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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아버지 아직도 미워 … 칠순 앞둔 작가 '명절 앓이'

소설가 김원우씨는 현대사의 피해자다. 남로당원이던 아버지가 6·25전쟁 중 월북하는 바람에 성장과정에서 고통이 컸다. 김씨는 “통일이 돼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누그러들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족과 고향을 돌아보는 추석이다. 동구 밖 미루나무, 서늘한 가을 하늘…. 추억의 공간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경림의 시 ‘파장(罷場)’에서처럼 세파에 시달린 못난 이들, 오랜만에 만나 얼굴만 봐도 흥겨운 계절이다.

가족사 처음 입 연 소설가 김원우
남겨진 가족 끔찍할 정도로 고통
북녘 이복 형제 꼭 만나고 싶어



 하지만 추석이 달갑지 만은 않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소설가 김원우(67)씨가 그렇다. 그는 “명절이면 특유의 씁쓸한 맛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6·25전쟁 중 홀로 월북해 남은 가족들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아버지 때문이다.



 김씨는 형 김원일(72)씨와 함께 형제 소설가다. 그의 아버지는 남로당 고위직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기울자 1950년 9월 월북했다. 형 원일씨는 한국전쟁을 다룬 장편 『불의 제전』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동생 원우씨는 작품으로나, 말을 통해서나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김씨가 입을 열었다. 3일 오후 서울 길동 작업실에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뜻밖이었다. 가족을 팽개치고 이념을 좇은 아버지였다. 홀어머니와 자식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자기 성격의 삐뚤어진 부분은 아버지 탓이 크다는 말도 했다. 김씨의 아픔은 사소한 개인사가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가 국민 전체의 가슴에 남긴 ‘공동 트라우마(정신적 상처)’의 다른 이름이었다.



 -형과 달리 아버지를 작품으로 다룬 적이 없다.



 “사실 아버지를 잘 모른다. 내가 세 살 때 월북했다. 내가 자신을 닮았다고 굉장히 좋아했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상(像)이 거의 없다. 형이 많이 다뤄서 나는 일부러 거리를 뒀다. 작가가 가족 얘기를 할 수 없으니 불리했지만 오히려 ‘지적인 세태 고발 소설’이라고 자부하는 지금의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영끼 많은 이념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운동합네 하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우익에 밀려 출세 못한 데 대한 앙심이나 분풀이가 한편에 있는 가운데 소년적인 감상에서 신념을 좇으며 살았던 것 아닐까. 가족은 뒷전이다 보니 홀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의 삶은 끔찍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삶의 스트레스를 자식들에 대한 매로 풀었을까. 그러니 아버지가 진절머리 나게 밉다고 할까. 증오와 분노 비슷한 감정이 70∼80%다. 쉽게 포용하지 못하고 사람사귐에 인색한 내 성격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재혼해 오누이를 뒀다고 들었다. 그들을 꼭 만나고 싶다. 그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아버지 소식은 알고 있나.



 “한 북한연구기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아버지는 80년대 초반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80년 남한에서 돌아가셨으니 그보다 한 두해 후인 듯 하다. 돌아가신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제사를 못 지내고 있다. 기일(忌日)조차 모른다. 가족관계기록부에서 아직 아버지 이름을 지우지도 못하고 있다. 형과 차례·제사를 나눠 어머니 제사는 내가 드리지만 명절 차례는 형이 지낸다. 추석에 밥 한 그릇 올려 놓고 추도예배 드리면 문득문득 생각 난다. 한때 숙청됐다가 복권됐다고 하는데 계속 찬밥 대접만 받다가 가슴 속에 응어리를 안은 채 병사한 건 아닌가. 혹시 북한의 자녀들도 우리처럼 고생은 안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생 자체랄까, 명절 특유의 씁쓸한 맛을 뼈저리게 느낀다. 형이나 나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 돌아온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할 방법이 있나.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 분단 모순으로 인해 한국인의 심성체계가 과거와 달리 많이 꼬이게 됐다고 생각한다. 아까 얘기한, 내 성격의 뒤틀린 부분도 역시 넓게는 분단 때문 아닌가. 우리 사회의 진보·보수 갈등, 세월호를 둘러싼 대립 역시 분단이 가져온 현상들이다. 체제에 대해 단 한 가지도 긍정하지 않으려 하고, 어느 정도 법이 그렇게 돼 있으니 믿어도 될 것 같은데 얼토당토 않게 법 위의 법을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사람의 이념처럼 바뀌기 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활 조건이 약간만 달라지고 적당한 계기가 생기면 쉽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이념이다. 남북 체제에 변화가 오면 사람들의 심성은 어렵지 않게 바뀌리라 생각한다.”



 -세월호 유가족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한국은 여론정치에 의해 너무 흔들린다. 개인의 정체성은 흔들려봤자 개인의 문제이지만 국가는 다르다. 큰 대의를 세웠다면 웬만한 잔가지는 쳐버리고 수용할 건 수용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상한 에고이즘(개인주의)이 사회 밑바닥을 흔드니까 세월호 처리를 둘러싼 대립이 장기간 소모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김씨는 2011년 3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을 1년 남기고서였다. 3기였지만 다행히 임파선으로 번지지는 않아 대구 동산병원에서 25㎝를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맥주나 막걸리도 가끔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셈인데 두렵진 않았나.



 “수술 직전의 공포는 말로 못한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항암치료 받으러 대구로 내려갈 때는 별별 생각이 다 나더라. 쓰고 싶은 글, 할 일이 많다는 최면을 자꾸 걸었다. 요즘은 한층 엄격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오전 4시면 일어나 한 시간 맨손체조, 한 시간 반 신문 읽고 나서 원고 10쪽을 쓰고 나면 오후 2시다. 6시까지 책 보다 귀가한다. 2012년 정년 퇴임 후 한 해 한 권씩 책을 냈다. 에세이·소설 이론서·역사소설 등 이전에 안 쓰던 장르들이다. 소설도 그렇지만 다른 장르에서도 한국은 근대성·세계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본다.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쓰는 게 목표다.”



 -한국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는 있나.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내놓아야 하는데 한국 소설은 자꾸 어리광을 부린달까 타협하려는 것 같다. 독자도 의식한다.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을 더 신랄하게 까발려야 한다. 그러려면 남북 분단 모순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 어렵다. 작품은 번역하면 1급인지 아닌지 수준이 금세 드러난다. 소설은 아직 세계적인 수준을 못 따라간다. 시(詩)에서 미당 서정주(1915∼2000)같은 사람은 세계적이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원우=1947년 경남 진영 출생. 77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무기질 청년』 『객수산록』, 장편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 『부부의 초상』, 일본 문화 에세이인 『일본 탐독』 등을 썼다. 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대산문학상 등 수상. 세태에 대한 거침 없는 비판, 익살스러운 풍자 등을 곁들인 특유의 스타일로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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