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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묵은 '청년기' 고택 … 6·25때 3사단장실로 써 총탄 흔적이

성암재의 사랑채 툇마루에 앉은 주인 내외(강춘기·손희정)가 다정히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한옥은 국가 지정 중요민속 문화재인 만산고택으로 춘기씨의 6촌 형님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구조로 연결돼 있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마당에서 사랑 마당이 훤히 내다보인다.
작년 여름 경북 봉화군 춘양에서 아주 흥미로운 조선집 하나를 발견했다. 한옥은 비슷한 듯 보여도 똑같은 집이 거의 없다. 땅 모양에 따라, 앉힌 방위에 따라, 가문의 전통에 따라 집 구조가 다 다르다. 그걸 어지간히는 구경해 왔다고 자부하는 내 눈에도 춘양의 그 집은 전혀 새로웠다. 안동·봉화에선 500년 묵은 기와집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지은 지 100년 안쪽의 ‘청년기’ 집이란 게 더 희귀해보였다. 낮은 안채를 높은 사랑채가 가려주는 입구(ㅁ)자 구조인 건 여느 조선집과 같다. 그러나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문이 널찍이 트이고 사랑채 뒤쪽 툇마루가 안마당으로 연결된 것이 흥미로웠다. 건축양식에도 개화바람이 불기 시작한 게 보인달까. 안채와 사랑채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져 사랑마당에서 찍은 사진 속에 안마루에 앉은 내 모습이 겹겹의 문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독특했다.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27) 봉화 춘양 강춘기·손희정 부부의 성암재



사랑채 처마에 걸린 성암재 현판.
춘양목의 고장답게 발갛게 속살이 살아나오는 금강송의 나뭇결과 담장 아래 흔들리는 갖가지 일년초의 향연도 아름다웠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폭넓은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안주인의 웃음이었다. 조선 기와 지붕 아래서 이런 세련된 웃음과 스커트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녀는 양동마을 경주 손씨 ‘서백당’의 종갓집 딸이라 했고 큰 병에서 막 회복한 참이라 했다. 언젠가 꼭 다시 오리라 약속했고 일년 만에 나는 그 집에 다시 갔다.



사랑주인 이름은 강춘기(1950년생), 안주인 이름은 손희정(52년생). 둘은 평생 도시에서 살림을 꾸리다 기업대표였던 남편의 은퇴 후 조부가 살던 옛집으로 돌아왔다. 2012년 가을, 혼인한 지 40년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할아버지의 호인 성암(醒巖)을 당호로 삼아 ‘성암재’란 현판을 사랑채 처마아래 걸었다. 사람의 역사는 살림집에 쌓인다. 짧은 시간에 거대도시가 생겨나고 수백만호의 새집을 한꺼번에 짓는 ‘토목’으로 나라살림이 가동되는 동안, 개인의 역사는 여지없이 납작해지고 얄팍해져 버렸다. 이럴 때 돌아갈 옛집이 있다는 건 드문 행운에 속한다. 선대가 축적한 역사에다 개인의 역사를 잇댈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게 주는 혜택은 겉으로 셈할 수 있는 그 이상이다.



나무와 풀, 꽃이 어우러진 사랑마당의 모습.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 자연스러운 멋이 우러난다.


‘이야기가 있는 집’이 예찬하고 싶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고결한 정신은 서책 속에 있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 있다.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바로 집이고 구체적인 집이 있어야 추상적인 정신이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성암재는 1918년, 춘기씨의 증조부인 의재 강필 선생이 셋째 아들 성암 강승원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장독간 뒤로 만산 고택과 통하는 일각문이 보인다.
"의재선생은 조선말 중추원 의관과 도산서원장을 지낸 만산(晩山) 강용 선생의 아드님이었어요. 당신은 외동이지만 아들이 다섯 있었고 셋째가 저의 조부셨어요. 맏이는 만산고택을 물려받고 둘째는 저 뒤쪽 ‘북청댁’이란 집으로 양자를 가시고 셋째인 저의 조부가 살림을 나면서 집을 새로 지어주셨지요. 부모님 집(형님집)과 내왕하라고 두 집 사이에 저렇게 일각문을 내 놨지요. 만산고택이 지어진 게 1878년이니 성암재는 그보다 40년이 늦은 만산고택의 별채쯤 되는 거지요. 전에는 이 근처에 우리 대소가의 덩그런 기와집들이 20여 채 있었습니다. 그런데 60, 70년대를 지나면서 곡절 끝에 팔아버려서 서울 부자들이 다 뜯어갔어요. 우리집이 이렇게 지켜진 건 도시에 안 나가고 집을 지킨 백기형님(만산고택 주인) 덕분입니다.”



바로 곁에 있는 만산고택은 봉화의 대표적 한옥으로 집주인 강백기씨는 조부가 형제분이니 춘기씨와는 6촌간이다.



“개화하신 조부는 한때 이 집을 뜯어 서울로 옮길까하는 궁리가 많으셨대요. 아버지도 세무공무원으로 서울에 계셨으니 돌아올 기약도 없고. 우리들에게 이 집은 한때 ‘계륵’이었어요. 내려올 수도 없고 버려둘 수도 없이 관리에 돈만 자꾸 들어가는!”



사랑채에 있는 방 2개는 현재 고택 체험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손님방으로 쓰인다.
성암재가 서울에 있다면 경제가치야 엄청나겠지만 춘양에 자리 잡고 있는 편이 우리들에겐 훨씬 낫다. 작년부터 사랑채의 방 둘을 개방해 고택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 근무하던 춘기씨는 해외근무가 유독 많았다. 홍콩에서 6년 반, 나이지리아에서 4년 반을 머무는 동안 부부가 유럽 전역을 숱하게 여행했다.



“80년대 프랑스 고성에서 숙박을 했는데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우리도 언젠가 비워둔 춘양의 집을 이렇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지요. 그러려면 조금씩 준비를 해두자 싶어 저는 차 공부를 시작했고 남편에게는 바리스타 공부를 권유했지요.” 아내 희정씨의 말이다. 그래서 둘은 지금 베테랑 차인(茶人)이고 바리스타를 심사하는 특급 바리스타다. 성암재에 머무는 손님들은 최고의 연화차와 커피맛을 경험할 수 있다. 성암재 너른 뜰엔 흰 테이블보가 바람에 펄럭이는데 그 위에서 천천히 커피를 내리는 남편과 사랑대청 맑은 마루에 흰 광목보를 깔고 함지박만한 찻사발에 천천히 백련을 우려내는 아내의 모습은 인생의 또 다른 장엄이다. 성암재에 한번 다녀간 이들은 블로그에 무성한 성암재 예찬을 올린다. 그 바람에 찾아오는 사람을 실망시킬 수 없어 차 대접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채에 있는 방 2개는 현재 고택 체험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손님방으로 쓰인다.
성암재는 대지는 450평에 건평이 35칸 쯤 되는 집이다. 앞면에 6칸의 행랑채가 놓이고 마당 지나 사랑채와 안채가 ‘ㅁ’ 모양으로 앉았다. 사랑채엔 2칸 규모의 방 둘 사이에 매우 독특한 형식의 꾸밈마루가 놓여 문을 열면 안채와 연결된다. 대청마루의 살짝 들린 턱, 아름다운 장식 천정, 문짝에 박인 꽃무늬 무쇠 장석(裝錫)들에 두루 일찍이 구경할 수 없었던 ‘우아’가 깃들어 있다. 이런 독특하고 세련된 집을 두고도 당시 춘양에서 유명한 윤 목수가 지었다는 말 외에 건축에 대해 특별히 전해오는 얘기는 없다니 아쉽다.



성암재는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우리 근대사가 불운하니 집에도 깃든 곡절이 많을 수밖에!



일제 강점기에 의재선생은 거처하는 만산고택 아닌 이 집에서 상해 임정 요인들을 만났다. 일경이 눈치채지 않게 군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어려운 사람들에겐 늘 곳간을 열어뒀다. 덕분에 빨치산이 출몰하던 6·25 동란의 와중에서도 만산고택엔 몸을 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춘기씨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커피 전문가다.
“전쟁 때 우리 사랑채를 국군3사단장실로 썼어요. 어린 희완 삼촌이 사단장 당번병과 친구가 되어 놀다가 당번병의 실수로 가슴에 총상을 입었어요. 이게 그 총알 자국이에요.”



기둥에 움푹 팬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아버지가 당시 명약으로 소문난 페니실린을 가져 오신 덕분에 상처가 한 달 만에 아물었대요” 춘기씨의 고모는 경주 최부자집 맏며느리가 되셨다. 고모와 대고모들이 다들 경북 일대 뜨르르한 집안의 종부로 출가했으니 도산 번남댁, 오미동 유연당이 다 인척으로 얽혀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꽃을 좋아하신 조부는 따님의 혼례식 날 만산고택과 성암재를 온통 국화로 가득 채우셨지요.”



이 부부의 혼인 이야기도 특별하다.



“처의 외조부와 제 조부가 친구셨어요. 두 분이 만나 사돈 하자고 결의하셨고 세 번째 만나는 날 결정을 내리라 하시대요”



희정씨가 봉화 강씨 가문에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숫감 목록에는 특별한 게 있었다. 몇 그루의 향나무였다. 오백년 묵은 향나무로 소문난 서백당의 딸이니 새 사돈께 그것을 선물하고 싶으셨던 거다. 좁은 지면에 이 집의 구구절절 역사를 어찌 다 말하랴. 올해 아흔이신 춘기씨의 부친 강희탁 선생이 자신의 일생을 가사체로 회고한 책을 읽으며 나는 새삼 삶이 찬란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십만리 이국땅 ‘이바단’에서/서로 만나 반기니 마음이 흐뭇/애비가 출근길에 원석이 태워/영국인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 하학길은 어미가 데리고 오고/ 오후엔 수영장서 즐겁게 노니/ 지연남매 수영솜씨 정말 볼만해’ 아들 가족을 만나러 아프리카에 들렀던 기록에 나는 실없이도 무릎장단을 친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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