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사이클 황제 조호성, 눈물로 떠나다

 
사이클 황제의 마지막 페달은 힘찼다. 그의 손에 새겨진 'Spero Spera(숨이 붙어 있는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의 스페인어)'란 문신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 비록 기대했던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빛났다.

조호성(40·서울시청)이 23일 인천국제벨로드롬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사이클 옴니엄에서 합계 232점을 얻어 하시모토 에이야(일본·236점)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옴니엄은 이틀간 6개 종목의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가린다. 조호성은 22일 제외경기 1위, 개인추발 2위, 스크래치 3위로 종합 1위에 올랐다. 둘째날 타임트라이얼과 플라잉 랩에서도 1위를 차지한 조호성은 점수가 가장 큰 포인트레이스에서 38점을 보태는 데 그쳐 하시모토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마지막 스프린트(5바퀴)를 앞두고 3점 뒤져있던 조호성은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뒤집기에 실패했다. 레이스를 마친 조호성은 쓸쓸히 트랙을 돌며 눈시울을 붉혔다.

도은철 감독은 경기 뒤 심판에게 클레임을 요청했다. 14번째 스프린트(70바퀴째)에서 무하마드 알하마디(UAE)가 추월해 20점과 함께 1위 점수를 받은 것에 대한 항의였다. 만약 이 요청이 받아졌다면 조호성은 5점을 얻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심판진은 시상식을 미루고 40분간 논의했으나 끝내 한국팀의 요청을 기각했다. 조호성은 "마지막 판정에서 1% 정도의 희망을 가졌지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호성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사이클복이 멋져 보여 운동을 시작했다. 공부를 잘 하는 막내아들이 학업에 열중하길 바랬던 아버지 조원일(73) 씨는 고2 때까지 운동을 반대했다. 상장과 트로피를 숨겨서 상처를 주려고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 이금순(69) 씨는 "아버지는 복싱을, 나는 육상을 했기 때문에 아들이 대학에 가길 바랐다. 그래도 고집을 피우며 사이클을 했다"고 떠올렸다. 고3때는 연습 도중 오른팔 인대가 끊어졌지만 이겨냈다.

조호성은 한국 사이클의 별이 됐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40km 포인트레이스(250m 트랙을 160바퀴 돌면서 10바퀴마다 순위별 점수를 매김)에서 첫번째 금메달을 따낸 그는 1999년 독일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시상대(3위)에 올랐다. 힘 좋은 유럽 선수들의 독무대인 사이클에서 '동양 선수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국 선수 최초 올림픽 메달을 노렸다. 하지만 3위에 딱 1점 뒤져 4위에 머물렀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관왕에 오른 조호성은 2004년 경륜 선수로 변신했다. 장거리를 주종목으로 했던 그는 단거리 경주인 경륜에서도 최강으로 군림했다. 260경기 통산 승률은 90.4%, 4년 연속 상금 1위(2005~2008년)에 올랐고, 역대 최다 연승(47승) 기록도 세웠다.

그러나 2008년 조호성은 돌연 경륜계를 떠났다. 한으로 남은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매년 2억원 이상 상금을 받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호성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경륜을 하면서도 늘 미련이 남아 있었다. 올림픽 메달을 따지 못한 후회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도전은 쉽지 않았다. 주종목이었던 포인트레이스가 2012 런던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조호성은 대신 옴니엄에 도전했다. 옴니엄은 단거리와 장거리를 골고루 잘해야 하기 때문에 조호성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신체 개조에 나선 조호성은 폭발적인 스퍼트를 위해 키웠던 근육량을 줄이고 근지구력을 강화했다. 85㎏까지 늘었던 체중도 10㎏ 이상 줄였다. 국내와 해외를 돌아다니는 전지훈련 탓에 아들 준혁(4)이가 아빠를 어색해 할 정도였다. 그래도 조호성은 자신의 꿈을 향해 꿋꿋이 달렸다.

그렇지만 끝내 올림픽의 신은 조호성에게 메달을 허락하지 않았다. 런던 올림픽 직전 월드컵에서 2위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에서는 11위에 그쳤다. 두번째 국가대표 생활도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끝은 또다른 시작이었다. 아내 황원경(34) 씨는 "남편이 올림픽이 끝난 뒤 은퇴를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아시안게임이 한국에서 열리니 더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조호성은 "나보다 어리지만 올림픽에 여섯 번이나 나간 빙상 대표 이규혁(36)이 참 대단해 보였다. 나도 인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경기대 대학원에 입학한 조호성은 사회체육학을 공부하며 플레잉코치로 활동했다. 조호성은 "아시아에서도 한국 사이클이 최강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선수들이 부족해서 나온 결과"라며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비인기 종목인 사이클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싶었다"고 아쉬워했다. 11월 전국체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조호성은 "나는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 후배들이 올림픽 메달을 따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