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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DJ, 국민 설득해 환난극복 성공 … 측근 부패관리엔 실패

1998년 6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영빈관에서 미셸 캉드쉬(사진 왼쪽) IMF 총재와 제임스 울펜손 세계은행 총재를 만나 손을 잡고 있다. 김 대통령은 두 기관 총재에게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협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중앙포토]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됐다. ‘외환 위기’가 절정인 상황에서 무엇보다 세계 여론의 반응이 궁금했다.

<13> 김대중과 그의 사람들

홍콩 특파원이던 나는 아침 일찍 완차이(灣仔) 사무실로 나갔다. 수북이 쌓인 신문 중에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을 펼쳐들었다. 순간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다’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통’ 돈 커크 기자는 “남아공 넬슨 만델라의 당선에 버금가는 쾌거”라며 극찬했다. 나는 안도했다. 다른 언론들도 호의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이자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황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상 최고인 미화 5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지만 기업 도산은 가속화되고 외환· 증권시장은 붕괴 직전이었다.

그러나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철저히 방관했다. 김영삼 정권 말기 한·미 관계는 심각했다. 외국 언론들은 라틴 아메리카식의 국가부도(디폴트) 사태를 예견했다. 한국의 국가 신인도는 최악이었다.

인기 영합보다 정공법 택한 DJ
이런 상황 속에서 국제 여론이 DJ(김대중) 당선을 반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DJ는 당선되자마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초 “IMF 재협상” 우려와 달리 “외환위기는 우리 탓”이라며 책임을 인정했다. 사실상 면접심사차 온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에게 “IMF 구제조건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외신은 환영했다. 심지어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언제 파산할지 모르겠다”는 DJ의 실수성 발언에도 “한국이 드디어 진실을 말한다”며 호평했다.

마침내 꿈적 않던 미국이 움직였다. 12월 25일 0시(미국 시간 24일 오전 11시), 서방 13개국이 우선 연말까지 받아야 할 빚(단기채무)을 이듬해로 연기해주고, 추가로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클린턴 정부가 한국에 주는 성탄절 선물이었다. 한국 경제의 수직 낙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IMF 후폭풍이 본격화되면서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실직자가 쏟아져 나왔고 서울역 등지에 노숙자들이 넘쳐났다. 곧 노사갈등이 전쟁처럼 불거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DJ는 한국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대우그룹이 공중 분해되고 현대·삼성그룹의 일부도 쪼개졌으며, 부실 금융기관 정리가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사실 국민들은 승승장구하던 우리 경제의 몰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DJ는 인기 영합보다 정공법을 택했다.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과 애국심을 호소했다. 국민들은 감내했다.

압권은 ‘나라를 살립시다, 금을 모읍시다’라며 전개된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한국은 당초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8월, IMF를 졸업했다.

돌이켜 보면 6·25 이후 최대 국난(國亂)이던 위험천만한 시기에 DJ의 리더십은 탁월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국민에게 끌려가지 않고, 국민을 끌고 갔다는 점이었다.

지역주의에 빠진 측근들 권력 남용
집권 4년차에 접어든 2001년 1월 초, DJ는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비쳤다. 2000년 6월 북한방문, 12월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기세등등하던 시절이었다.

1월 말 안정남 국세청장이 중앙언론사 23개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발표했다. 소위 ‘언론개혁’의 실행이었다.

바야흐로 DJ 정권과 언론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정확히는 조·중·동 등 3개 보수신문사를 겨냥한 것이다. 국세청·검찰·공정위가 총동원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혁을 내세웠지만 방법은 ‘옛날 그대로’였다. 신문사 간부들에 대한 도청과 유언비어, 협박이 노골화됐다.

회유작전도 병행했다. 청와대와 국세청은 전형적인 ‘Whisky & Cash’로 나왔다.

신문사도 기업인 이상 세무조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대 정권들은 언론사의 정권 협조를 위해 칼날을 겨눴고 DJ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4년 반 만에 귀국해보니 한국 권부(權府)가 ‘권력에 만취된’ 느낌을 받았다. 청와대, 여당, 검찰, 국정원, 기무사, 경찰 간부 등 이른바 정권 실세들이 유착해 얽히고설켜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민간 사업가들과 조폭이 가세해 각종 ‘게이트’를 양산했다. 이용호·정현준·진승현·최규선 게이트 등….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지역주의(Regionalism)’가 도사리고 있었다. 건국 후 처음 호남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차별받던 지역 인맥들이 뭉쳐 온갖 특혜와 이권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과거 영남 정권 시절 못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 지역마저 더 균열되고 있었다. 호남 인맥이 전남·전북으로 갈리고, 전남은 광주·목포로, 광주는 다시 특정 고교들끼리 갈등을 겪는 소지역주의의 세포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정권과 언론 간 전쟁이 한창일 때 현직 국정원 간부들이 동료의 비리를 제보하려고 내가 몸담은 신문사를 찾아오기도 했다. DJ 정권 초기 잘나가던 전남 인맥이 전북 출신에게 밀리면서 반기를 든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이렇게 되다니….

결국 집권 5년차(2002년)에는 DJ의 2남, 3남마저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됐다. DJ정권의 전반기가 명(明)이라면 후반기는 명백한 암(暗)의 시대였다.

임기말 DJ 2남 김홍업(왼쪽), 3남 홍걸씨가 각종 게이트로 구속되는 모습.
임기 말엔 두 아들도 비리 연루돼 구속
한국을 ‘IMF 사태’로 빠뜨린 외환위기는 아시아 전역을 강타했다. 특히 수하르토의 32년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가 심했다.

그해 5월 수도 자카르타 소재 트리삭티대에서 학생 6명이 경찰의 총을 맞고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시위대는 폭도로 변했다. 현장에서 취재 중이던 나는 이들이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며 방화·약탈·파괴를 벌이는 무정부 상황을 목격했다. 9일 뒤 수하르토는 32년 철권통치를 접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경제는 우리 1970~80년대 개발독재 시대와 비슷했다. 총칼로 반대세력을 억누르고 권력을 유지하는 통치 형태도 비슷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박정희가 개인적으로 부패와 담을 쌓은 반면, 수하르토 일가(一家)는 친인척 20여 명이 인도네시아 알짜 국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한때 ‘아시아의 모델’로 불리던 필리핀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보다 4년 뒤(1965년) 집권한 마르코스는 70년대 부인 이멜다(마닐라 시장)와 아들(대통령 보좌관) 등을 중심으로 족벌독재체제를 구축, 부정축재를 자행하는 바람에 ‘아시아의 환자’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비슷한 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처럼 식민지배를 받다가 1945년 제2차대전 종료 후 독립됐다. 당시 이들 형편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았다. 그러나 50년이 흐른 후 상황은 달라졌다. 뒤에 처져있던 한국은 산업화·민주화를 다 이룬 우등생이 되었지만 아시아 상당수 국가들은 그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한 만년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한때 쌀 수출 세계 1위로 아시아의 부자였던 미얀마 역시 빈곤과 독재에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의 5·16 다음해인 196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네윈은 40년 가까이 국민들 숨도 못 쉴 정도로 철권통치를 자행해 오면서 나라를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시켰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박정희 같은 걸출한 지도자도 없지만, 김대중·김영삼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민주화세력도 없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단 권력을 잡으면 견제나 제어를 받지 않고 절대 권력→절대 부패로 이어졌다.

전사형 박정희, 선비 스타일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의 가장 큰 업적은 민주화를 통해 산업화를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세계가 경탄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뿐 아니라 김대중 등 뛰어난 야당 지도자들의 견제와 비판이 있었기에 성취될 수 있었다.

만약 박정희만 있고 김대중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인도네시아·필리핀·미얀마·중동·북한 등 다른 개도국들이 걸어간 길, 즉 독재→절대 권력→부패→쇠락→침몰의 도식적 길을 걸어갔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을 정점으로 한 민주화 세력이 독재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해 줄기차게 항거한 덕분에 산업화 세력이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수정을 해가며 제 궤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산업화가 이뤄지고, 그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민주화가 안착해 명실상부한 ‘한강의 기적’이 이룩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대중과 박정희는 동시대에서는 라이벌이자 앙숙이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란 대장정을 성취한 환상의 파트너요 동지다.

두 사람은 상이한 성격과 경력의 소유자다. 김대중이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며 양심과 원칙을 중시하는 온유한 선비 스타일이라면, 박정희는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과단성 있고 목표 성취를 위해 독재도 불사하는 냉혹한 전사(戰士)다.

만약 김대중만 있고 박정희는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5·16이 일어난 1961년은 1인당 국민소득 82달러의 지구상 최빈곤국 시절이었다. 나약하고 무능한 장면 정권의 후임으로 박정희 대신 김대중이 등장했다면 나라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온갖 혼란 속에서 고민하고 흔들리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실패한 정치인으로서 기록되었을 지도 모른다.

정치인 김대중도 공과(功過)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박정희와 함께 그 시대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과연 후손인 지금 세대는 시대적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은 불편하다. 사회 곳곳이 편이 갈려 서로 상대방의 공(功)은 보지 않고 과(過)만 보려고 한다. 견제→균형→발전의 선순환이 아니라 반목→분열→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두 세력이 편협함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 장래는 밝을 수 없다. 그런 편협함은 비단 정치권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 즉 가정에서 일터에 이르기까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득이 2만 달러를 넘고, 아시아 대부분이 부러워하는 나라에 살면서도 정작 우리 마음은 가난하고 찌들려 있다.

다시 돌아보자. 박정희가 있어서 김대중이 있었고, 김대중이 있어서 박정희가 빛났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는 편협함을 떨쳐 버리고 상대방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산업화 세력이 가진 것을 좀 내려놓고, 민주화 세력은 자기네만 선하고 옳다는 생각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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