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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보신과 망신 사이 음주 경계, WHO 기준은 ‘소주 반병’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의 작품 ‘숙취’(1888년)
지난달 11일 오전 11시 55분.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 마린 카운티의 911센터 응급요원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Carpe Diem(오늘을 잡아라)’, 즉 ‘지금 이 시간을 즐겨라’라는 명 대사로 청소년들에게 지금의 중요함과 꿈을 심어줬던 1990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연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그렇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98년 영화 ‘패치아담스’에서 웃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던 그다. 그는 스크린 속에선 웃고 있었지만 현실에선 내면의 악마와 싸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30년 동안 그를 괴롭힌 악마는 다름 아닌‘알코올’이었다. 청년시절 시작된 알코올과의 인연은 중독으로 발전했다. 그 후 수차례 재활센터를 들락거려야 했다.

<28> 알코올중독 회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소주병을 끼고 살거나 취해서 길거리에서 잠든 술주정뱅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진단은 다르다. 술 취해 횡설수설하다가 아침이면 자기는 절대 중독이 아니라고 외치는 남성, 낮에 몰래 한잔하고 저녁이면 멀쩡해지는 주부, 이들이 모두 알코올 중독의 초기 환자라고 본다. 저녁이면 술 한 잔 생각이 나고 1주일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소주를 나누는 필자도 어쩌면 알코올 중독의 문을 두들기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말술이면 아들이 대물림할 확률이 4배나 높다고 하니 걱정이다. 소주 반병의 저녁반주도 이젠 망설여진다. 그나마 조금 위안을 삼는 것은 하루 소주 반병가량의 음주는 건강이나 중독에 큰 문제가 없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견해다.

주사를 ‘무용담’으로 용인하는 풍토 문제
전문가들은 중독의 위험성을 무얼 보고 판단할까? 답은 간단명료하다. 판단 기준은 술을 왜 마시는 가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던 필자의 지인은 키 생각이 날 때마다 한잔씩 했다. 한잔하면 일단 키를 잊을 수 있었다. 홀로 마시는 횟수가 점차 늘었다. 평소 주량이 소주 한 병이던 그 친구가 한 자리에서 세 병을 비운다고 하더니 어느 날 회사를 그만뒀다. 술자리에서 ‘키’를 언급한 상사를 넥타이 채로 잡아 팽개친 것이다. 그 친구는 술을 분풀이로 마셔왔던 셈이다.

중국의 작가 린위탕(林語堂)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애주가에겐 정서가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떠들썩한 자리에서 적당량의 ‘사회적 음주’는 살아가는 즐거움의 하나다. 하지만‘현실을 잊으려고 퍼 마시는 폭주’는 중독의 첫째 요건이다. 즉 개인문제를 술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중독 위험이 높다.

중독의 둘째 요건은 술 마시기에 대한 사회분위기다. 술 마시고 벌어진 추태를 ‘무용담’으로 받아들이는 등 술에 관대한 우리 사회는 중독의 두 번째 허들을 쉽게 넘게 한다.

세 번째 요건은 각자의 유전자다. 특이한 숙취 분해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 알코올 중독이 되기 쉽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면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늘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술을 보신(補身)의 단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일러스트 박정주
술로 인한 사망, 고혈압·담배 이어 3위
알코올 중독의 4단계는 (1)자주 마시기 (2)가끔 필름 끊기기 (3)시작하면 발동 걸리기 (4)술 끼고 살기다. 1단계는,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쉽게 들어선다. “술을 못하면 등신(等神)이요, 적당히 하면 보신(補身)이요, 지나치면 망신(亡身)”이란 농담엔 ‘남자가 술은 조금 해야지’라는 사회적 압력이 내포돼 있다. 술로 인한 실수는 2,3단계에서 주로 나타난다. 술을 마시다가 절제의 끈이 끊어지면 큰 낭패와 망신을 겪을 수 있다. 상사를 넥타이 채로 잡아챈 내 친구의 경우 꾹꾹 누르고 절제해왔던 분노가 소주 3병에 튀어나온 셈이다.

알코올은 뇌 활동을 조절하는 신호물질을 증가 혹은 감소시킨다. 도파민·세로토닌의 분비를 늘려서 연애할 때처럼 공연히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오게 한다. 하늘이 돈짝만 해지고 귀가 길에 뜬금없이 장미 열 송이를 사가 돈 낭비했다며 집사람에게 ‘구박’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상태는 소주 1병, 즉 혈중 알코올 0.1%까지다.

이 정도를 넘어서면 알코올은 몸을 휘청거리게 한다. 글루타메이트·가바(GABA)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정교한 밸런스가 깨져 두뇌가 일을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결과 학습과 기억 장애가 일어난다. 또 근육의 움직임이 둔해져 혀가 꼬이고 다리가 풀린다. 심하면 ‘땅이 얼굴로 올라온다!’라고 외치며 넘어진다.

특히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가바는 뇌의 ‘중앙통제장치’다. 술이 ‘술술’ 넘어가서 혈중 농도가 0.2%를 넘어서면 알코올이 우리 몸의 통제실 스위치를 내려버려 뇌가 마취된다. 평소엔 이성으로 조절되던 성욕억제 스위치도 내려진다. 젊은 커플은 새 식구가 생기는 ‘연애사고’를 치지만 중년에선 가정이 위태로워지는 ‘불륜사건’이 생기기도 한다. 마취된 뇌는 몸의 반응시간도 늦춘다. 소주 한 병이면 몸의 반응시간이 0.2초 늦어진다. 이에 따라 자동차의 제동거리는 두 배나 늘어난다. 정신이 멀쩡한 것 같아도 운전대를 잡았다간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다.

보신과 망신의 경계점은 WHO의 ‘적정음주’, 즉, 남성 기준(여성은 절반. 임신 여성은 금주)으로 맥주 2캔, 와인 0.4병, 소주 반병 그리고 위스키 3 잔까지다. 술을 자주 마시는 1,2단계를 넘어 3,4단계에 들어서면 망신의 단계를 넘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신(死神)이 된다. WHO가 지난 20년간 사망·장애의 발생 원인을 조사해 보니 고혈압·흡연에 이어 알코올이 3위를 차지했다. 또 살인의 42%, 교통사고의 30%, 응급 입원환자의 11%가 술 탓이었다.

알코올 분해 유전자, 유럽보다 한·중·일 강력
국내 20세 이상 성인의 63%가 술을 마신다. 10.9%가 중독 위험군(群), 4.2%가 알코올 중독자다. 이는 미국·일본보다 높은 비율이다. 음주량 세계 13위, 소주 포함 독주 소비량 10년 연속 1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이 특별히 술에 센 DNA(유전자)를 가진 것일까?

알코올 중독의 세 번째 요건, 즉 유전자의 영향은 50% 정도다. 유전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데 사회·문화적 요인보다 영향을 더 많이 미친다. 아버지가 주정뱅이이면 그 아들이 설사 정상인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도 주정뱅이가 되기 쉽다. 알코올은 알코올 분해 유전자에 의해 숙취물질(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되고 숙취물질은 숙취분해 유전자에 의해 물로 변한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 쉬운 유형은 남들보다 숙취 물질이 훨씬 덜 생겨서 다음 날 술을 또 마시려는 사람이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여성의 경우 알코올의 분해속도가 느려서 술에 장시간 취해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의 숙취분해 유전자가 강하다면 다음날 머리가 멀쩡해서 또 술을 찾게 된다. 그만큼 중독 위험성이 높다.

동아시아인, 특히 한국·일본·중국인은 알코올 분해 유전자가 유럽인보다 강하지만 숙취물질 분해 유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따라서 음주량은 유럽인 이상으로 많지만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기 때문에 그나마 알코올 중독자가 유럽의 반에 그친다.

지나친 음주 탓에 한국인의 간암 사망자 비율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내 1위다. 간 질환은 국내 남성 사망률 3위다. 알코올은 WHO의 1급 발암물질이다. 또 ‘만성 자살병’을 일으키는 ‘법적 허용 마약’이다.

뇌의 신경연결도. 한잔의 음주로 기분이 좋아지는 ‘보상’회로가 견고해지면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 쉽다.
음주→심적 안정→중독회로 강화 ‘악순환’
‘어린 왕자’가 별에서 주정뱅이에게 이야기한다. “왜 술을 마셔요? 잊으려고. 무엇을 잊으려고요?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왜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신다는 것이.”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얘기다. 알코올 중독의 전형적인 악순환 패턴이다. 마시면 슬픈 기분이 금방 사라지는 ‘보상’이 반복되면 뇌의 ‘보상심리’회로, 즉 중독회로가 점점 튼튼해진다. 올해 7월 권위 있는 과학 전문지 ‘네이처(Nature)’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반복된 뇌의 전기 자극은 실제로 그 지역의 신경세포(뉴런) 사이의 연결고리(시냅스)를 점차로 많이, 강하게 만든다.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이유’가 눈으로 확인된 셈이다.

한번 완성된 알코올 중독 회로는 뿌리가 깊다. 10년 간의 음주 생활을 청산하고 20년 간 잘 버텨왔던 로빈 윌리엄스도 우연히 찾은 한 가게에서 마신 ‘잭 다니엘’ 위스키 한잔으로 다시 폭음이 시작됐다고 고백했다. 끊은 것이 아니고 참고 있었던 것이다.

폭탄주는 ‘빨리, 같이 취하자’는 한국형 폭음 형태다. 다행히도 최근엔 대기업을 중심으로 폭탄주 회식 대신 음악회를 가는 일도 늘어났다고 한다. 강요된 폭음으로 인한 개인의 건강 악화와 국가 GNP의 4%에 해당하는 음주관련 손실은 이제 없어지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술을 사신·망신 이전의 보신(補身) 수준에만 머물도록 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인하대 바이오융합연구소(www.biocnc.com)와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바이오 테크놀러지(BT)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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