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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 꿈틀대게 하는 생생 무대 속으로

최근 동시다발로 막을 올린 굵직굵직한 작품들 덕분에 연극팬들은 분주하다. 국립극단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명동예술극장과 동경예술극장이 힘을 모은 ‘반신’, 실험극장과 서울시극단이 함께 만든 ‘고곤의 선물’ 등이다. 각각 ‘맹진사댁 경사’를 쓴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오영진, 1980년대 일본 연극 전성기를 이끈 최고의 작가 겸 연출 노다 히데키, ‘현존 최고 극작가’로 불리는 영국의 피터 쉐퍼라는, 서로 접점이 없어 보이는 작가들이 이 시대 연극의 갈 길을 묻고 답하는 듯해 흥미롭다.

연극 3제: ‘고곤의 선물’ ‘반신’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고곤의 선물’은 근현대 연극의 본고장 영국 연극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재연한다. 셰익스피어는 논외로 하더라도 피터 브룩, 해롤드 핀터, 데이비드 해어 등 평소 우리가 ‘최고’로 섬기는 극작가는 거의 영국인이다. 한 천재 극작가의 죽음을 통해 그의 신념을 파헤쳐가는 내용인 만큼 그 위대한 예술세계에 확대경을 댈 기회다.

쉐퍼도 이 자전적 작품에서 그걸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은 아내 헬렌의 도움으로 성공하지만 갈수록 잔인한 복수극으로 치닫고 헬렌은 포용의 논리로 맞선다. ‘페르세우스와 아데나’ ‘아가멤논과 클레이템네스트라’라는 두 겹의 신화와 현실의 부부, 이들의 작품이 한데 얽힌 다층적 구조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의 비극을 논하고 있지만, 문제는 담슨을 죽음으로 이끈 고뇌의 본질이다.

“연극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다 “관객들이 스크린에 홀딱 빠져 영혼이 굶어 죽는 것도 모른다”며 죽음을 택한 극작가의 고뇌. 결국 “연극은 죽었다”고 외치며 사라진 극작가에게 ‘연극이 영원히 죽지 않을 종교’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연극인들의 몫으로 남겨진 셈이다.

그런 점에서 노다 히데키의 ‘반신’은 의문이다. 보편적인 테마로 ‘문화 교류’를 하겠다며 30년 전 초기작을 들고나왔다.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샴쌍둥이를 통해 ‘혼자이기를 원하지만 결코 혼자일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수수께끼를 풀러 나선다. ‘½+½=2/4’라는 ‘나선계단의 방정식’은 반쪽과 반쪽이 합쳐봤자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독한 존재가 인간임을 드러낸다. 엉뚱한 춤과 노래가 농담처럼 뒤섞이고 스핑크스·유니콘·가브리엘 등 온갖 관념을 상징하는 요괴들이 지배하는 환각이 평행우주처럼 교차하는 기상천외한 전개는 결코 관객의 동화를 허하지 않는다.

작품이 탄생한 1980년대는 일본 거품경제의 절정기. 정치에 대한 국민 관심이 식고 젊은이들이 내면으로 눈을 돌리던 시대, 문학에선 하루키류 성장소설이 득세하고 연극도 모라토리엄 인간을 그린 판타지적 작품이 오락성을 가미해 대중을 포섭했다. 열 살 소녀의 자아찾기 ‘반신’은 그 맥락에서 나온 대표작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거품이 꺼지자 다시 현실이 무대로 올라왔다. 노다 자신도 원폭투하를 둘러싼 미일관계를 그린 ‘판도라의 종’(1999), 옴진리교 사건을 다룬 ‘더 캐릭터’(2010)등 묵직한 사회적 테마의 작품을 만들어 왔다. 대지진 후 그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터에 그가 내면에 천착한 초기작을 들고 온 건 왜일까. 작금의 경직된 한일관계를 애써 피해 가겠다는 선택 아닐까.

하지만 올 초 대선배 니나가와 유키오가 일본색 짙은 최근작 ‘무사시’로 정면승부해 인류평화의 메시지로 기립박수와 벅찬 감동을 불렀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초기작으로 돌아간 하루키를 읽는 허탈함이랄까.
반면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6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지금도 펄펄 살아 연극의 존재이유를 웅변하고 있다.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을 응시하되, 세상 밖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중생은 일제 강점기 사업 이권을 위해 아들을 학도병으로 보낼 정도로 치부(致富)에 매진해온 친일 모리배. 해방 후 사회혼란을 틈타 사업확장에 나서다 미국인 사기꾼에 속아 배임, 횡령, 탈세 등의 죄목으로 전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위장 자살극을 꾸민다.

재산을 지키려 죽음을 가장하는 아버지 세대와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사위 세대의 대립은 ‘수구꼴통’과 ‘종북좌파’로 진영화된 요즘 사람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생이 스스로 관 속으로 들어가 장례를 치르는 대목은 최근 세간을 들끓게 한 변사체 진위논란을 예견한 촌철살인이다.

배금주의 가치관을 꾸짖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무겁지 않다. 판소리적 언어유희와 전통극 미학인 풍자와 해학을 현대적으로 버무린 고도의 조롱에 공감과 웃음이 넘친다. 한바탕 희극의 끝에 진짜 죽음을 택하는 주인공을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할 감흥에 젖는 것은 아마 지금도 살아있는 수많은 이중생들 때문일 거다.

연극은 정치보다 강하다고 한다. 현실을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게다. ‘영원히 죽지 않을 종교’와 같은 연극의 힘이란 인간의 마음을 꿈틀대게 하는 ‘살아있는’ 무대에서만 발휘된다. 그 진리는 지금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실험극장·명동예술극장·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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