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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등에 빨대 꽂은 거 아닐까

“바로 이거야, 그럴 줄 알았어!” 40대 주부 이 모씨는 여배우의 폭로로 들통난 아파트 관리비 비리를 보고 쾌재를 부른다. 그러나 이건 기쁨의 감탄이 아니다. 평소 ‘잠수함’이나 ‘선거함’ 같은 것이 등장하는 거대 음모론 따위는 알아듣기도 힘들고 해서 쳐다보지도 않는 이씨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불신의 시대, 판 치는 음모론

그러나 그에겐 어디선가 남들보다 나만 돈을 더 내게 만드는, 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지갑에서 돈이 소로록 빠져나가는 거대한 시스템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아파트 관리비만 해도 그렇다. 온수 급탕비가 이번 달 갑자기 전 세대 평균 이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밤마다 발 냄새 풀풀 풍기며 침대로 뛰어드는 남편과 잔소리해도 일주일에 두어 번 밖에 샤워하지 않는 아들 녀석, 아무리 생각해도 평균 이하로 빨래와 청소를 하는 본인의 생활 패턴을 종합해볼 때 부지런한 다른 집 보다 온수 사용량이 많을 리가 없다. 이것은 ‘관리비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여고 동창에게 카톡으로 확인해 본다 “자기네집 일반 관리비 얼마야? 나는 만 사천 원 나왔던데.” “그래? 난 만원도 안 나오는데.” “그래 이 나쁜 것들, 내 당장….” “근데 우리는 몇천 세대고 자기네 아파트는 세 동짜리잖아.” “아 그런 게 있어?” “아휴 관리비 상세 명세서 봐봐. 거기 다 계산법 있어” “흠, 그렇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기는 무뿌리 먹고 버티면서 남들 인삼 뿌리 먹는데 도움만 줄지도 모른다는 이씨의 피해 의식은 이번 일로 활짝 날개를 편다. 당장 어제 장 본 마트 영수증이랑 물건부터 꺼내서 맞춰본다. 지난번 휴지 24롤을 전단지 가격에 드리겠다고 해놓고선 일반 가격으로 계산하는 ‘마트의 음모’에 희생됐다가 환불받으러 다녀오는데 휘발유 값이 더 든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우 670g이라 적힌 팩을 믿을 수 없어 다음번엔 소형 저울을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어이쿠, 영수증엔 떡 적혀있는 아이브로우 펜슬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이 계산 조작도 모자라 아예 물건까지 안주는 수법을!”

그래도 혹시나 싶어 재활용 쓰레기통을 뒤져 마트 비닐 봉투 속을 보니 구겨진 경품 응모권 밑에 포장지 채로 깔려 있다. 자동차를 1등 상품으로 준다는 경품잔치 역시 ‘자기네들끼리 뽑고 우리는 개인 정보만 제공하고 들러리 서는 것’이라는 경품의 음모론을 믿는 이씨가 응모는 안 하고 봉투에 구겨넣은 것이다. 불신의 시대, 어디선가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처럼 내 뒷등에 보이지 않는 호스가 하나 꽂혀 있어 거대한 시스템이 내 등골을 쏙쏙 빼먹고 있다는 생각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영어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이다. 지난번 인터넷 해외 직구로 결제한 카드 값이 중복 결제돼 그걸 해결하느라 국제 전화로 땀흘리며 더듬거렸던 악몽을 되새기면 전화영어 학습의욕이 불끈불끈 샘솟는다.

생각난 김에 문자 메시지로 전송된 남편의 카드 결제 내역을 들여다 본다. 그런데 새벽에 들어온 남편의 택시비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왔다. 포털 사이트에 남편이 자주 가는 식당이름을 넣고 km 수를 검색해 20% 할증료를 계산기에 넣고 두드려본다. 그런데 아무래도 맞지 않는다. 이 멍청한 남편이 택시 미터기의 음모에 희생된 건가, 아니면 평소에 내가 “나 요새 너무 뚱뚱한 거 같지?” 이래도 “아니 괜찮은데”라고 해서 안 그래도 의심스러웠는데 혹시 딴 데로 샌 거였나?

그래 믿을 게 따로 있지 남편을 믿나?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바람 피는 남편의 음모지. 당장 카톡을 날린다. “도대체 어제 밤에 어딜 다녀 온거얏!” 그런데 답이 없다. 업무 중이겠지만 못 참고 전화를 건다. “왜 카톡에 답이 없느냐고! 요새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남편. “내가 카톡 지우고 텔레그램 깔라 그랬잖아. 카톡 검열된다잖아.” “응, 뭐 텔레…? 그랬던가.”

아, 불신의 시대. 이씨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그러니 청소와 빨래를 할 시간이 줄어들 밖에. 그러니 우리집 온수 난방비는 부당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관리비엔 음모가 있는 거 같다. 학교 때 줄 반장도 해 본 적이 없는 이씨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동대표 모집 공고’를 잘 살펴봐야겠다고 굳게 마음먹는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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