갔다가 국군으로 제대하기도 했던 시절”이라며 “북에서 온 인민군보다 원래 서울 살던 완장 찬 ‘빨갱이’들이 온갖 꼬투리를 잡아 아버지를 해코지하려고 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1927년부터 계속 이 자리에서 손님을 맞아온 성우이용원. 한국의 위상도, 주변 환경도 엄청나게 변했지만 성우이용원은 옛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양으로 아직 남아있다.

중1에 시작한 이발

이씨가 아버지 이발소에서 처음 일한 건 중학교 1학년이던 62년이다. 당시 부모님은 물론 7남매가 모두 이용원에 붙은 6평(19.8m²)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 일 하는 걸 보게 됐고, 어느 날 “일 도와주면 용돈 주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손님 머리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일당은 50원(※막국수 세 그릇 가격). 생애 처음 번 돈이었다.

“내가 5남 2녀 중 다섯째인데, 다들 가업 잇는 데 관심이 없었지. 그러다보니 키 160cm(※지금은 2cm 준 158cm)에 몸무게 40kg도 안 나가던 내가 가위를 들게 된 거야. 생긴 것마냥 비실비실 힘이 없으니 ‘피죽도 못 먹었느냐’는 등 손님들한테 별별 소리를 다 들었어.”

왜소한 체격은 그의 가족에겐 축복이었다. 너무 말라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고, 대신 그가 열심히 번 덕분에 동생들은 물론 누나까지 시집 장가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가업을 잇기로 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이발협회의 (이발)보조사 자격을 따 아버지를 도왔다. 처음 4~5년은 가위·면도날 갈기 등 기본기를 튼튼히 쌓았다.

정권 따라 부침 겪다

2002년 4월 성우이용원을 방문한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 머리를 깎는 모습. 성우이용원은 르몽드지를 비롯해 전 세계 언론에 두루 소개됐다.
성우이용원뿐 아니라 이용업이 활황을 띤 건 두발 단속을 했던 60년대다. 박정희 정권 들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남자는 머리 길이, 여자는 치마 길이를 자로 재던 시절이다. 장발은 운전면허도 딸 수 없었다. 그러다 73년 경범죄 처벌법 개정으로 본격적인 ‘장발 단속’이 시작됐다. 남자라면 누구나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기에 이용실에 손님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조수 2~3명 데리고 일할 정도로 일손이 모자랐다”고 떠올렸다.

그는 70년 이발사 면허 시험에 통과했다. 하지만 정식 자격증은 그 다음 해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해 4월 발생한 창전동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때문에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사퇴하며 시청 업무 일부가 마비된 탓이다. 그는 “간절히 바라던 (이발사) 자격증 발급이 미뤄져 마음이 한없이 쓰라렸다”고 했다. 이듬해 양택식 경북지사가 신임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며 비로소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씨가 자격을 딴 지 약 3년 만에 가위를 내려놓고 은퇴했다. 74년 일이다.

잘나가던 이용원에 위기가 닥친 건 80년 전두환 정권 때다. 남성들이 이발소가 아닌 미장원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때마친 세계 음악시장을 주름잡던 영국 ‘비틀스’의 머쉬룸(버섯 모양) 헤어스타일이 국내에 유행하면서 너도 나도 장발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2년엔 두발 자율화가 돼 남자들이 다들 머리를 길렀다. 과거엔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기만 하면 됐지만 이때부터 남자들도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명 프랜차이즈 ‘박준 뷰티랩’의 전신인 ‘박준 미용타운’도 이 무렵(1981년) 만들어졌다.

퇴폐 이발소 등장으로 고전

이남열 이발사는 영업시간(오전 8시~오후 9시) 전후 한 번씩 이발도구를 정리하고 청소를 한다.
악재는 또 있었다. 바로 퇴폐 이발소의 등장이다. 이씨는 “교도소에서 이발 기술 배우고 출소한 사람들이 성매매여성들 고용해 면도 가르치고 퇴폐영업 했다”고 떠올렸다. 문제는 이들이 버젓이 ‘이발소’ 간판은 물론 이용업 고유 상징인 삼색(파란색·빨간색·흰색) 사인보드까지 달았다는 점이다. 정작 진짜 이용사들 명예는 한없이 추락했다. 이발 관련 단체가 복지부(※현 보건복지부)에 강력 항의했고, 이발소를 가장했던 성매매업소들은 하나둘씩 ‘남성 휴게텔’식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하지만 이미 실추한 이미지는 돌이키기 어려웠다.

이씨는 “전두환 정권 때 한국이 처음으로 무역 흑자(1986년)를 기록했다지만 정작 이용업은 매출에 타격이 컸다”며 “수익이 반토막 나 먹고 살기 어려워져 폐업까지 고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 인생만 놓고 보면 그 시절이 고통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서른 여덟 늦은 나이에 지금의 아내 이욕연(58)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87년 욕연씨는 인천 강화도의 한 직물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순박한 외모에 반해 용기를 내 청혼했지만 신부 측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가난뱅이 이발사에게 딸을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결혼에 성공했고, 결혼하던 해 외동아들 동철(27)씨가 태어났다.

먹고 살 정도만 겨우겨우 벌던 시절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했던 외환위기가 닥쳤다. 처음 경험하는 대량 실업사태 등으로 한국인 누구나 고통을 겪었다. 이용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98년 저가의 남성 헤어컷 전문점을 표방한 블루클럽이 이발 가격을 5000원에 책정해 다른 이발사들이 속속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성우이용원에는 기회였다. 나름 브랜드 이미지를 착실히 쌓은 덕분인지 이발비 9000원에도 손님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전에 안 오던 젊은 사람까지 찾았다. 그는 “나 돈 벌라는 하늘의 배려 같았다”고 했다. 결혼 후 사글세만 전전했지만 2003년엔 이용원 근처에 15평(49.59㎡)짜리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찾다

미용대 서랍에 있는 10~50년 된 가위들.
이발소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성우이용원은 입소문이 나 유명인도 방문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딱 한 번 그의 이용원을 찾았다. 그는 2011년 2월 7일이라고 정확히 기억한다. 이 회장이 다녀가기 바로 전날 배달 온 2월 6~7일자 중앙선데이를 보던 중에 이 회장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날을 기념하려고 이 신문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날 오후 비서가 전화를 걸어 물어왔어. 저녁에 이발 가능하겠느냐고. 한 저녁 7시반쯤 됐나. 시꺼먼 고급 차가 가게 앞에 서더니 이 회장이 직접 들어왔지. 머리가 좀 뻗쳐 있어서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더라고. 면도까지 다 하고 3만원 받았어. 나갈 때 ‘전통 이발 잘 하고 갑니다’ 이러고 가더라고.”

전통 이발이라니, 대체 뭘까. 이씨는 “바리깡 같은 기계 안 쓰고 오로지 가위랑 빗만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인 가운데선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가 2~3주에 한번씩 온다.

수십 년 동안 손님을 맞다보니 이발 외에 ‘특별한 기술’이 하나 생겼다. 체취로 건강을 알아보는 재주다. 70여가지 다른 냄새를 구분한단다.

“간이 안 좋거나 고혈압이 있으면 피부부터 늙어. 아무리 부드러운 면도날을 써도 피투성이가 되지. 입에서 비린내 나는 사람은 틀림없이 위장병이고.”

악취 나는 손님에게 병원 가보라고 쓴소리도 곧잘 한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그랬다. 머리를 깎는데 얼굴에서 독한 냄새가 풍겨져 나와 병원에 갔더니 간경화 3기였다.

“한평생 배운 기술로 아버지 운명을 알게 됐다니, 인생 참 얄궂지. 어떡하겠어. 내 업(業)인데.”

아들이 대 이었으면

137년 된 독일제 면도칼.
이씨는 최근 고민이 하나 생겼다. 3대째 이어온 가업이 끊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큰 수익을 내는 일이 아니니 후배 양성은 어려운데, 롯데백화점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외아들 동철씨는 이발에 도통 관심이 없다.

“면도칼, 가위날 가는 기본기 갖추는 데만 최소 3년 이상 걸려. 이용사 기술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7~8년은 족히 걸리고. 당장 기술을 전수해도 내 나이 일흔이 넘게 되는 거지. 소위 ‘날 잡는 내공’까진 바라지도 않아.”

이씨의 소박한 바람은 젊은이들이 이발사란 직업에 관심을 갖는 거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이발 철학을 얘기했다. “이발은 한마디로 남성의 이미지를 지켜주는 거지. 이미지란 신뢰와 직업 등 사람 전반을 말해주지. 아름다움만 좇는 미용과는 달라”

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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