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판사 마음 움직이는 탄원서



“집사람은 정말 불쌍합니다. 언니는 소녀 가장이었습니다. 제가 평생 아끼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번만 선처해주시면 행복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가족이 쓴 절절한 사연 "글쎄"… 동료·지인의 솔직한 글 "그래"



 몇 년 전 서울의 한 법원에 근무하던 A판사는 친언니와 힘을 합쳐 형부를 죽인 한 여성 피고인의 남편이 낸 탄원서를 접했다. 내심 언니에겐 징역 12년을 선고하기로 결정해 놓고 공범이자 성폭행 피해자였던 동생의 양형을 두고 고심하던 터였다. 절절한 사연이 담긴 탄원서를 다 읽은 A판사는 동생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세 자매는 언니가 결혼한 후에도 함께 살았다. 행상을 하던 형부는 집에 올 때마다 언니 몰래 고등학생인 두 여동생을 성폭행했다. 동생들은 언니가 불행해질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언니의 분노는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외치며 남편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동생은 의자에 묶여 있던 형부를 때리면서 범행을 도왔다.



 A판사는 “남편이 눈물로 쓴 탄원서는 진심이 느껴져 뭉클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탄원서였다”고 말했다.



 법조계엔 “잘 쓴 탄원서가 변호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감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이재현 CJ그룹 회장 항소심에서 삼성가 가족들이 제출한 탄원서가 화제가 됐다. 재계 관계자는 “재계 인사의 재판에 거의 의무적으로 제출되는 전경련 탄원서와 달리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않아 CJ 측 인사들이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 선동·음모 사건에서도 선고를 앞두고 4대 종단 고위 성직자들이 한꺼번에 탄원서를 제출해 논란이 됐다. 재판부는 선고를 하면서 이례적으로 “법에 따라 선고했을 뿐 종교계의 탄원서는 감안하지 않았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탄원서는 한마디로 “내 말 좀 들어달라”는 하소연이다. 법적인 증거능력은 없지만 판사가 사건의 이면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매번 효과가 나는 건 아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할 때,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일 때 오히려 역효과라고 한다. 판사들은 “솔직히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절대 다수의 탄원서는 별 감흥을 주진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마음을 움직이는 건 어떤 탄원서일까.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판사들이 제일 집중해서 검토하는 탄원서는 피해자의 탄원서다. 피해자가 엄벌을 요구할 때 이는 양형에 고려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피해자가 선처를 구해도 유심히 봐야 한다. 혹시 강압으로 제출한 것은 아닌지를 따져본다. 억울한 피해자가 직접 쓴 탄원서는 사건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피고인·가해자를 위해 탄원서를 쓸 때엔 사실에 입각한 정보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지나친 자기 변명, 앞뒤 따지지 않고 두둔하는 태도, 추상적인 반성도 탄원서 효력을 떨어뜨린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피고인을 위해서는 주로 가족들이 많이 쓰는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절절한 사연도 있고 남 일 같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양형 결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오히려 한 발 떨어져 지켜본 회사 동료, 지인들의 탄원서가 설득력이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특히 솔직함이 가장 중요하다. 진짜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 드러나도록 나만 알 수 있는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자필로 쓰는 게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이라면 차라리 워드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다.



 ◆감형을 부른다는 탄원서 의뢰해보니=장점을 갖춘 ‘모범 탄원서’의 표본을 구하기 위해 전문 업체를 접촉했다. 인터넷엔 ‘감형·감경·선처’를 보장하며 평균 장당 5만원을 요구하는 전문 대필업체가 수두룩하다. 보통 2장에 9만~10만원에 거래된다. 의뢰 업체를 찾던 중 “대필 사실이 드러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묻자 “절대 그럴 일 없고, 만에 하나 물어보면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몇 곳을 접촉한 후 한 곳에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남편을 위한 탄원서가 필요하다”며 작성을 의뢰했다. 업체 요구 가격은 15만원. 하루 만에 도착한 초안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3장에 어려운 경제 형편 강조, 남편이 착한 사람이라는 점 등이 평이하게 서술돼 있었다. 의뢰 단계에서 경제 사정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도 “형편이 빠듯해도 열심히 살았다”고 쓴 것만 인상에 남았다.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적은 돈이라도 건네고 오는 사람” 등 무료 탄원서 샘플 서식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구가 많은 점은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았다.



전영선 기자





[S BOX] 하트로 채우고, 약혼녀 임신 초음파 사진 첨부하고, 협박하기도



탄원서엔 정해진 형식이 없다. 그럼에도 재판 과정에서 튀는 탄원서, 이색적인 탄원서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 60일 동안 쌓인 60건의 탄원서: 구속기간 중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한 조직의 일원. “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딱 한 번만 용서해주면 착하게 살겠습니다”는 내용의 무한 반복. 탄원서가 쌓일수록 슬슬 협박으로 느껴졌다.



 ▶ 하트로만 가득 채운 탄원서: 낙서 같은 탄원서, 심한 악필이라 읽을 수 없는 탄원서도 가끔 등장한다. 비슷한 유형으로 성경 구절·명언 등을 옮겨 적은 탄원서를 꼽을 수 있다.



 ▶ 멀티 탄원서: 임신한 약혼녀의 초음파 사진, 어린 자녀들이 나온 가족 사진 등을 첨부한 탄원서. 경우에 따라선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한다.



 ▶ “난 네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지”, 탐정형 탄원서: 판사의 가족사항이나 고향·학교를 정확히 안다는 느낌을 주는 탄원서. 조금 불안하게 만드는 유형의 탄원서다.



 ▶ 싸우자는 탄원서: 가끔 “풀려나기만 하면 검사와 판사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탄원서가 전달되기도 한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