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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앞날 깜깜한 남자와 동화처럼 결혼, 영화처럼 인생 반전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가 서울 강동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육아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스물세 살 여자는, 스무 살 꽃 같던 연하의 남자에게 꽂혔다. 하필 그는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던 백수였다. 학력은 고졸에 장래 희망은 영화감독이지만 당장은 무직. 게다가 부모님까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먹여 살리는 소년가장이었다. 명문대 나온 멀쩡한 딸의 앞길을 걱정한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당연히’ 반대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버지의 재떨이가 철없는 딸의 머리 위로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6> 영화사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결국 5년 후, 딸이 노처녀로 늙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그녀의 부모는 결혼을 승낙하고야 만다. 단, 한 푼도 대주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먼 여자는 쾌재를 부르며 살림을 차렸다. 11평짜리 영세민 아파트에서 연로하신 시할머니, 고등학교를 자퇴한 나이어린 시동생과 함께. 당시 이 부부의 앞길에 서광이 비추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영화 같은 인생 대반전을 만들어냈다. 영화감독을 하겠다며 3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남편 류승완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감독이 됐다. 시동생 류승범은 충무로의 대세배우, 그녀 자신은 꿈에 그리던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44) 대표다. 지난해 787만 관객 돌풍을 일으킨 영화 ‘베를린’이 바로 이 세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그 때는 아무도 저희가 지금처럼 영화사를 차리고, 베를린 같은 영화를 만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건 우리 스스로도 마찬가지였죠. 가방끈 짧은 순서대로 잘 풀리더라고요. 고등학교 중퇴인 도련님이 제일 잘 나가고, 그 다음 고졸인 남편, 대학 나온 제가 제일 갈 길이 머네요(웃음).”

“하고싶은 영화 만들어라” … 남편 무한지원
남편의 성(姓)인 ‘류’와 아내의 성 ‘강’을 따서 농담하듯 만든 이름, 외유내강. 그러나 이 말처럼 그녀를 잘 묘사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강혜정 대표는 충무로에서 ‘내조의 여왕’으로 통한다. 어린 시절, 독립영화를 만드는 워크샵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여년이 넘도록 영화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사업 파트너로서 언제나 함께 해왔다. 가끔 일 때문에 부딪칠 때도 있지만 그녀는 제작자로서의 선을 분명히 지키는 편이다. 시나리오와 캐스팅이 완료되면 일절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그 뒤부터는 감독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 “영화가 망해도 책임은 내가 진다. 당신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라.” 그건 제작자인 동시에 아내인 그녀만 줄 수 있는 무한신뢰다. 그녀의 시선은 단지 잘 팔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 남편인 류 감독을 한국 영화사에 남기는 것 역시 중요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자처한 또 하나의 무한 책임이 있다. 그의 열정의 근간이자 부부의 모든 것인 세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다.

내가 강 대표에게 가장 놀란 점도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보다 아이 셋을 키우는 워킹맘이라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세 아이의 엄마지만 아이 셋 양육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친정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그 치열한 영화판에서 그녀가 겪었을 산전수전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어요. 제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영화를 즐겁게 못했을 거예요. 모성애라는 본능은 생명의 근간이기도 하지만 일에서도 원동력이 되는 가장 중요한 힘이었죠.”

두 사람이 지독한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 덕분이었단다. 류승완 감독은 27살에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해 청룡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거머쥐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만드는 작품마다 화제를 낳으며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나가는 감독이라 할지라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영화계다. 2009년 야심차게 찍었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라는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주 연락하던 투자자들의 전화가 뚝 끊기고 직원들 월급조차 주지 못할 형편이 됐다. 삼성동에 있던 사무실마저 빼서 남양주 세트장에 회사 집기를 맡기고 돌아오던 날, 그녀는 펑펑 울었다.

게다가 하필 그 무렵, 친정아버지도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영화 실패로 힘들어진 딸과 사위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치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나온 아버지. 서서히 떠나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도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혜정 씨의 정신줄을 붙잡아 준 것은 아이들이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오히려 엄마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런 자식들을 보며 그녀도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때마침 남편이 부업으로 CF를 몇 개 찍으면서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집 근처에 영화사 사무실도 다시 얻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몇 년 간의 힘겨운 고생 속에서 만든 영화가 바로 ‘베를린’이었다. 관객이 최소 500만은 들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 블록버스터였다. 류승완 감독은 삭발까지 해가면서 촬영에 몰입했고 그녀 역시 잠이 안 올 정도로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영화가 잘 돼 빚도 갚고 입지도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혜정 씨는 당시 열 살이었던 둘째 서진이가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단다.

“엄마는 좋아하던 꿈이 직업이 되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요즘 엄마 표정은 그렇지 않아요.”

그 순간, 혜정 씨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게 과연 내 꿈의 끝인가. 나름대로 뭔가를 한다고 했지만 어느새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앞으로 어떤 꿈을 꿔야 할 것인가. 혜정 씨의 시선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게 한 것은 천진한 열 살 아들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가족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고.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늘 깨닫게 해주고 인간적으로 더 깊게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일이 나를 성장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라고.

세 아이 키우는 영화판의 수퍼우먼
요즘 그녀의 가장 큰 스승은 사춘기를 맞은 열일곱 살짜리 첫째 딸이다. 대안학교에 다니던 첫째는 여러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체 방학’중이다. “내 꿈은 내가 알아서 한다”며 엄마한테 꼬박꼬박 말대답 하면서도 낮잠 자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그렇게 매일 속이 터지면서도 혜정 씨는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법, 아이가 자기걸음으로 걸을 때까지 지켜보는 법을 연습중이다.

그녀처럼 일하는 엄마들의 삶은 ‘세 갈래 머리땋기’와도 같다. 일과 아이, 그리고 나라는 운명적 사건들을 하나로 엮는 것이다. 마음은 세 가닥을 골고루 섞어 예쁘게 땋고 싶지만 절대 쉽지 않다. 일에 치중하면 아이의 머리카락이 적게 잡히고, 아이에 치중하면 일이 부실해져 머리가 삐뚤빼뚤 이상한 모양이 된다. 초보 때는 이렇게 밸런스가 깨진 모습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관두자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그 상태로 30년 살다보면 그 이상한 모양도 하나의 완벽한 밸런스가 된다.

“예전에는 저도 일과 아이들 사이에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나가서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럴까. 일한답시고 괜히 애들 고생시키는 건 아닐까. 그런데 20년 가까이 해보니까 한가지 배짱은 생기더라고요. 아무리 부족한 제작자이고, 엄마이고, 아내이지만 그 역할을 나보다 잘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외유내강. 그녀처럼 자기걸음을 아는 사람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론 강하다. 조금 늦어도, 지금 조금 못나도 괜찮다. 자신을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그 무엇도 기다릴 수 있으므로. 아마 그녀는 10년 후에도 씩씩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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