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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가을의 입구

문태준
시인
남쪽 바다에서 그물로 싱싱한 전어를 잡아 올리던 어부가 “파닥파닥하는 전어가 이렇게 올라오면 이제 가을의 시작이지요”라고 말했을 때 잊고 있었던 가을이 내게 찾아왔다. 고창 선운사에 꽃무릇이 피어 산사가 붉은 융단을 깐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오는 28일에 설악산에서 첫 단풍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를 들었을 때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이 시작되었다. 사방이 풀벌레소리다. 아침저녁이 서늘해졌다. 햇배와 붉은 사과가 과일가게에 수북하다. 주말이면 등산복을 차려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입산한다. 시인 릴케가 썼듯이, 두 세계 가운데 “한쪽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쪽은 땅으로 꺼지는” 시간인 해질녘에 한강을 따라 마포에서 양화진까지 걷다 보면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나는 이러한 풍경들 곁에 앉아 폐결핵을 앓다 요절한 시인 존 키츠의 시 ‘가을에 부쳐’를 낮게 읊조린다. “태양과 공모하여 초가집 처마를 휘감은 포도나무들을/ 열매로 가득 채우고 축복해주며/ 이끼 낀 오두막집 나무들을 사과로 휘어지게 하고/ 과일 하나하나 속속들이 무르익게 하고/ 박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개암 열매 깍지를/ 달콤한 과육으로 살찌우고, 꿀벌들을 위해/ 늦게 피는 꽃들을 더욱 더 피어나게 한다/ 여름이 이미 끈적끈적한 벌집들을 흘러넘치게 하였기에/ 꿀벌들은 따스한 날들이 결코 그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처럼 가을의 냄새가 곳곳에 흥건한 것을 보니 가을에는 코와 눈의 감각도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바깥 대상과 세계에 대한 감각의 내용이 자세하고 촘촘하니 그 감각기관을 나의 내부로 돌려 사용하면 나에 대한 생각도 보다 명료해질 것이다. 나는 지난해 가을에 시 ‘시월’을 썼다.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 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 차가워진 너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라고 썼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렀다. 큰 타원을 한 바퀴 돈 것 같다. 나는 나의 궤도가 되어 준 이 타원을 따라 또 돌면서 이 가을을 보낼 것이다. 나는 곡선의, 더 많은 논둑길을 걸을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을 잘 알아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곡물을 수확하는 농부의 마지막 일손이 끝나면 빈 들판이 가을의 출구가 될 것이다. 그동안 나뭇잎이 떨어지고, 새들이 이동하고, 사람들은 머플러를 목에 두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이 개울물처럼 멀리 흘러가고 계절이 바뀔 때 근본을 살피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다. 가령 나는 신라 화엄학의 대성(大聖)이었던 의상 스님이 ‘화엄경’ 법계도를 설명하며 하셨던 말씀을 요즘 거듭거듭 생각하고 있다. 스님은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고 하셨으니 그 뜻은 ‘가고 또 가도 그 자리가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더라도 그 자리가 출발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자리는 어떤 곳인가. 온유한 사랑이 사는 곳이 아닐까. 깨끗하고 고요한 평상심이 사는 곳이 아닐까. 이롭게 하는 마음이 사는 곳이 아닐까. 물과 새와 나무, 우리 모두가 외우고 지키는 법이 사는 곳이 아닐까. 모든 이들의 ‘같은 내면’이 사는 곳이 아닐까.



 폴란드 시인 안나 스위르의 시 ‘같은 내면’을 읽어보자. “사랑의 축제를 위해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길가에서/ 한 늙은 거지 여인을 보았네/ 그녀의 손을 잡고/ 섬세한 뺨에 키스를 했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나와 똑같은 내면/ 개가 냄새만으로/ 다른 개를 알아보듯이/ 우리가 같은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알아챘네/ 그녀에게 돈을 주고 나서도/ 나는 그녀 곁을 떠날 수 없었네/ 어떻든 사람은 친밀감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지/ 그러자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갈 이유를/ 알지 못했네.” 나도 당신도 지구도 서로 친밀감을 갖고 붉은 가을의 입구에 함께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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