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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고성장 없이도 행복한 나라 돼야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미국 CIA가 발간하는 자료(WORLD FACTBOOK)를 보면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3년 7월 현재 3만3200달러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명목환율 기준 국민소득이 놓치기 쉬운 그 나라의 실제 경제, 생활수준을 보여 준다. 우리보다 높은 나라는 거의 북미·유럽 국가들과 카타르·쿠웨이트 같은 자원부국 혹은 조세피난처들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싱가포르·대만이 우리보다 높다. 일본 3만7100달러, 영국 3만7300달러, 프랑스 3만5700달러이며 유럽연합(EU)의 평균은 3만4500달러로 우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3만100달러, 2만9600달러로 우리보다 낮다.



 이 통계가 보여 주는 대로 한국 경제는 소득이나 생활수준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거나 근접해 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 통계에서 도소매업·음숙박업의 소득이 크게 과소평가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1인당 실질소득은 더 높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에서 생활해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매우 잘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이제 우리가 선진국 기술과 제도의 모방으로 이들을 따라잡는 성장은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에 대규모 투자와 값싼 노동을 동원해 고성장을 이뤘던 과거 성장방식에 이제 더 기댈 수 없다. 인구 고령화, 투자율 감소는 이런 한계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만큼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면 성장 속도도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생산성 향상이 향후 성장의 주 동인이 돼야 하나 우리의 생산성 향상은 여전히 더디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임금이 우리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중국 공장의 생산성이 한국 공장보다 높고, 미국 공장의 생산성은 국내 공장의 두 배에 달하나 임금수준은 오히려 낮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한국 근로자의 생산성을 가지고는 현재의 소득수준을 지켜내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에서 일하는 방식, 인사 평가, 고용 및 승진제도, 임금체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적 시스템 혁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추격이 어렵게 된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 노동 부문을 개혁하며,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한다. 숯불이 거의 다 탔는데 단기 부양책으로 풀무질만 해댄다고 불이 다시 타오르지는 않는다.



 둘째, 고성장 없이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성장지상주의로 달려왔고 지금도 성장률에 매달려 있다. 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매달려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4개 회원국을 비교한 지표에는 한국이 노동시간 2위, 산재사망률 1위, 자살률 1위, 국민행복지수 33위, 출산율은 꼴찌라고 한다. 또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삶의 질 지수’는 조사 대상 135개국 중 한국이 7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필리핀(40위)·인도(71위)·이라크(73위)보다 낮음을 보여 준다(9월 18일자 중앙일보 사설). 왜 우리 국민은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 우리나라에 절실한 것은 현재의 소득수준에서도 보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문화·제도·관행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질서와 예절, 정직과 투명, 상호 신뢰, 법 적용의 공정성과 엄중함, 공정경쟁, 이런 가치들을 우리 사회가 보다 존중하는 토양을 만들어 가야 한다.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교육과 취업 기회를 가지며, 불운이 닥쳐도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제공되며, 억지보다 합리성이 더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은 지금 행복에 배고프다. 우리가 과거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 도약을 이뤘듯이 이제 ‘행복 헝그리’ 정신으로 행복 도약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쉽게 정부를 탓하나 이는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이 여러 캠페인을 통해 새로운 사회 풍습과 문화의 정착을 가져오도록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정부도 이를 끌어내기 위해 각종 제도와 보상체계를 바꿔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혁신이다. 단기 부양책에 정권에 주어진 시간과 정치적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지 말고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행복 증진을 위한, 보다 공정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시스템 혁신’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쏟았으면 좋겠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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