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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당선작 전문] 청년 영매(靈媒)의 '소설되기'와 그 너머: 김사과론

청년 영매(靈媒)의 ‘소설되기’와 그 너머: 김사과론

-김유석



지난 10여 년 간 한국 청년은 살 만하지 않았다. 수많은 청년 담론이 나왔고 많은 해석과 규정들이 이제 슬슬 진부해질 참이다. 기정화된 사실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답을 하기란 답답한 상황이다. 비정규직일수록 연애와 결혼 가능성이 줄어들고 고령자의 문제인 줄 알았던 고독사가 50대의 일이 되더니 점차 그 연령대는 낮아지고 있다. 일본의 ‘무연사회(無緣社會)’ 현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셈인데 ‘나도 잠재적 무연사(無緣死)’라는 일본 청년들의 자조 섞인 불안이 남일 같지 않다. 이십대 초반부터 올해로 10년 째 소설을 써온 김사과는 청년 담론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데 독보적인 작가다. 그의 소설이 청년 담론에 자극을 주기도 해 담론과 소설은 교호관계를 이룬다 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과연 재미로 통칭되는 호기심 충족, 위안, 경험 확장의 우월감 등을 넘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설의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는 그의 말마따나 “세상을 바꾸는 건 소설보단 화가 난 시위대라는 생각”(‘실천문학’ 2009년 여름호, 130쪽)에 자괴감에 빠질 만도 하다. 위의 발언이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거나 고민해 본 자만이 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기실,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 자체가 문학의 역할과 맞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문학은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문학이 유발하는 공감력에 기댄다. 공감이 행동 수행과 연관된 감정인 분노일 때 이 믿음은 더욱 깊어진다. 문학이 선동문이 아닌 이상 공감은 문학이 외부 세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최대치다. 여기서 김사과 소설의 기본 정념인 분노는 시위대와 함께 거리로 뛰쳐나갈 것인지 아니면 최대의 공감을 이끌어낼 방법을 찾아 나설지의 기로에 선다. 물론 김사과는 소설이 선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자괴감이 섞였으나마 1980년대에나 가질 수 있었다. 맞설 명시적 적은 사라지고 심지어는 소비 사회에서 길러진 자신의 욕망이 내부의 적이 된 상황에서 욕할 만한 절대악도 없다. ‘자신의 적은 자신이다’는 소문이 내면의 주술문이 되어버렸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이 내부로 향하면 자살이 되듯이, 분노는 표출구와 방향을 잃고 분열증이 된다. 김사과는 분열증을 멀찍이서 팔짱 끼고 바라볼 수 없다. 자신 역시 분열증에 빠진 것처럼 욕설과 광기를 작품 곳곳에서 반복한다. 반복은 곧 무의식의 존재 방식이다. 억압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반복은 계속된다. 이처럼 김사과 소설이 추구하는 공감이란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내포 화자나 인물이 현실의 청년들처럼 철저히 미쳐가는 데서 비롯한다. 즉, 소설쓰기를 넘어 ‘소설되기’에 이른다. 다 정상이 아니다, 나부터도 정상이 아니라며 자신이 현실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대한 새로운 답변이다. 그렇다면 김사과는 어떻게 살아왔나?



1. 동물의 순수한 세계



나를 둘러싼 세계를 다 때려 부수고 시작하겠다는 과격함과 ‘이게 사람 사는 건가?’ 하는 허탈과 분노에서 김사과의 소설은 시작된다. 집에 들어가면 경제적 무능자라는 자기 비하에 빠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붓고 (‘영이’) 학교 나가면 경쟁 체제에 완전히 포획된 아이들의 폭력적 자기 확신과 절망이 가득하다(‘미나’) 엄마 아빠가 죽고 없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대학 등록금을 벌다 절망하고 부양해야할 병치레를 해주어야 할 조부모가 버티고 있다(‘정오의 산책’). 유년이나 학창 시절이나 성인기 모두 폭력과 절망에 저당잡힌 인생이다. 도시의 수많은 집들에 내가 들어갈 창 하나 없고 연애는 시도조차 못한다. 성욕은 자폐적이며 각자의 나르시시즘을 변태적으로 충족시킬 뿐이다. 뭣도 모르고 화려한 외양을 믿고 찾아온 청년 이방인들은 어떤가? 조선족 여자는 고급 매음굴에서 거래되고 런던의 빈민 출신인 불법체류자는 마약에 취한 채 죽어간다(『테러의 시』). 내부자건 이방인이건 청춘들이 이렇게 ‘개처럼’ 살고 있다는 인식은 김사과의 소설을 관통한다.



작품 계보학상 등단작 ‘영이’의 영이는 이러한 청년들의 기원이다. 영이의 아버지는 술에 취했으면서도 가족에게 저녁밥을 차리는 미안한 실업자이고 어머니는 가난과 아버지와 취기로 항상 짜증이 나 있다.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붕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정에서 영이는 부모의 상호 폭력을 보며 자랐다. 불쑥 등장하곤 하는 ‘나’에게 영이는 가정 폭력으로 인한 가정의 파탄사에 정서적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다. 이 장치는 필연적인데, 이것이 없으면 ‘나’는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영이 뒤에 숨어야만 트라우마의 무의식을 겨우 말할 수 있는 ‘나’의 존재는 가정 붕괴 현장을 더욱 처절한 것으로 만든다. 영이도 ‘상상 속의 친구(imaginary companion)’인 순이가 필요하다. 작품 내의 현실을 차폐하는 환영물인 순이는 날 것 폭력의 집에서 미치지 않게 도와주는 자기 위안과 환각적 도피의 수단이다. 그러나 영이는 아버지의 날 것 욕설이라는 실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오늘을 견디면 내일이 올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간다. ‘순간 영이는 순이를 죽이고 싶어’지는데 환각 속에 살던 영이가 현실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이는 이제 고통의 현장에 내던져진 단독자로서 ‘이건 꿈일까? 꿈이 아닐까?’라는 자아 분열의 경계에 놓인다.



김사과의 인물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환상은 결국 날 것 현실에 의해 파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자 ‘나’의 목소리가 숨어 있지 못하고 노출된다. 간투사 사용과 내용의 반복, 그리고 ‘이렇게 나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의 계단을 쌓고 또 쌓아서 가능한 한 영이가 늦게늦게 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집에는 술에 취한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에서처럼 작가와 다르지 않은 내포화자인 ‘나’의 목소리가 출몰하며 영이는 내포화자의 상상 속의 친구이자 환각적 대리물임을 드러낸다. 내포화자는 영이가 없으면 실재에 그대로 노출된 채 미친다. 영이의 분신이었던 순이가 ‘영이의 손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엄마를 폭행하던 아버지가 진짜 개가 되어버린다. 아버지의 개-되기는 은유가 아니다. 카프카의 그레고리 잠자(『변신』)가 바퀴벌레가 되는 것처럼 심리적 현실은 실제 현실을 압도한다.



즉, 아버지는 억압되지도 부인되지도 않고 개로 폐기(forclusion)된다. 따라서 신경증과 도착증보다는 분열증이 김사과 인물들에게 부여된다. 개가 되지 않으면 체제의 부속품이 되어 타인과 자신 모두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가는 아들에 의해 죽는다(‘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이하 ‘움직이면’). 폭력적인 교사는 학생의 주문에 의해 암에 걸려 죽는다(‘준희’). 이렇게 아버지나 학교로 표상되는 상징 질서는 김사과의 소설에서 원래 기능을 잃는다. 상징계가 붕괴되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분열적 환상이다. 분열증에는 부권적 은유로 지탱되는 상징계가 통용되지 않는다. 개처럼 짖는 아버지는 정말 개가 된다. 이 은유 없는 세계에서 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의 광기는 실재의 날 것으로 발산된다. 신경증에 달라붙은 암시의 기호들은 낄 틈이 없다. 욕설이라는 파롤이 난무할 뿐이다. 기호적 재현이나 기억의 개입 없이 현재의 감각에 집중한 동물적 생태가 생중계되는 현장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현실에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확보할 여유가 없다. 냉소와 아이러니로 현실에 대한 통제력을 심리적으로나마 유지한다든지 아예 현실의 맥락을 벗어난 환상에 빠지지도 못한다. 호세 오르테가가『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예로 들듯이 한 사람이 죽었을 때 애도하는 가족과 사실 관찰자인 신문기자 그리고 예술가인 화가는 죽은 자와 서로 다른 거리를 갖는다. 화가의 거리는 미적 승화의 관점으로 보편적 감상자의 개입을 염두해 둔 상징계적 거리다. 또는 타자의 의식과 직접 교통하겠다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택할 수 있다. 미적 거리의 양 극단에 있는 두 관점은 모두 타자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김사과 작품의 경우 인물과 내포화자와 소설가 자신의 구분이 모호하다. 이것은 사실적 재현이나 보편의 언어가 지어낸 환영을 거부하고 독자와 충격의 정념으로 소통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출몰한 결과다. 작가는 화가의 자리에 있다가도 가족의 일원이 되어 울부짖고 싶은 것이다.



미적 거리와 정련된 문장에 의해 승화되지 못한 정념의 발산은 현실의 비참함에 압도된 자의 온당한 선택이다. 예술적 가공 작업을 통해 성적이고 파괴적인 정념을 배출하려는 경향인 승화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추락의 감각과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실패한다. 감정의 지출을 줄이고 억압으로 불안을 견디고자 하는 ‘감정지출의 경제’(김형중)는 없다. 정념의 탈승화는 소설 형식에서도 발견된다. ‘몰’과 ‘샌프란시스코’,『테러의 시』에서 파편적 구성은 일관된 이야기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일관된 거짓 환영을 거부하는 작가의 텍스트성 무의식(textual unconscious)을 반영한다.



이제 날 것의 세계가 기다린다. 생존 원리에 따라 동물적 맹목성에 빠진 인간이 연출하는 동물의 세계다. 동물이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감각의 예민함에서 생존의 준거를 삼을 수 있듯이 김사과의 인물들은 욕설과 폭력에서 맹목적 쾌락까지 느낀다. ‘거울을 봤는데 내가 안보이는 거야’(‘나와 b’)에서 드러나듯이 자아망실의 공포에 처해있는 자아가 승화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자아망실을 폭력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오히려 공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교사에게 교실 폭력을 당하던 여중생이 ‘천국을 살짝 엿보고 온 것 같은’(‘준희’) 피학적 쾌락에 빠지는 이유도 자아망실의 공포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어 공포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결국 ‘개처럼 짖고 싶’(‘움직이면’)어 하며 아예 동물이 되어버린 채 자아 자체를 망각해 버릴 수도 있다. 동물적 세계의 탄생이다.



『미나』에서 이수정은 동물을 대표하는 인물 아닌가. 먹이를 낼름 받아먹고 시스템의 애완견으로 어떤 의심도 품지 않은 수정은 시스템의 주체로서 어떤 소외감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의 인간적 버전인 자동기계인형으로 전락한 이수정에게 탈주체화를 실현해가는 미나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자퇴하여 대안학교로 전학하는 미나는 수정의 체제 적응적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대상이다. 미나에게 수정은 다를 뿐이지만 수정에게 미나는 대립된다. 수정은 미나의 대립에 의해서만 규정되기 때문에 미나를 죽임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원래부터 수정의 정체성은 외부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수정이 확신범인 것처럼 신자유의 시대의 에토스는 이렇게 견고하다. 그래서 결말에서 ‘친구를 짓밟고 올라서라. 이런 건 다 비유잖아? 아무런 힘도 없어. 나는 진짜가 필요했어. 예를 들어서 나는 니손을 밟아 으스러뜨렸어’(『미나』, 308쪽)처럼 폭력은 은유 없이 순수하다. 맹목성의 다른 말인 순수함은 동물의 생존 방식이다. 배고픈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고 나서 무슨 죄책감을 느끼겠는가? 사자는 의심도 회의도 없이 순수하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선언은 이 세계를 알레고리나 비유 없이 보여주며 실천된다. 그러나 인간은 소파에 앉아 TV 화면 속 동물의 폭력과 살육을 동요 없이 감상할 수는 없다. 김사과는 욕설을 퍼붓고 폭력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독자를 동요시킨다. 소파에 앉아 구경만 하지 마라, 내 문학은 소설을 읽는 이들이 같이 욕을 듣고 미치고 고통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서의 문학이다. 문학이 하나의 유희나 위로를 비롯한 감정 소비품이 되기 쉬운 시대에 매끄러운 구성이나 인물의 내면을 장악한 안정된 화자를 거부하고 내포적 화자는 무의식의 분열을 드러내며 자신이 동물 세계의 징후가 되어버린다. 김사과 소설의 윤리성이란 ‘청년 실업을 보도하는 기자는 적어도 취업자 아니냐’ 혹은 80년대식으로 말하면 ‘노동자 아닌 지식인이 노동시를 쓸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을 의식하는 성찰 능력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가?



2. 사랑, 테러와 초월의 변증법

가난을 감수한 예술가의 사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혹자는 계급과 나이와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인간적 사랑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 문화의 편견을 벗겨냈기 때문에 가능한 동물적 사랑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은 김사과가 동물의 세계를 탈출하여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기 위한 길은 고통스럽다. 자신이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막 자각한 인간은 테러범이 되거나 세상만사 다 잊고 초월하거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영이’는 무럭무럭 자라 더 이상 폭력 현장의 엑스트라나(‘영이’) 선생님에게 ‘죽어주시면 안될까요?’ 하고 얌전하게 이메일을 보내는(‘준희’) 여고생으로 남을 수는 없다. 본드 불며 도피적 환각에 빠지는 시절 (‘나와 B’)도 지나갈 것이다. 일단 고교까지의 학창시절은 이제 갔고 구경꾼이자 주술자 혹은 일탈청소년에 머물렀던 미성년 화자들은 대학에 가거나 스무살이 넘은 성년이 된다. 그리고 진지하게 묻는다. 이게 우리의 운명으로 굳어지는 것인가? 이제 그들은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발가 벗겨진다. 고급 매음굴에 팔려온 조선족 여자 ‘제니’나 런던 변두리 출신의 불법체류 원어민 강사 ‘리’(『테러의 시』)의 삶은 테러당한 삶의 은유였다. 이제 시스템의 내부자건 외부인이건 한 도가니에 섞여 ‘이유도 없이 살해당하’거나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움직이면’)칠 운명을 강요받는다. 성인인 그들은 힘도 세져서 남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삶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공허감과 수동적 상태, ‘내 의지대로 뭘 해본 적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할 뿐이라는 절망이 삶의 정체로 굳어지지 시작한다. 수정이 미나를 죽일 때의 미적거림은 사라지고 분노의 행동은 단호하고 간결하다.

취직을 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남에게 ‘뒤처지면 끝장’이라는 불안 때문에 취직은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다. ‘난 서울이 너무너무 무서워’(‘움직이면’)라고 말하는 그는 허수아비로 살다가 아무 의미 없이 죽을 것같은 공포에 질려 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햇빛에서 살인욕의 이미지를 보았다면 그는 회의실의 블라인드가 올라갈 때 회의실을 채운 햇빛에서 ‘모든 게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깨닫는다. 무의미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투사된다. 일요일 밤 아홉시 반에 늦은 저녁을 먹으며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던 허름한 국밥집은 그가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그런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난과 고통으로 진부한 삶을 살아가는 식당 노파에서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진부한 미래의 확인이라면. 국밥집 노파의 살해는 공포에 사로잡힌 자가 평화와 사랑조차 비참한 자기 확인이라고 절망하며 벌이는 자기 살해다. 여기에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처럼 구원의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나’의 살인과 죽은 이들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르지 않고 고통조차 무의미할 때 ‘지겨울 정도로 나 자신’인 자신을 파괴할 일만 남았다. 분노를 완전히 없애자면 자신을 없애는 방법이 남았을 뿐이다. 테러의 궁극적인 지점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유사 초월 상태에 의지할 수도 있다. 암에 걸린 조부모의 부양 책임을 맡은 ‘한’은 집과 회사에서 의미 없이 소모되고 있다는 무기력 상태에 빠진다. 그는 갑자기 종교적 계시를 받은 것처럼 ‘지금까지 얼마나 시시한 고통 속에서 바보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정오의 산책’)를 깨닫는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절망은 무의미의 공포를 잊기 위해 의미를 강요하는 것을 거부할 힘이 된다. 그런데 더 이상 개인의 자폐적 고통에 머물러있지 않겠다는 내면의 요청은 한편으로는 기쁨을 주지만 ‘압도적인 슬픔’을 주기도 한다. 절망이나 파국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 자기착취와 성과사회에서 살인적 노동시간을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하는 데서 자유의 감정을 느끼는 구조로부터 일탈한다. 그것은 그에게 정신승리법의 해방이었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광기일 뿐이다. ‘실패에는 어떤 교훈도 없’(‘샌프란시스코’)고 당하고 있는 고통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느낌,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현재의 무기력에 포획된 영혼이 내는 광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상한 미소를 짓고 이상한 자세로 서 있던 한의 몸에 바퀴벌레가 기어올라 얼굴을 돌며 그는 바퀴벌레로 전락한다. 그가 소리치는 ‘지진’과 같은 외침은 구원의 메시아라고 믿는 자의 분노와 광기 섞인 방언이었을 것이다.



‘머지 않아 흉한 씨멘트 덩어리는 값비싼 브랜드의 아파트로 완성이 되겠죠.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뿌옇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겠죠. 저 빼곡한 창문들 중에 내 것이 될 창문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저것들 중 어느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저것들과 함께 늙어갈 거예요’(‘이나의 좁고 긴 방’, 91쪽).



이미 미래를 살아버린 자는 자신을 투사한 타인을 소멸시키거나 스스로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 광기에 빠진다. 그런데 현실의 절대 부정 상태에 이르는 인물들에게 하나 남은 탈출구는 꿈이다. 그것은 범죄도 환상도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내 것이 아니라면 ‘지금-여기’에 최대한 집중하며 현재를 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먼저, 체제에 대한 의문을 멈추고 그것이 제공하는 소비의 쾌락에 빠지는 꿈이 있다. ‘우리는 덫에 걸린 건가?’의 의문이 ‘우리가 덫이라니까’(‘몰’)로 전환되듯이 소비의 시스템은 이미 내면화되어있다. 쇼핑몰에서는 가짜 바람개비가 돌고 그 가짜 정원에는 가짜 식물이 서 있다. 푸른 초정상자극(supernormal stimulus)의 왕국인 몰(mall)에서 가짜는 더욱 진짜 같고 감각은 극대화된다. 가짜 꿈의 세계에 포획된 결과물인 충동의 정념으로 공허한 현재를 잊을 수 있다. ‘꿈이 아닌 삶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소비의 욕망에 사로잡힌[沒] 자아는 환각적 쾌락에 중독되어 간다. 스마트폰, 과도한 독서, 뉴욕의 불꽃놀이, 가짜 팝콘 냄새, 유리들, 마네킹, 텔레비전이라는 욕망 조장의 환유들은 가짜의 실체를 견고하게 가려준다. 꿈같은 환각의 바로 바깥에는 ‘먼 나라에서 일어난 재난’과 ‘화장실 청소부의 삶’이라는 핏빛과 잿빛의 실재(the Real)가 출몰하지만 인식의 바깥에 있다.



이로써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접촉을 통해 그것을 깊이 이해하며 겪는 체험(Erlebnis)은 위기 상태에 빠진다. 체제가 주입한 수동적 인식과 미디어 등 매개를 통해 겪는 경험(Erfahrung)을 양산하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가짜’로 살고 있다는 느낌은 김사과의 인물들이 처한 공허감의 최대 이유다. 공허감에 무기력하게 살 것인가, 그런 삶조차 망각해버릴 것인가.



아예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해버리는 전략은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알아차리고 환각의 빛에 유혹당하기 쉬운 ‘눈을 뽑아내’고 싶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가짜 꿈을 보는 눈을 뽑아내야 진짜를 볼 수 있다는 역설적 진실을 몸소 실천하는 자들이다. 실명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해의 빛깔과 질감이 일으키는 낭만적인 자연이다. 진짜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인공의 비행기가 만든 궤적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 ‘몰’의 ‘나’가 D의 목소리에서 순간에 충만한 노래를 발견하는 것처럼 진짜다움은 연인 간의 동시간적이고 완전한 소통에 있다.



이렇게 진짜 초월은『풀이 눕는다』의 연인처럼 사랑에 빠진 자만이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이 ‘살아 있다는 걸 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라고 믿으며 절대적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라며 소비 체제에 맞선다. 화가 풀과 소설가 ‘나’가 원한 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에 포획되며 교환 가치 축적을 위한 경쟁이 가속화되는 세계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구원의 계기로 삼았던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이다. 낭만주의의 혁명성을 고려할 때 가난을 감수하는 예술가의 사랑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체제의 완고함을 깨고 나와 자족적 체제를 가능케한다.



물론 그들의 사랑은 실패할 운명이다. 그들은 ‘더러움의 밑바닥에서 더욱 필사적으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지만 히피적 저항과 사랑은 역사의 기억에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체제의 공모자가 보기에 ‘나’의 가난과 고생도 소설을 쓰기 위한 것이었고 예술적 도발조차 상품화될 때만이 가치를 갖는다. 교환 가치를 갖지 않는 예술가들인 그들이 부딪치는 궁핍은 이 시대에 예술과 사랑의 불가능성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체제의 맥락에 놓이지 않는 사랑이 한낮 무가치한 유희나 광기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깨려한다. 풀은 경찰에 쫓기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시간에 의해 혁명적 사랑의 기억은 마모될지라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반복될 뿐이다. …잠시 그는 길을 잃은’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겠지만 내부 혁명적 사랑의 기억은 적어도 체제의 공모자가 되는 것을 막는다. 풀은 잠시 바람에 누울 수 있지만 곧 일어날 것이고 봄이 되면 소생할 것이다.



정이현이 잘 그렸듯이 사랑에 대한 냉소가 난무하고 사랑의 불가능에 절망하는 때에 김사과식 사랑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테러의 반항적 정념이 부정성을 버리고 생성이라는 긍정성으로 승화되고 초월이라는 단독적 도피가 연대의 자족으로 현실화될 때 가능하기에 광기와 분열을 벗어나는 이상적 실천 방식이다.『풀이 눕는다』는 여타 작품과는 다르게 소설가인 ‘나’를 앞 세워 자전성을 강조한다. 작품 내 음악을 각주를 달아 가수와 작품 이름을 친절하게 알린다. “이 작품의 ‘나’는 곧 소설가 나”라며 텍스트성 무의식을 보여준 셈이다. ‘나’를 숨기며 분노의 정념을 마음껏 발산한 감정상의 ‘소설되기’ 뿐만 아니라 ‘나’를 드러내면서 화자 차원의 ‘소설되기’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위태로움 섞인 공감은 김사과-소설 속의 ‘나’인 소설가-청년 독자라는 세 주체가 분리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공감의 확보에서 사랑의 영역을 놓칠 수는 없다. 김사과는 자신을 드러내며 사랑의 전면전을 실천하면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내면화한 청년 독자에게까지 ‘소설되기’를 제안한다. 일종의 공동 시위다.



3. 순응자의 세계와 그 너머

그러나 체제 순응자에게 사랑은 단지 육체의 쾌락이나 섹스중독의 외피일 뿐이다. ‘완벽한 경제 공동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분 전환’으로 불안정한 학원 강사를 만나 쾌락에 몰두하지만 둘은 계급 상 만날 수 없는 ‘유령’의 관계로 옮겨간다(‘헤카베’). 자식과 남편과 도시를 잃고 개가 된 트로이의 마지막 여왕 헤카베를 좋아했던 여자는 자식과 남편과 도시를 살아남을 수 있는 돈이 있다. 여자는 모든 것을 잃은 채 개가 되어 떠 돈 헤카베를 찬양하지만 결코 헤카베가 될 수는 없다. 비참하지 않는 자만이 비참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개’는 진짜를 누리지 못한 채 노예의 삶을 사는 존재이자 바로 자신이다. 여자와 육체적 쾌락을 나누며 계층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고 착각한 그는 여자를 허영에 복종한 개의 생활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굳게 닫힌 여자의 집을 두드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여자에게 길거리를 홀로 떠도는 애완견이었을 뿐이다.



예술 역시 냉소로 찬 미적 상품으로 타락한다. ‘혁명과 불안정 노동과 예술과 사회와 정치와 과학과 사랑’ 그리고 ‘실패한 삶과 불행한 사람’(‘더 나쁜 쪽으로’)들에 대해 쓰려는 자에게 현실은 악몽이다. ‘먹이를 구하지 못해 아사하는 북극곰들의 희고 깨끗한 죽음이 극도로 세련된 장식’이 된다면 지구 온난화와 빙하가 소멸되는 현실과 생명의 고귀함이라는 가치는 촌스러운 훈계로 전락한다. 현실은, 공장이 노동운동의 역사나 자본가의 착취를 연상시키지 않고 ‘낡은 공장 벽돌에 십오 억짜리 그림이 걸리는 미학적 가능성’의 전시장이 된다.『풀이 눕는다』에서 보듯이 전시회장에서 ‘나’와 풀의 광기를 매력적인 퍼포먼스로 높이 산 ‘김권’의 세계이다. 이것은 예술의 상품화 수준을 넘어 자본주의가 전위주의조차 포획하여 혁명이나 정치적 급진주의조차 상품화하는, ‘모든 것의 상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현실에서 예술로써 혁명을 꿈꾸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예술이 체제의 억압을 견디고 나아가 전복할 힘을 잃어버린 현실은 환멸의 세계다. 모든 것은 게임과 유희와 공학이 된다. 남은 것은 생기 잃은, 그래서 생물적 생기가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인공의 삶이다.『미나』의 수정이 어른이 되었을 모습이자 체제의 현실원칙에 따르는 대신 신경쇠약(신경증)에 걸린 채 적응한 경우를 보자. 결혼도 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짜고짜 ‘아, 간밤에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여름을 기원함’)하고 중얼거린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비타민 팩을 팔려는 미용실 원장의 겁박처럼, 힘없는 모근에 주는 ‘영양의 허무함’에서 비롯한 ‘착실하게 죽음에 다가가는’ 인간의 운명이다. 가장 잔인하고 완벽한 살인자인 시간에 대한 공포는 유한한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기 때문에 체제에 억눌러 압사당한 자들의 공포에 비하면 퇴폐적이기까지 하다.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추하게 느껴지기 때문’인데, 이 퇴폐적 탐미주의는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고 싶은 퇴행심리와 다르지 않다. 보수주의의 생물학적 기원이다.



‘텅 빈 하루를 보낼 것이다.

내 영혼을 한겨울 강원도의 황태처럼 건조시킬 것이다.

미련한 방식으로, 죽음에

조금 더 다가갈 것이다’ (‘여름을 기원함’).



사회적 생존을 보장받은 대가로 체제에 순응한 자는 변화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남은 것은 건강과 젊음의 유지를 지향하는 생물적인 생존이자 사회 참여라는 상품을 세련되게 소비하는 공허한 삶이다. 인간으로서 그것은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 여자는 신도시에 세워진 명문 사립대학의 강연장에 가서 68혁명에 참여했던 미국인 마르크시스트 경제학자의 강연을 들으러 간다. 혁명은 대학의 공론장에 얌전하게 포섭되고 강단의 혁명론은 영어로 질문하는 명문대생의 지적 사치 도구와 권태에 빠진 계층의 자극제로 기능한다. 그런데 강연자에게 대학생 시위자들이 ‘좌파 빨갱이 양키 새끼 북한으로 꺼져라!’고 외쳤을 때 저항의 혁명론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접속된다. 아버지는 실업하고 미래의 생계가 불안한 채 거대한 체계의 적응 노력에 몰입된 여대생 시위자 ‘최’는 정작 체제의 ‘혁명’을 거부한다. 공무원 지망인 최에게 외국인 노동자와 북한은 그들이 속하고 싶은 국가라는 체제를 교란하는 혐오 대상이다. 그는 상징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절망을 체제의 변화가 아닌 타자 배제와 국가라는 대타자에 예속됨으로 해소하려한다. 그것은 ‘허약함의 징표’로서 심리적 보수화의 기원이자 환멸의 완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청년이 무기력을 넘어 체제에 복속해버렸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은 것은 도착된 혁명 구호와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완전한 무기력이다. ‘항상 오고 싶었던’ 이 천국이 바로 지옥 같은 ‘여기’(『천국에서』)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지옥 같은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뉴욕으로 공간 이동해 더 지옥 같은 서울을 잊고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로써 중산층 여대생 경희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뉴욕에서 발견한 것은 서울과 다르지 않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공허와 무감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처럼 뉴욕 경험자이자 냉소적인 체제 이탈자인 재현에게 반하지만 곧 그에게서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평범함을 발견하고는 애정이 식는다. 도피할 곳은 없다. 자신과 계층이 다른 공장 노동자 지원과의 사랑은 그의 계급적 자격지심 때문에 깨져버린다. 80년대 학번으로, 경희가 역사의 변화를 꿈꾸었던 자로 믿고 감동하던 사내에게서 ‘젊은이들의 철없는 꿈이 세상을 얼마나 망쳐봤는지 알아?’라는 말을 듣고는 그 감동을 철회한다. 사내에게 남은 것은 그의 성추행이 보여주듯 혁명도 타자와의 소통도 잊어버린 자의 추문스러운 욕망이었다.



체제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내면화해버린 자들을 겪으며 경희는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그래서 뉴욕에서 만난 친구이자 무차별 총기난사자인 댄의 일기 중,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 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지?’라는 말에서 분노와 적의를 발견할 뿐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희는 중산층의 의식을 이탈하는 일련의 관계를 경험하며 자신이 안주한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무서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여기서 나간 본 적이 없거든. 솔직히 여기가 안이라는 것도 몰랐어.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어. 바깥이라는 게 있어? 그래? 거기가 어딘데? 보이지가 않잖아.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여기 되게 좋아. 무서워할 데 하나도 없거든. 모든 게 쉬워. 창밖 풍경은 평화로워’(『천국에서』, 339쪽).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거기에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341쪽).

체제의 수족관 안에 살고 있다는 것, 그 안의 평화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서 경희는 수족관은 자신의 내부에 지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댄’이 무차별 총기난사로 무너뜨리고자 했던 수족관의 세계는 견고하지만, 댄의 과격함을 즉각 모방이 아닌 성찰적으로 기억함으로써 수족관 밖의 상상을 꿈꿀 수 있다. 산 자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재일 뿐이고 ‘지금-여기’가 의심 없는 천국이어야 한다는 생존 논리로 체제 거부의 사건을 망각하겠지만 그녀는 겁내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헤엄쳐 건너가려 한다. 닿는 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이 평화로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김사과의 소설살이는 이제 『천국에서』에 이르러 현실성을 띤 느낌이다. 경희는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으면서 화자를 객관화한다. 80년대의 폭력적 혁명 감각도, 노동자의 자기 비하적 수동성도 그의 것이 될 수 없다. 김사과는 광기와 흥분을 멈추고, 동일성의 공감 혹은 감옥에서 나와 차이에 의한 구별 감각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세계를 보는 엄밀함을 확보하고 화자 혹은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치와 행동에 현실적 구체성을 얻는다. 김사과는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며 청년으로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의 ‘소설되기’는 이 지점에서 중산층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실천 방식을 묻는다. 자신이 이미 체제 내부에 있는 순응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분노의 정념을 노출하여 한 번의 기분풀이나 자기 파괴로 끝나기보다는 체제 내부에서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소설되기’의 양심적이고 현실적 실천이다.



현실을 알레고리나 비유로 암시만 해주어도 작품의 현실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시절은 소설가에게 행복한 시대였다. 보편의 대의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소설가가 그릴 수 있는 현실이란 세밀한 묘사화나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두루뭉술한 관념으로 그린 스케치다. 아예 현실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쿨하게 선언하면 솔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참에 김사과는 가정과 학교와 대학과 직장과 예술가의 세계 등을 무대로 고집스럽게 현실 얘기를 해왔다. 현장을 날것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밀화이기도 하고 부정 정신이나 혁명을 거론한다는 점에서 스케치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말하고 싶은 그가 현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는 지점은 ‘소설되기’를 통해서였다.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정념 유발자에서 정념 발산자로 그는 소설 ‘쓰기’를 ‘되기’로 바꾼다. 소설 속의 삶과 작가의 의식과 정념을 일치시키겠다는 의지는 소설과 현실이 기실 별 상관없는 것처럼 되었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소설속의 절망적 감정 상태가 되어버림으로써 배수진을 친다. 그 자체가 현실의 징후가 되어 소설과 현실의 연관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절제된 묘사와 완결된 구성미를 포기하며 김사과라는 일관된 정념의 화신을 무대에 올려 보낸다. 그리고는 청년 세대의 위안자가 아닌 분신의 영매가 되어 씻김굿을 벌인다.



김사과 작품 속 청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 가정을 이루며 생활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김사과는 그들이 요즘 말로 ‘강남좌파’로 물러나거나 체계의 거대함에 겁먹고 한번 저항해 본 자의 변명거리를 지닌 채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징후가 보인 대로 부정 정신의 에너지에다 현실성을 부가해 구체적인 생활 세계를 투시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내부자이고 중요한 것은 내부의 균열을 내는 성찰성이다. 김사과의 제2기 ‘소설되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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