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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세종, 세제 바꾸려 600년 전에 전국 여론조사를 하다

훈민정음 반포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내 이랄 윙하야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 여듧 짜랄 맹가노니.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세종 28년(1446년) 훈민정음 창제로 한글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568년째다. 훈민정음 서문엔 백성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헤아리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백성을 중심에 둔 민본정치를 펼쳤기에 훈민정음 창제가 가능했다. 물론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성리학을 중심에 둔 유교 통치 체제가 자리 잡던 조선 초기 유교 윤리를 백성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교과서와 언론이 기술하는 세종을 통해 조선 초기 사회를 들여다봤다.

<15> 세종대왕



세종(1397~1450)



태조·정종·태종에 이어 1418~1450년 조선을 통치한 4대 임금. 당대에 이미 해동 요순(중국 전설상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요임금과 순임금)으로 불릴 정도로 세종 시절은 태평성대였다. 세종은 정치·외교·군사·예술·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정도전(1342~98)과 함께 조선을 건국하고 나라 밑그림을 그렸다면 이를 현실화한 게 세종인 셈이다. 노비 출신 장영실을 중용하는 등 신분을 떠나 인재를 등용했고, 왕의 독점적 권력 남용을 경계해 의정부 권한을 넓힌 의정부 서사제 등 왕권과 신(臣)권의 조화를 추구했다. 측우기·자격루(물시계)·앙부일구(해시계)·혼천의(천문관측기) 등 과학기술을 개발했다. 또 4군 6진을 개척해 두만강·압록강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일본 쓰시마 섬을 정벌해 왜구를 토벌하는 등 국력을 강화했다. 토지 비옥도와 수확량에 따라 세를 부과하는 전세제도를 도입해 백성의 세 부담을 덜어 민생을 안정시켰다.



 세종은 건강하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상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어 부왕인 태종이 책을 모두 압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집권 후반기엔 중풍·요로결석·노안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1442년부터 세자인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고, 1450년 2월 53세로 눈을 감았다. 여섯 명의 부인에게 18남 4녀를 뒀다.



유교 정치를 확립하다



삼강행실도
교과서는 조선을 “중농억상 정책에 기반을 둔 유교 정치 사회”로 정의한다. 교학사는 “조선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고 설명한다. 두산동아는 “이상적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국가의 모든 의례와 제도를 유교식으로 정비…성리학적 윤리가 점차 사회 윤리로 확산되었다”고 적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근간으로 삼고 상공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세종이 임금으로 즉위한 1418년은 조선이 건국된 지 26년밖에 되지 않았던 때다. 조정은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유교의 근본 원리인 효·충·의 등 도덕규범과 윤리를 뿌리내리게 해야 했다. 그래서 지배층은 유학(儒學) 교육과 농업·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쏟았다. 제지술·인쇄술 발달로 유학이 빠르게 전파됐다. 또 농민들이 쉽게 농사법을 익힐 수 있도록 농민의 경험을 담은 『농사직설』을 편찬하거나, 측우기·해시계·물시계·역법 등 농업과 관련한 과학기술을 개발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의학과 화약·화포 등 군사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미래엔은 “조선 초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고 기술한다.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다



용비어천가 초간본
세종 14년 세종은 충신·효자·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인 『삼강행실도』를 편찬, 보급했다. 유교 윤리를 일반 백성이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한자와 이두(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적던 표기법)는 일반 백성이 이해하고 사용하기에 어려웠다. 세종실록에는 이런 백성을 안타까워하는 세종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니 책을 나눠주더라도 어찌 그 뜻을 스스로 배워서 교훈을 얻고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겠느냐. ”(세종 16년 4월 27일)



 이런 세종의 생각과 의지는 독자적 문자 개발로 이어졌고, 오랜 연구 끝에 세종 28년(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천재교육은 “훈민정음 창제는 문자 생활의 편리뿐 아니라 백성들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여 통치의 안정성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세종은 왕조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지어 보급하고, 관리들에게 한글을 배우도록 권장하였으며, 하급 관리를 대상으로 한글 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각종 기술 서적, 윤리서, 병서 등이 국가 차원에서 한글로 번역 출간됐다. 세종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발상, 추진력,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사상이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동시에 당시 지배층의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던 셈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표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온 천하에 천명하기 위한 것…또한 문자를 모르는 백성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중앙선데이 2010년 5월 23일 ‘언어 혁명→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한글에 대한 반발은 강하지도, 지속되지도 않았다…한글은 명과 조선의 관계에 전혀 변수가 되지 않았다. 또 기존 통치이념이자 정치 언어이며 중심 학문이었던 유학의 권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월간중앙 2012년 1월 1일 ‘‘뿌리 깊은 나무’에는 없는 역사 속 한글 논쟁’)



17만 명을 여론조사하다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영릉)에 있는 자격루.
정치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업적을 다 해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세종의 능력과 자질은 뛰어났다. 미래엔과 금성출판사는 조세제도개혁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세종 통치 초기 토지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걷었다. 문제는 수확량 점검이 관리에 의해 사사로이 행해졌고, 이는 농민 부담 증대로 이어졌다. 세종이 이를 개혁하려 했을 때 관리들 반발이 거셌던 것도 이런 이유다.



 세종은 일방적으로 밀어부치지 않았다. 대신 오랜 기간 여론을 수렴해 개혁의 근거를 마련했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17만여 명에 달하는 전국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현직 관리는 물론 촌민에게까지 의견을 물었다. 1430년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후 1444년 새 조세제도를 실시하기까지 무려 14년 동안 새 제도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꾸준하게 관리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토지 비옥도에 따라 세를 결정하는 전분6등법과 풍·흉년 정도에 따라 세율을 조정하는 연분9등법을 시행할 수 있었다. 미래엔·금성출판사는 “세종의 애민 정신과 유교적 민본 이념을 잘 보여 주는 일화”라고 평가한다. 조세를 둘러싼 갈등은 줄었고, 이후 이 두 제도는 조선 조세제도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세종은 정책을 추진할 때 이처럼 관리와 백성 의견을 폭 넓게 수렴하고 오랜 기간 숙의하며 설득했다. 세종 스스로 왕의 권력남용을 경계한 데다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인재를 곁에 두고 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장인 심온을 죽음으로 내몬 박은(1370~1422·여말선초의 문신)을 요직에 앉혔고, 세종의 세자 책봉을 극구 반대했던 황희(1363~1452)를 영의정에 임명하는 등 오직 능력만을 중시했다. 황희는 20년 넘게 재상직을 수행하며 조선 초 국정을 이끌었다. 정치적 반대세력이 될 수 있었던 인재를 탄압하지 않고 기용하는 포용과 관용의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QR코드를 찍으면 세종대왕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언론은 이런 세종에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찾아낸다. “반대자가 존재해야 리더는 자신의 판단력에 의문을 던지게 마련이다…보완할 점은 없는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세종 치하 정책은 더욱 튼튼해지고 정치는 더욱 건전해졌다.”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2012년 10월 29일 ‘김준태의 왕의 결단 19 세종의 허조 중용-반대파 곁에 두고 독단을 경계하다’) “정치적 담합으로 탄생한 세종시를 세종께 물으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국민에게 물어라’. ”(중앙일보 2009년 11월 17일 ‘세종께 세종시를 묻다’) “이 스물여덟 자가 변화무쌍하게 조합되면서 백성들의 생각이 출구를 찾았고…세종은 백성들의 막힌 가슴을 한글로 뚫어준 것이다…대선 주자들은 백성의 가슴에 울화가 쌓이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가.”(중앙일보 2012년 10월 9일 ‘누가 이 막힌 가슴 뚫어줄까’)



정현진 기자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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