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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점진적인 통일이 좋은 통일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경제학의 비조(鼻祖)인 애덤 스미스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사회를 마치 장기판으로 여기고 수를 짜서 즉각 집행하는 정책결정자라고 했다.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체제이행 과정에서도 그의 통찰은 유효했다. 국제금융기구를 필두로 한 일단의 서방 경제학자와 정치가들은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해 신속히 자본주의로 이행만 하면 경제가 금방 좋아질 것처럼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국가들은 15~70% 정도 경제 규모가 축소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했다.



 남북한 통일도 마찬가지다. 급진적으로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은 매우 클 것이다. 흔히 1990년 이후 15년 동안 약 2000조원의 비용을 지출한 독일 통일의 경우를 참고해 남북한 통일 비용을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독과 동독의 인구 비율은 4:1이었던 데 비해 남북한은 2:1이다. 그리고 서독과 동독 주민의 일인당 소득 비율은 3-5:1 정도로 추정되는 데 비해 남북한의 경우는 20-40:1에 달한다. 즉 독일식으로 통일한다면 상대적 비율로 볼 때 한 사람의 남한 주민이 부담해야 할 통일 비용은 서독에 비해 훨씬 높을 것이다.



 통일 초기 독일은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치렀다. 90년 통일 이후 2년 동안 동독의 산업생산액은 3분의 2 감소했으며 이 기간 동안 서독으로부터 동독으로의 순이전지출은 매년 100조원을 상회했다. 독일 이자율은 89년 3%대에서 92년 8%대로 상승했다. 유럽환율메커니즘(ERM)의 통화단위인 ECU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독일 화폐의 가치가 이자율 상승으로 절상되자 ERM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영국 파운드와 이탈리아 리라가 92년 ERM에서 떨어져나가는 대파동을 겪었다. 이와 같이 통일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잘 준비된 서독 경제도 급진적 통일의 직격탄을 맞자 크게 휘청거렸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부채 수준과 환율 방어망이 이 정도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우리는 통일 그 자체보다 좋은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 좋은 통일은 점진적인 통일로써 가능하다. 점진적인 통일은 북한 주민과 제도가 통일을 위한 적응 기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남한의 제도와 국민 의식도 통일 친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통일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통일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고 통일 이후 사회 갈등도 크게 줄 것이다.



 좋은 통일을 이루려면 북한에서 많은 사(私)기업이 생겨 경제 성장을 주도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 주민도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경제 성장에 자부심을 느끼며 통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가운데 인적 자본만으로 지금의 한국 경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사기업을 허락하고 남북한이 협력할 수 있는 여건만 갖춘다면 자본과 기술은 북한 경제 성장에 더 이상 제약 조건이 되지 않는다. 이는 남한을 비롯한 외부에서 충분히 지원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북한 경제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인적 자본이다. 북한의 취약한 인적 자본을 그대로 두고 통일된다면 남북한 주민의 생산성 격차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건강, 교육, 숙련도, 인지 능력, 근로 의욕,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 등이 생산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북한 이탈 주민과 서울 시민 각각 150명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 이탈 주민의 평균적인 인지 능력은 서울 시민의 절반 이하에 머물고 있다. 또한 미로를 푸는 게임을 했을 때도 서울 주민은 5분 동안 8개 중에서 중간 난이도 미로 2개를 포함해 평균 4개를 푼 반면, 북한 이탈 주민은 쉬운 미로 2개를 푸는 데 그쳤다. 통일은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 제반 요인을 개선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통일로 가는 기간 동안 남한이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남한은 북한의 인적 자본을 증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북한 주민, 특히 영·유아와 청소년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북한 학생들이 결석하지 않고 충분히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경제특구나 공단을 조성해 북한 근로자를 채용해서 숙련도를 제고하고 자본주의 근로 의식을 갖게 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나아가 북한의 정책결정자, 지식인들이 경제개방과 시장경제 환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자극할 필요가 있다. 통일대박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의 준비, 무엇보다 사람의 준비에 달려 있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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