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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출신 드라기, 유로존 디플레이션 잡기 힘들 것

베르너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1994년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 떨어지는 물가를 받치기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일본은행에 제시했다. [블룸버그]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4일 정기 통화정책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자산담보부증권(ABS)을 사들이겠다”고 공언했다. 기준금리를 0.15%에서 0.05%로 내린 직후다. 시장은 그의 약속을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QE) 예고로 받아들였다.

‘양적완화의 설계자’ 영국 리하르트 베르너 교수

그런데 드라기는 자산담보부증권을 언제부터 얼마를 사들일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2년 전인 2012년 7월 드라기의 런던 선언과 비슷하다. 당시 그는 재정위기 회원국의 국채를 사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때도 구체적인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어쨌든 이날 회의 결과는 ‘QE의 설계자’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의 예측대로였다. 그는 회의 직전 전화 인터뷰에서 “드라기는 큰소리치겠지만 QE를 4일 회의에서 실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런 예상은 뜻밖이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물가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다. 올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해 동월에 비해 0.3%에 그쳤다.

-왜 드라기가 당장 QE 버튼을 누르지 못할 것으로 보는가.
“많은 전문가는 독일 반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가 아주 강력한 매파(인플레이션 파이터)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중앙은행가는 말보다 행동을 봐야 한다. 드라기는 이탈리아·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사태를 막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유로존 실물경제가 추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장기대출프로그램(LTRO) 등을 실시하지 않았는가.
“LTRO는 ECB가 시중은행에 저리·장기로 대출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중은행은 대출받은 돈을 다시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 돈이 돌게 만들려는 의도로 시행됐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실물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안 됐다는 게 증명됐다. 봐라! 지금 유로존 경제가 트리플딥(세 번 연속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보인다. 은행들에 빌려준 장기 자금이 일반 기업과 가계에 돌아가도록 유도하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ECB가 최근 표적 장기대출(T-LTRO)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긴 자금에 수수료(마이너스 금리)를 물리기로 한 것 아닌가.
“표적 장기대출프로그램은 ECB가 은행에 대출해줄 때 돈에 꼬리표를 단다. 시중은행은 ECB가 정한 특정 지역이나 산업 부문에만 대출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공격적인 선택을 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미국식 QE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베르너 교수가 말한 미국식 QE는 바로 시중은행 자산을 우량하게 만드는 QE다. 은행은 부실자산이 적어야 많은 돈을 일반 기업과 가계에 꿔줄 수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새로 달러를 찍어 국채와 모기지 채권(장기 부동산 담보대출)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베르너 교수는 “국채보다 모기지 채권 매입이 미국 시중은행 자산구조를 건전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왜 드라기가 QE를 실시하는 데 소극적일 것이라고 보나.
“약간 음모론같이 들리겠지만 드라기는 미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출신이다. 그는 2000년대 초 골드먼삭스 부회장이었다. 그는 Fed 이사들보다 훨씬 월가와 가까운 인물이다. 인플레이션 억제에 더 익숙한 인물이란 얘기다.”

- 그렇다고 그가 디플레이션 조짐을 진정시키지 못할까.
“나는 1990년대 일본은행(BOJ) 총재 등이 인플레이션 위기에만 익숙해 디플레이션에 일찍 대응하지 못한 것을 현장에서 봤다.”
베르너 교수는 일본 거품이 무너지고 있던 90년대 초 일본개발은행과 일본은행, 재무부(당시 대장성)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는 94년 떨어지는 일본 물가를 보고 일본은행에 ‘료테키긴유간와(量的金融緩和·양적금융완화)’라는 정책을 제시했다. 이 정책을 영어로 번역한 게 바로 Quantitative Easing(QE)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유로 값을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했다. 정치권 압력이 커지면 ECB가 QE를 실시하지 않을까.
“ECB가 QE를 실시할 수도 있다. 문제는 드라기 버전 QE가 2조~3조 유로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권 부실자산 제거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드라기가 다양한 ABS를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유로존 은행권 부실자산은 너무나 다양하다. ABS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남유럽에선 기업대출이 대부분 부실화했다. ECB가 회사채와 기업대출을 바탕으로 한 ABS를 사들일 만큼 파격적일지는 의문이다.”
드라기는 “단순하면서도 투명한 유로화 표시 자산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ECB가 몇몇 투자은행에 의뢰해 매입 대상 자산 포트폴리오를 연구하도록 했다”며 “연구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만 은행들이 처분하고 싶은 부실 또는 부실화 조짐을 보이는 자산을 ECB가 얼마나 사들일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QE가 꼭 은행권 부실자산을 제거하는 쪽이어야 하는가.
“국채 등을 주로 사들이면 은행권 여윳돈이 늘어나고 금리가 낮아지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이런 QE는 일본이 2001년부터 했으나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요즘 유로존 은행이 돈이 없어 대출하지 않는 게 아니다. 여윳돈이 넘쳐나고 있다. 오죽했으면 은행들이 ECB에서 빌려온 장기 자금을 다시 ECB에 예금해놓고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예금에 대해 ECB가 마이너스 금리를 물리지 않는가. 돈이 은행 창구를 나가 일반 기업과 가계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시중은행들이 대출 본능을 잃은 이유가 뭘까.
“우선 그들은 돈을 떼일까 염려한다. 경기 침체여서 기업 실적이 줄고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경우가 많다. 또 부실자산이 많아 은행 경영자들이 돈을 한 푼이라도 비축해 두려고 한다.”

-자금 수요 자체가 줄어들기도 했다.
“난 돈의 유통속도가 너무 떨어져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도 되지 않는다.”
화폐유통속도(V)는 1유로가 일정 기간 상품을 사고파는 데 몇 번이나 쓰였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를 보면 실물 영역에서 돈이 얼마나 활발하게 돌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로화 도입 초기인 2000년엔 2가 넘었다. 금융위기 직전엔 1.5 수준이었다. 이런 속도가 지금은 1도 되지 않는다. 미국은 올 6월 말 현재 1.47 정도다.

-유통속도가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속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유로존의 경우는 버블과 금융위기가 낳은 경기침체가 가장 큰 요인이다. 90년대 초 일본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 유로존 상황이 90년대 일본과 비슷하단 말로 들린다.
“유로존이 일본의 궤적을 밟기 시작했다고 본다. 시중은행의 신용공급이 너무 줄었다. 이런 때 중앙은행이 돈을 시중은행에 주입해준다고 해도 효과가 없다.”
베르너 교수는 중앙은행 통화공급보다 시중은행 신용공급 규모를 더 중시한다. 자신의 모델을 ‘신용수량설(Quantity Theory of Credit)’이라고 부를 정도다.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과 대비되는 말이다. 화폐수량설은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통화량에 주목한다. 반면 베르너 교수는 중앙은행 통화공급량보다 시중은행의 신용창출(Money Creation)을 통해 기업과 가계에 공급하는 신용 규모가 경제 활력을 결정한다는 쪽이다.

-또 어떤 점이 일본과 닮았는가.
“현재 ECB에는 의사결정 주도권을 쥔 사람이 뚜렷하지 않다. 드라기 리더십이 취약하단 얘기다. 운명의 시기인 94년 일본은행 총재에 취임한 마쓰시타 야스오(松下康雄)와 비슷해 보인다. 대장성(현재 재무부) 출신인 마쓰시타가 일본은행 출신에 둘러싸여 있었듯이 드라기는 독일 분데스방크 출신들에게 포위돼 있다.”

-옛 대장성이 일본은행보다 막강하지 않았는가.
“94년 당시엔 대장성의 주도권이 약해지고 있는 때였다. 당시 일본은행 출신들은 신자유주의 논리를 펴며 대장성이 ‘구식 경제 모델’ 신봉자라고 비난했다. 이런 때 대장성 출신이 총재가 됐으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 바람에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유로존 디플레가 본격화하면 일본처럼 오래갈까.
“일본처럼 20년씩 이어질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만 일단 시작된 디플레이션은 파격적인 조치가 이뤄져야 제동이 걸린다.”

-어느 정도 파격적인 정책이 필요한가.
“대공황 때 주요 나라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했다. 요즘은 금본위제가 아니니 정부가 시중은행 돈을 빌려 일자리 창출에 나서는 정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리하르트 베르너 1967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정경대(LSE)를 졸업했다.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거품시대인 80년대 후반 일본은행(BOJ)에서 경제분석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소피아대를 거쳐 현재는 영국 사우샘프턴대에서 금융통화정책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00년 선정한 차세대 리더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영미식 통화이론보다는 독일식 통화이론을 편다. ‘히틀러의 중앙은행가’이며 ‘관치금융의 아버지’로 불리는 할마르 샤흐트 전 라히이방크 총재처럼 경제 활동을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인 부문(머니게임)으로 구분해 신용공급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가 통화이론계 이단아로 불리는 까닭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금융의 역습, 과거로부터 미래를 읽다(Princes of Yen)』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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