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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가축 키우고 농사 짓는 순간 인간의 불평등 시작

소유한 재산을 세고 있는 ‘대금업자와 그의 부인’. 네덜라드 화가 크벤틴 마씨스(Quentin Matsys)의 1514년 작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진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의 법전.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이 세워지기 이미 500년 전인, 기원전 2400년 메소포타미아 라가시(Lagash) 왕국의 우르카기나(Urukagina) 왕은 명령한다.

<31> 소유란 무엇인가

“아무리 농가에 탐나는 당나귀가 태어났더라도, 현장 주임이 ‘내가 주는 가격에 그 당나귀를 팔아!’ 라고 말해선 안 된다. 만약 농부가 팔지 않겠다 하더라도, 주임은 농부를 때려선 안 된다. 아무리 귀족이 농부의 집을 갖고 싶다 해도, ‘내가 주는 가격에 그 집을 팔아!’ 라고 해선 안 된다. 만약 농부가 집을 팔지 않겠다 하더라도, 귀족은 농부를 때려선 안 된다.”

신분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의 ‘재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우르카기나의 명령. 그런데 개인은 무엇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키운 당나귀? 내가 짓지는 않았지만, 내 돈을 투자해 지은 집? 노예의 몸? 내 몸? 공기? 시간? 은하수?

점토판에 남겨진 우르카기나 왕의 업적.
로크 “소유는 노력과 부족함 있어야 가능”
먼저 그 누구도 ‘우주’란 존재 그 자체는 소유할 수 없다고 가설해 보자.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선 소유하는 사람, 그리고 소유되는 대상, 둘 다 모두 우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져야 한다. 물론 힌두 베단타학파 같이 “소유는 내가 우주로부터 독립된 존재란 착각에서 오는 착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유는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다.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개인 소유는 독립성과 더불어 ‘노력’과 ‘부족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봤다. 모자라지 않는 것에 대한 재산권이란 무의미하며 노력 없이 얻은 건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우주에 무한의 당나귀들이 존재한다면 우르카기나의 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노력’이란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우르카기나의 법이 세워지기 전인 먼 옛날, 사냥과 채집을 통해 살아가던 고대 인류를 한번 상상해 보자. 투자를 능가하는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이 사업의 기본이듯, 모든 사냥의 핵심은 투자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냥은 언제나 확률 게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포식동물들이나 아마존 원주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매일 사냥을 나간다 해도 평균 3∼5일에 한번 성공할 뿐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차별화된 전략이 가능하겠다. 표범 같은 고양잇과의 동물들은 혼자 사냥하는 것을 선호한다. 어렵지만 성공하면 사냥의 산물인 프로테인(protein, 단백질) 전체를 독차지할 수 있어서다. 반대로 인간을 포함한 많은 포유류와 육식동물들은 그룹으로 사냥한다. 사자 한 마리보다 10마리가 함께 사냥에 나서면 성공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물론 사냥에 참가한 10마리 모두가 동시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두목이 음식과 여자 차지하던 시대
그렇다면 사냥된 먹이를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어떤 윤리적, 도덕적, 법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노력한’ 구성원들과 나눠야 할까? 자연은 법에도, 도덕에도, 윤리에도 그다지 관심없다. 윤리와 도덕은 현실과 상황에 맞게 이미 정착된 ‘진화적 안정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 ESS)’을 사후에 우아한 문장으로 정당화할 뿐이다.

최적의 분배 전략은 참여 구성원의 수와 생산의 효율성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 구성원을 갖고도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사자, 늑대 무리들과 같이 초기 인류의 분배 역시 강한 자의 법을 따랐을 것이다. 가장 힘센 두목이 대부분의 음식과 여자를 차지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두목이 남긴 찌꺼기를 먹는 세상. 일본에서 여전히 아버지·아들·딸이 사용한 물에서 엄마가 목욕하는, 뭐 그런 원리 말이다.

이런 ‘자연 상태’의 삶을 “외롭고 불쌍하며 불쾌하고 짐승 같으며 짧다”고 본 16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그는 그렇기에 페니키아 전설에 나오는 ‘레비아탄’이란 무시무시한 바다괴물, 즉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 원수가 개인의 재산과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찌꺼기를 조금 더 정의롭게 분배하는 ‘자비로운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언제나 다른 인간에게 잔인한 늑대(Homo homini lupus)였을까? 물론 아니다. 수십 명의 구성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먹이는 한정돼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식의 삶. 사냥에 성공해 ‘배 터지게’ 먹는 날도 있고, 실패해 쫄쫄 굶는 날도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오늘 배 터지게 먹어도 내일을 위해 남길 수 있을 만큼의 잉여 먹이를 생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더 큰 동물(매머드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을까!)과 더 많은 동물들을 (매머드 10마리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잡으면 되겠다. 더 크고 더 많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선 10∼20명이 아닌 50∼200명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50∼200명의 힘을 모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위험한 매머드 사냥을 같이 하자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픽션 생산 못 해 네안데르탈인 멸종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멸종된 네안데르탈(Neanderthal)인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자 하라리(Yuval Harari) 교수는 베스트셀러 저서인 『동물에서 신으로: 사피엔스의 짧은 역사』 에서 “픽션(fiction)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비슷한 크기의 뇌를 가졌지만, 사피엔스들만 이야기와 전설과 신화와 윤리를 꾸며내기 시작했기에 100명, 1000명, 1만 명을 모아 마을·도시·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이론이다: 매머드 그림을 오늘 동굴에 그리면, 내일 잡힐 거라고. 사냥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올 거라고.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더 좋은 어디선가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거라고. 정의와 평등은 가능하다고, 우리만이 선택된 민족이라고. 삶엔 의미가 있다고….

10명의 사냥과 100명의 사냥. 무슨 차이일까? 10명 중 가장 힘센 두목이 나머지 9명 정도는 위협하고 제어할 수도 있겠다. 두목 자신이 가장 좋은 부위를 먹고, 남은 걸 두 번째 힘센 녀석에게 주면 된다. 비슷하게 2인자는 8명, 3인자는 7명만 통제하면 굶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99명을 동시에 제어할 순 없다. 동시에 100명 모두가 필요한 매머드 사냥. 예전 같은 ‘위에서 아래로’ 방식의 분배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홉스의 추측과는 달리 ‘자연 상태’의 인류 역시 특정 상황에선 협력과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만들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냥과 수렵·채집을 버리고 가축과 농업을 시작한 순간, 인류의 짧은 ‘평등’은 끝나고 만다. 이제 천문학적인 생산력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100명 모두 일하지 않아도 100명의 하루치 식량뿐 아니라 내일, 다음주, 내년에 먹을 것까지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성직자는 신에게 기도하며, 과학자는 연구하고, 귀족과 왕은 농부에게 땅과 도구를 빌려준다.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가능해졌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불평등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완벽히 평등한 사회만이 행복한 사회일까? 플라톤이 구상한 이상적 사회에선 모두 공동생활을 한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생산의 결과물을 평등하게 분배한다. 아나키스트 이론가인 프랑스의 피에르 프루동(Pierre-Proudhon)은 “노동을 통해 개인이 직접 생산한 것 외의 모든 소유는 노동력을 투자한 다른 누군가의 것을 도둑질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소유는 절도다!”라고 외친 것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플라톤 식의 공동 소유 사회를 꿈꿨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생산에 필요한 자산과 자원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2400년 전에 지적하지 않았던가? 개개인의 것은 청소하고 키우고 아끼지만, 공동으로 소유한 것은 방치한다고. 그리고 능력과 선호도가 다른 사람들의 차별화된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투자한 시간과 기여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분배하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스코틀랜드 출신 계몽주의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구성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개인의 소유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개인 소유의 핵심은 생산성이란 말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같은 자유론자들은 개인 소유는 생산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도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소유가 무의미해지면 자유도 사라질까
소유와 생산성, 그리고 자유.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꼭 무언가를 소유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불교나 힌두철학에서 주장하듯, 소유는 행복에 부담이 될 뿐일까?

소유의 핵심은 노력과 부족함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주장한대로 인류는 어쩌면 이미 ‘제로 한계비용 사회(Zero-marginal cost society)’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회의 모든 생산 인프라 그 자체가 거대한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시스템이 된다면, 생산의 한계비용(marginal cost)은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더 이상 추가 노력 없이도 추가 생산이 가능한 미래사회. 정보와 책과 스마트폰이 공기와 마찬가지로 무료라면? 개인 소유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 될까? ‘시장과 경제’의 미래는 무엇일까? 개인 소유가 무의미해진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없는 사회일까?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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