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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노비에 약 처방한 퇴계, 홍역 치료서 쓴 다산

조선시대는 역병의 시대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병고와 죽음은 운수 소관이라고 믿었다. 18세기 중엽 죽음의 유형을 실감나게 표현한 불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일부. 화가 미상. [사진 들녘]


조선의약생활사

신동원 지음

들녘, 951쪽, 3만9000원




건강은 시대의 화두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우리 의약사 연구에 몰두해 온 신동원 카이스트 교수가 쓴 이 책은 반갑기 그지없다. 개인 저서와 편지를 비롯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선현들의 의약생활사를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개 의서 편찬자를 비롯한 공급자 중심이던 의약사를 환자 중심의 시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대표적 인물이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다. 저서 『동국이상국집』에 자신의 병을 상세히 기록했다. 출생 직후 악성 종기를 앓다가 점괘에 ‘산다’고 하자 부모가 약을 쓰지 않았는데 저절로 나았다. 29세 때 당뇨로 추정되는 한열병을 앓았는데 차를 마시며 다스렸다. 79세 때 몽골 침입으로 천도한 강화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평생 피부병과 안질에 시달렸는데 온천과 바닷물 목욕 등으로 증상을 달랬다. 요즘 피부에 좋다고 즐기는 해수온천의 원조 격이 아닌가.



 16세기 이문건의 할아버지 육아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은 조선시대 유아 질병과 대응에 대한 귀한 기록이다. 그의 손자 숙길은 이질(1살), 학질(3살), 안질(4살), 경기(5살), 두창(6살), 입병과 귓병(7살), 홍역(11살) 등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이문건은 자신의 의약지식을 바탕으로 간신히 위기를 면했지만 답답한 나머지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다. 노비들에게도 의약 지식을 활용해 병을 치료해줬다. 출산한 여종이 병이 들자 궁귀탕을 지어주고 익모초로 익모환을 만들어 먹였다. 병 앞에서는 누구나 인간이었다.



 조선의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70)은 의약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처방을 언급한 편지가 20건이다. 종 아노에게 눈병에 도체탕과 활혈탕을 권했다. 아들 준이 낙상하자 사물탕, 감기에 걸리자 순기산과 정기산을 각각 처방했다. 문집에 『향약구급방』 『구급방』 등 의서를 언급한 내용이 보여 이를 바탕으로 처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식인이라면 의약서 몇 권쯤은 소장하거나 읽었던 것이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생전에 숱한 병을 앓았다. 2살 때 절반이 죽어나간다는 천연두를 앓았다. 다행히 다른 후유증 없이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7살 때 삼미자(三眉子)로 불렸다. 다산의 자식 11명 중 7명이 3살 이전에 병사했다. 그 중 5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종두법에 대한 관심은 가정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장남 학연과 차남 학유는 천연두를 무사히 견뎌냈다. 당시 27세였던 다산은 감격에 겨워 “아이가 말을 배워도 기뻐하지 않고, 글을 배워도 믿지 않았다”라며 “완두창을 이겨낸 오늘에야 의젓이 두 아들을 두었구나”라고 적었다.



  다산은 14살 때 대유행했던 홍진을 앓았지만 살아남았다. 마진·홍역으로 불렸던 홍진을 연구한 명나라 의학자 몽수 이헌길의 의서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홍진을 다룬 『마과회통』을 지으면서 “내 생명을 구해준 몽수의 뜻을 잇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29세 때 서울에서 마진이 대유행했는데 한번 앓았던 다산은 무사히 지나갔다.



 곡산 부사로 재임 중이던 36세 때 심한 독감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었다. 이듬해까지 20만8000명이 숨진 것으로 조정에 보고된 대유행이었다. 병으로 신음했음에도 주민 치료를 독려하고 곡식을 풀었으며 주인 없는 시신을 장사 지내도록 했다. 진정한 목민관 정신은 병 앞에서도 당당했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어두워져 안경에 의지했고 부단한 저술활동으로 왼쪽 어깨가 마비됐으며 귀양지에서 사지가 뒤틀리는 중풍을 앓았다. 옴 때문에 심한 부스럼을 앓기도 했다. 쉽게 낫지 않자 스스로 의서를 뒤져 신이고(神異膏)를 만들어 피부에 발라 병을 고쳤다. 비슷한 병에 시달리던 형 정약전에게도 이를 만들어 보냈다. 다산의 유배지 저술은 이런 고난 중에 나온 것이다. 병이 인간을 힘들게 할 수는 있지만 정신세계마저 피폐하게 하지는 못했다.



채인택 논설위원



[S BOX] “나았다고 말하라” 강요한 고려시대 돌팔이

고려시대에도 명의와 돌팔이가 있었다. 이규보가 살던 12~13세기 문종 때 왕자인 왕원은 약방문을 널리 구하고 친히 약을 지어 대중을 구했다. 승려인 진각국사 혜심은 무당이나 신령 등 미신을 배척하고 스스로 환자를 치료했다. 의원 3대의 삼세의(三世醫)로 유명한 윤응첨은 명성을 얻자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가 됐는데 국방부 고위직인 병부시랑을 비롯한 다양한 벼슬을 했다.



 일엄이라는 인물은 홍법사에 환자를 1만 명이나 모을 정도로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그는 “만법은 오직 마음에 달렸다. 너희가 ‘나의 병은 이미 나았다’라고 하면 병이 따라서 낫는다. 절대 ‘낫지 않았다’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나았다고 거짓 증언을 해 명성이 높아졌을 뿐이었다. 명종은 그를 도성에서 쫓아냈다. 돌팔이의 전통은 뿌리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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