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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버펄로의 비극적 최후는 세계화가 낳은 과오의 역사

그림 1 앨프레드 밀러, 『버펄로 사냥』, 1858-1860년. 인디언들이 엄청난 버펄로 떼를 절벽으로 몰아 떨어뜨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대자연의 장관을 상상력으로 그렸다.
아메리카에 엄청난 수의 버펄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역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콜럼버스 이전에는 5000만 마리 이상이 평원을 누볐고, 19세기 중반까지도 그 수가 2000만 마리쯤 되었다. 시기적으로 변동하기는 했지만 버펄로 수는 대체로 생태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버펄로를 위협하는 대표적 야생동물은 늑대였는데, 이들이 버펄로의 개체 수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버펄로의 숫자에 더 큰 영향을 주는 존재는 인간이었다. 전통적으로 인디언은 고기·가죽·뼈를 얻기 위해 버펄로를 사냥해 왔다. 그러나 유럽인과의 접촉이 있기 전에 인디언은 버펄로와 장구한 기간을 함께 지내왔다.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생태적 균형이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⑬ 아메리카 버펄로 대재앙

인디언의 버펄로 사냥능력은 말을 도입하여 기동력을 높임으로써 크게 변화하였다. 이후에 총이 들어와 널리 사용되면서 버펄로를 사냥하는 능력은 다시 한 번 도약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규모로 유목생활을 하는 인디언에게 버펄로를 필요 이상으로 사냥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교환을 통해 새로운 물품을 얻을 필요성이 있기는 했지만, 생태계를 교란시킬만한 규모의 유인은 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버펄로 사냥을 묘사한 밀러의 그림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광활한 대지에서 많은 수의 인디언이 엄청난 수의 버펄로 떼를 몰아 큰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작전은 구사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렇게 해서 죽은 버펄로들은 손상이 많아 값어치가 크게 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꺼번에 많은 버펄로를 잡을 경우 유목생활을 하는 인디언들이 감당하기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낭떠러지로 버펄로를 유인하는 방식은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그림에서처럼 대규모로 사냥을 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그림 1은 대자연의 장관을 그려보고자 한 화가의 상상력의 결과물이었으리라.

가죽 수요 늘자 버펄로 사냥 급증
버펄로의 수가 본격적으로 줄어든 것은 백인에 의해서였다. 남북전쟁 이후 가죽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전문적인 백인 사냥꾼들이 대규모로 버펄로 사냥에 나섰다. 일부 인디언들도 점차 판매를 위해 버펄로 사냥의 빈도를 높였다. 그런데 인디언의 생활에 요긴한 고기와 생활재료를 공급하는 버펄로의 수가 줄어들면 인디언의 생존 기반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 백인들은 버펄로 사냥이 인디언을 축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인식하고서 의도적으로 버펄로 사냥을 장려하였다. 예를 들어 인디언과 많은 전투를 벌였던 셰리단(Philip Sheridan) 장군은 버펄로 사냥이 인디언의 물적 기반을 파괴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버펄로 사냥꾼에게 탄약을 공급하고 포상 제도를 마련하자고 의회에 제안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1865년에만 약 100만 마리의 버펄로가 목숨을 잃었으며, 1872~1874년에는 400만 마리 이상이 사냥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버펄로 사냥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 일명 버펄로 빌(Buffalo Bill)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버펄로를 사냥하여 미국의 육군과 캔자스퍼시픽 철도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했는데 불과 7개월 만에 4280마리나 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Buffalo Bill’s Wild West)’라는 공연단을 조직해 미국 각지는 물론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버펄로 사냥은 쇼 비지니스의 형태로 세계화되었다.

그림 2 『버펄로를 향해 총을 쏘는 캔자스퍼시픽 열차의 승객들』, 1871년 작품.
버펄로 사냥이 늘어난 데에는 철도 부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도회사들은 버펄로 사냥을 위한 특별열차를 편성하였다. 그림 2는 캔자스퍼시픽 철도회사가 편성한 특별열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는 열차 위에서, 그리고 일부는 열차에서 내려 사방으로 버펄로를 향해 총을 쏘고 있다. 이제 버펄로는 백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진 ‘스포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잡은 버펄로를 백인들은 주로 가죽을 얻는데 사용하였다. 백인 사냥꾼은 가죽만을 벗겨 모으고, 사체는 대부분 그대로 들판에 방치하였다.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들판에 버려진 사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들짐승과 날짐승에 의해 뜯기고 햇볕에 말라붙어 하얗게 뼈를 드러냈다.

그림 3 디트로이트의 미시간 카본공장의 야적장에 쌓아놓은 버펄로의 머리뼈. 1880년대 촬영.
시간이 흐르자 이 뼈는 수집상에 의해 모아져 산업용으로 사용되었다. 뼈를 태운 재는 고급자기인 본차이나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설탕과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버펄로 뼈의 가장 큰 수요자는 비료공장이었다. 그림 3은 산업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더미처럼 많은 버펄로의 머리뼈를 쌓아놓은 디트로이트의 한 공장 야적장 모습을 보여준다. 이 머리뼈 더미는 높이가 9m에 이르렀고 길이가 수십m에 달했다고 한다. 이미 사냥감으로 쫓기고 있던 버펄로 떼에게 가해진 결정적인 한 방은 바로 ‘산업용 수요’였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하면서 버펄로의 수는 1880년대에 급속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1892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살아남은 버펄로는 1091마리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북아메리카에 남아있는 버펄로는 보호정책의 결과로 약 50만 마리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부분 다른 들소와 교잡하여 태어난 것들이며, 야생의 상태에 있지도 않다. 진짜 버펄로는 실질적으로 멸종했다고 볼 수 있다.

생태계 보존과 생물의 종 다양성 유지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버펄로의 멸종은 자연의 정복을 진보라고 여겨온 구시대의 잘못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항해 시대 이래 구세계와 신세계의 접촉은 양 세계 모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불리는 교류를 통해 사람은 물론 식물, 동물, 미생물과 바이러스가 양방향으로 이동하여 지구 각지의 생태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구세계인들에게 강제적 세계화를 강요당한 신세계는 가히 혁명적인 생태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쫓겨나고 유럽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다시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이 유입되었다.

버펄로 희생 후 소떼 유입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이 들어와 기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파괴했다. 경제적 유인의 힘은 대단했다. 때로는 털가죽과 같은 재료를 얻기 위해, 때로는 원주민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산업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때 대평원의 주인공이었던 버펄로는 속절없이 희생을 당해야했다. 그 자리에 소떼가 유입되면서 북아메리카의 생태계는 유럽형으로 개조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는 과거의 지구가 아니다. 지구 생태계에는 인간의 무지, 편견, 탐욕과 그에 따른 수많은 실책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버펄로가 처했던 운명은 세계화 시대가 남긴 과오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이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었을까?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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