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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교황의 세월호 애도는 부당한 고통 막자는 뜻이리라

일러스트 강일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근래의 대사건이었다. 요즘 보도되는 큰 사건이란 전쟁, 테러리즘, 지진, 대형사고, 역병, 폭력, 부패, 사기, 협잡 등 사람이 사는 지구가 얼마나 불안한 곳인가, 또 우리 사회의 경우, 다행히도 큰 천재(天災)는 피해가면서도, 정치나 인간관계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매일매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들이다. 교황의 방문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대사건이었다.

슬픔의 보다 높은 자리

국가 원수나 국가 기구의 수장이 나라를 방문하는 것도 중요한 사건이다. 국가 수장의 뒤에는 국가라는 조직의 힘이 있고, 그것이 뒷받침하는 권위는 그러한 인물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대사건이 되게 한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바티칸은 ‘바티칸 도시국가‘라는 독립국이다. 교황은 이 독립국의 수장이다. 교황은 온 세계의 12억 가톨릭 신자들이 이루는 조직의 정점에 있다. 바티칸시는 다른 국가나 마찬가지로 내각에 해당하는 추기경과 신부들의 회의가 있고, 많은 현실적 결정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교황은, 어떤 설명에 의하면, 민주주의나 적어도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절대군주다.

개인적 실천의 삶이 프란치스코의 힘
‘교황무류성(無謬性)’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교황이 선포하는 말씀은 다시는 논박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교황은 이렇게 조직이나 제도상의 절대권자이지만, 그 권위의 근본은 정신적인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권위는 지도자의 권위가-또는 흔히 이야기하는 카리스마도-반드시 ‘일반의지’가 된 민의(民意) 또는 다른 현실적인 힘에서만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 또는 호소력은 그의 개인적 삶에서 시작한다. 취임하면서 그가 새 이름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이 이미 그것을 표현한 것이지만, 널리 보도된 바 그의 검소한 일상생활은 그가 선택한 정신적 삶의 모습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면서 그의 개인윤리는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던 것처럼, 집단 윤리로 확대된다. 종교가 요구하는 윤리의 강점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속적 윤리강령과는 달리,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비윤리적 행동을 개인과 집단의 윤리의 틈새에 감추기 어렵게 한다.

개인적 실천의 삶을 넘어, 교황의 관심은 빈곤과 괴로움 속의 사람들을 향한다. 그는 행동에서나 강론에서나 특히 가난과 고통 속의 인간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동성당의 강론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바 사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이 교황의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보인다. 여기의 사랑은 특히 불우한 사람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사랑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분단의 문제와 세월호의 비극 후에 계속되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관련하여, 염수정 추기경은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교황의 메시지를 요약하였다. 정치에서나 개인적으로나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으로 사람들을 집단적 투쟁에 동원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동성당 강론의 제목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강론’이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화해를 통하여 화평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결정에 계기가 된 것은 아시아의 가톨릭 청년들이 모이는 아시아청년대회였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행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은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것과 관계된 것일 수 있다. 교황은 지난 5월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번 방한 시에 중국의 상공을 지나면서, 중국에 대한 선의를 전달하고, 또 기자회견에서 중국 방문의 희망을 표명하였다. 중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있으며,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나라다.

원수 사이 같은 이·팔 지도자 초청한 뜻
세계 분쟁 지역의 문제 해결에 교황의 방문이나 설법이 무슨 소용이 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교황은 중동을 방문한 후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을 바티칸으로 초청하였다. 6월에는 바티칸에서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회가 있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행한 잔학한 살육전은 평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이 역사적 갈등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교황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두 지도자를 초청한 것은 두 지역의 갈등에 대한 정치적 타결책을 직접적으로 거래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초청의 목적은 함께 하는 기도였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까? 교황은 명동성당의 강론에서,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기도도 큰 힘이 된다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분단된 한국에서 온 민족이 함께하는 기도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일을 바르게 달성하는 데에는 윤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의 위 또는 아래에 있는 공통의 소망에서 나온다.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이다. 단순히 마음을 집중하는 것 또는 경건하게 갖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갖추어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다만 경건함을 지니는 마음-옛날에 지경(持敬)이라고 불렀던 마음가짐이 유치하고 허망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러나 교황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반향(反響)은 정신적 전환에 대한 갈증이 사람들의 마음 깊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현실은 현실이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어서 현실은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만국정쟁 만인정쟁과 그로부터의 임시 휴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남북 관계에 못지 않게 평화와 화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사회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이 특히 심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이 교황의 방한 결정의 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교황은 사회적 분열의 요인이 되는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번영에서 제외된 이들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이 위안부 문제나 세월호 참사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이에 추가하여, 지리멸렬이 된 사회의 정신상태를 보여준 것이 윤 일병의 죽음인데, 이것은 교황의 눈에 띠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교황은 세월호 비극의 유족을 만나기도 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리본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여, 교황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중립을 지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동정과 애도를 표하였다면, 가족의 격렬한 아픔에 완전히 일치하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원한과 울분에 함께 잠기자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교황이 애도하는 마음을 표하였다면, 그것은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이 슬픔으로 옮겨 간다. 슬픔은 여러 가지 가닥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감정이다. 슬픔은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제삼자가 나누어 갖는 슬픔이 가족의 슬픔과 같다고 행세하는 것은 참월한 일이다.

가족의 슬픔을 지켜보는 슬픔은 그것을 존중하는 예절의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식은 사자(死者)와 가족의 고통, 그리고 인간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이른다. 슬픔의 가장 깊은 층위에 놓여 있는 것은 인간의 공동운명에 대한 깨우침이다. 이것은 현실로 되돌아와 다시 오늘과 내일에 일어날 수 있는 부당한 죽음과 고통을 생각하고 그것을 완화할 일들을 생각하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죽음이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부당한 죽음과 부당한 고통을 방지하는 방법에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세월호의 비극에 애도를 표하는 교황의 마음은 이러한 넓은 의미의 슬픔의 마음, 자비(慈悲)의 마음 그리고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한 성심으로 이어지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 대책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데에는 의식하든 아니하든 이러한 마음의 층위가-무의식의 사회적 규범으로-그 아래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공공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사람의 의무는 현실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그 첫 책임은 물론 수난자를 위로하고, 둘째로 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진상의 규명은 분노를 터뜨리고 복수를 위해서보다도,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고통과 불행한 죽음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현실적 방책과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다.

이기고 지는 것 보다 중요한 ‘하나됨’
미국의 철학 교수이며, 정치행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자기와 같은 흑인 배경의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미조리 주 퍼거슨에서 최근 경찰이 흑인 소년을 총살한 사건에 대한 대책, 민간인 살상을 불사하는 미국의 중동정책 등-을 비판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정치세력들의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으려는 까닭에, 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서야 할 자리는 여러 정치세력의 가운데 지점이 아니라 “보다 높은 자리, 도덕의 자리, 더 나아가 성스러운 자리이어야 한다”고 웨스트 교수는 말하였다. 이것은 전혀 다른 정치 상황에서의 이야기지만, 어려운 문제에 부딪는 정치 지도자는 마땅히 이러한 높은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반드시 집단화된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누어 갖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고, 어제의 불행을 넘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삶을 말한다. 이것은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 문제 그리고 국가 간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월호의 경우 슬픔을 나누어야 할 때도, 보다 높은 슬픔의 자리는 현실의 문제를 널리 살펴보게 하는 자리이다. 거기로부터 삶의 현실 문제를 보살피는 일이 시작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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